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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2/21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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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예로부터 베풀어 오신 당신의 자비와 자애 기억하소서. 원수들이 저희를 짓누르지 못하게 하소서. 이스라엘의 하느님, 모든 곤경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주님, 이 백성의 정성을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절제하고 극기하며 선행을 실천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4년 2월 21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2월 2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요엘서 2장 12절)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요엘서 2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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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서 2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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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요나서 3,1-10)
    니네베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섰다.

  • 오늘 복음
    (루카복음 11,29-32)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2월 21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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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그럽고 자비로우니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루카복음
11장 29-32절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2월 21일 05:00
박형준 라파엘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7:47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최정훈 바오로 신부

 

놀라운 표징을 바라는 사람은 정작 놀라운 일이 일어나더라도 회개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요나 예언자의 표징과 예수님의 표징에 대하여 들려줍니다. 요나의 표징이 무엇입니까?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요나의 표징을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 동안 있다가 기적적으로 구제받은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표징은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실 부활을 뜻합니다. 

그러나 오늘 들은 루카 복음서는 요나의 표징을 단순히 “요나 예언자” 그 자체라고 합니다. 요나는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을 위하여 파견되었으며, 니네베 사람들은 오직 요나의 설교만 듣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이 세대 사람들을 위한 하나뿐인 표징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표징이신 예수님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데, 이는 이 세대가 믿음이 없음을 반영하며 그들이 “악한 세대”임을 드러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불신자의 청을 거절하십니다.

우리도 주님께 기적을 요구하지는 않는지 되돌아봅니다. 이미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이신 주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고, 많은 말씀을 남겨 주셔서 성경과 전승으로 내려오는 데도 우리는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더 깊이 회개하고자, 그리고 주님께서 계신지 온전히 믿고자 어떤 놀라운 일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셔야 할 의무가 없으시고, 이미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유일한 표징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고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갑니다. 놀라운 표징을 바라는 사람은 정작 놀라운 일이 일어나더라도 회개하지 않을 것입니다(루카 16,31 참조).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그러자 회개한.

 

오늘 주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어떤 표징일까요? 그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니네베가 망할 것이라고 회개를 선포하자 사람들이 즉시 회개한 것이 바로 요나의 표징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요나서는 이렇게 간단히 묘사합니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에서 ‘그러자’가 특별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회개하라고 하자 즉시 회개하고 하느님을 믿습니다. 

‘너 회개해!’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그러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우린 회개하고 니네베 사람들처럼 하느님을 믿습니까? 

회개하라는 뜻에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즉시 그 지적을 받아들입니까? 다시 말해 지적을 받자마자 바로 회개합니까? 

그러자 반박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변명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핑계를 대지 않습니까?
그러자 합리화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머뭇거리지 않습니까? 

사실 니네베 사람들을 회개시킨 요나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요나는 주님께 명령을 듣고 도망친 사람입니다. 

그는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여 주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 싫은 사람이었습니다. 동족 이스라엘만 회개하고 주님의 용서를 받는 것을 원했지 원수 니네베가 회개하고 주님의 용서받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고래뱃속에서 삼 일 밤낮을 보내고 난 뒤에야 다시 말해서 죽었다가 살아난 뒤에야 마음이 바뀌었고 그렇게 자신이 회개한 다음에 회개를 선포한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회개를 선포한 것이고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세대뿐 아니라 우리 세대에게도 필요하고 주어져야 할 하늘의 표징입니다. 

사실 병이 낫는 것보다 마음이 바뀌는 것이 기적이고, 떼돈을 벌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돈을 벌게 된 것이 기적이 아니라 회개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회개하게 된 것이 진정한 기적입니다. 

세상 소망을 이룬 것이 기적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얻은 것이 기적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소유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 기적입니다. 

아무튼 그러자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이 부러운 오늘 우리입니다. 그러자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 때문에 부끄러운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표징의 기둥은 지혜, 지혜의 기둥은 진실함.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는 악하다고 하십니다. 표징을 요구하지만, 지혜를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지혜로 회개하였고, 남방 여왕이 솔로몬을 찾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솔로몬과 요나보다 더 위대한 설교를 하시는 예수님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왜 표징보다 지혜가 앞서야 하는지 알아야겠습니다. 운전면허가 하늘나라의 기쁨이라고 가정해봅시다. 운전면허는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으로 나뉩니다. 운전면허를 따는 기쁨을 누리려면 먼저 필기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필기시험을 통과하지 않고 실기시험을 치르게 하지는 않습니다. 교통법규를 제대로 모르는데 운전만 할 줄 안다면 큰일 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필기시험이 지혜이고 실기시험이 표징입니다. 표징은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지혜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는 지혜는 추구하지 않았는데 능력만 주어졌습니다. 푸틴 대통령도 신앙인입니다. 자기가 그리도 오래 러시아를 지배하는 것은 분명 하늘이 주신 능력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분명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시골에서 낚시로 여생을 즐기는 사람만 못합니다. 

자국의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타국의 국민이 자기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죽어갑니다. 현재도 근심 걱정으로 하루하루 살아갈 게 뻔합니다. 그러니 악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능력은 지혜와 함께, 오히려 지혜를 먼저 갈구하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왜 어떤 이들은 지혜를 추구하지 않을까요? 지혜를 추구한다는 뜻은 더 행복해지기 위해 유튜브 강의도 듣고 책도 읽는 등의 노력을 꾸준히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어떤 이들은 설교나 강의, 책의 지혜에 관심이 없을까요? 그것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게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행복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폭력성 때문에 가정도 불화가 일어나고 관계도 힘들어지고 합의금을 주느라고 재정적인 어려움도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을 때릴 때 쾌감을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남보다 싸움을 잘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지금은 남을 때리지 않겠다고 말해도 또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또 폭력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행복한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그것이 1%의 기쁨은 줄지라도 99%의 고통을 남긴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래서 사람을 평화와 겸손함으로 이끕니다. 따라서 때로는 폭력을 쓰는 게 자기에게 더 행복한 일이라 믿을 때는 절대 폭력을 쓰지 말라는 사람의 말은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지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진실해야 합니다. 거짓은 지금의 1%의 기쁨을 99%라고 믿게 하는 도구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들은 그래서 점점 더 큰 죄로 떨어지게 됩니다. 

죄를 짓는 사람 중에 진실한 사람은 다 한 명도 있을 수 없습니다. 계속 더 큰 죄를 짓게 만들기 위해 사탄은 지금의 고통을 거짓으로 가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도 그 부끄러운 고통을 스스로의 힘으로 가리려고 한 것과 같습니다. 두렁이를 스스로 만들어 입고 죄가 행복이라 믿으려고 한 그들에게 하느님은 지혜의 말씀을 해 주십니다. 

“사람아, 너 어디 있느냐?”

그런 식으로 행복하냐는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와 찜질방에서 누가 더 늦게 나가느냐 시합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이기기는 했지만, 더는 그런 게임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기는 쾌감보다 견뎌내야 하는 고통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기는 쾌감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을 거짓말로 덮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람아, 너 어디 있느냐?”라는 지혜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그러며 믿고 싶으니까 하늘에서 오는 기적이나 보여달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먼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진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잠재력을 가늠할 때 출발점에 집중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합니다. 즉, 타고난 재능에만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타고난 재능이란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고 합니다. 단지 남들보다 조금 일찍 지식을 익혔거나 부모에게 배웠던 이유가 더 클 뿐입니다. 출발점만을 보는 부모가 종종 이렇게 말하지요.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는 얼마나 똑똑했는지 몰라요.” 
 
출발점 자체가 중요하지 않고 얼마나 멀리까지 가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출발점보다 얼마나 먼 거리를 이동했는지에 좀 더 초점을 맞춰야 했습니다. 신동으로 혜성처럼 나타나 세상을 휩쓰는 모차르트 같은 이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실 우리 주변에는 서서히 부상하는 대기만성형인 바흐 같은 이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지극히 정상이며, 또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도 더 많이 받습니다. 
 
출발점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조상님께 받은 유산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재능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얼마나 먼 거리를 갈 수 있느냐를 생각하며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와 미래의 시간 모두가 하느님의 시간이라고 아오스딩 성인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면서 하느님의 시간을 계속해서 탐내고 있습니다. 왕년의 내 모습이 아니라, 지금의 내 모습이 장래의 밝은 내 모습을 결정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출발점에만 연연했던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은 조상들과의 관계만을 이야기하지요. 조상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내세워서 선택된 민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답게 살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믿지도 못하고, 자기의 회개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회개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는 옳고 남은 틀렸다는 심보로 꽉 막힌 이기적인 모습을 살았습니다. 특히 이들의 앞에서 서 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를 포함한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징밖에는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요나가 외쳤던 심판의 선포와 회개에 대한 호소에 니네베 사람들이 곧바로 믿고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나보다 크신 분이 이야기하는데도 믿지 않고, 또 회개하지도 않기 때문에 표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믿지 못했던 것은 자기들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조상들과의 관계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발점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주님께 얼마나 나아갈 수 있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믿고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놀라운 표징도 볼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

- 생텍쥐페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욕심에 눈멀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의 회개가 간절히 필요한 우리들입니다. 회개는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주님을 만나는 시작에는 언제나 회개가 있습니다. 우리 삶의 표징은 우리자신의 올바른 회개입니다. 그러나 쉬이 구별되지 않는 회개의 참된 삶입니다. 

회개의 원천이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지금이 가장 좋은 회개의 때입니다. 회개는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크신 사람의 아들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함께하시는 예수님 없이는 우리의 회개는 지속적인 회개의 삶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회개는 실패가 없습니다. 믿음의 동반자인 참된 회개를 만나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처절하게 주님을 만났던 요나의 여정을 만납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랍니다. 회개의 삶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은 주님의 기쁜 소식이며 복음입니다. 

회개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우리의 생활로 써내려가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요나보다 더 큰 참된 사랑이 참된 회개입니다. 욕심이 아니라 참된 사랑의 오늘입니다. 참된 사랑을 살고있는가를 묻는 사순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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