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를 고난에서 빼내 주소서. 비참한 저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저의 죄악 낱낱이 없애 주소서.
주님, 신자들이 파스카 축제를 정성껏 준비하며 엄숙히 시작한 육신의 재계로 영혼의 참된 쇄신을 이루게 하소서.
2024년 2월 23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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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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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에제키엘서 18장 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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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키엘서 18장 31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에제키엘서 18,21-28)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 오늘 복음
(마태오복음 5,20ㄴ-26)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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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마태오복음
5장 20ㄴ-26절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2월 23일 05:00
오학준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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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최정훈 바오로 신부
두 가지 분노
오늘 복음은 분노에 대하여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십계명의 규정을 풀이하여 심화시키십니다. 바리사이들에게 의로움이란 조문에 쓰인 극단적 행위를 삼가는 것이지만, 예수님께는 그러한 행위로 나아가게 하는 싹을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분노하지 마라.’, ‘분노를 한 사람과 화해하여라.’라는 뜻으로 풀이하십니다.
문자 그대로 살인만 금하는 것이 아니라, 살인의 원천이 되는 분노라는 감정까지 제어하라고 이르십니다. 그래서 이웃에게 성내는 것을 금지하시고, 나에게 원망을 품은 이들과도 화해하기를 바라십니다.
교부들은 분노를 두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첫 번째 분노는 오늘 복음에서 말한 분노로서 영혼이 굳는 병입니다. 이는 살인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그 뿌리마저 뽑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분노도 있습니다. 죄악과 불의 앞에서 일어나는 분노, 악으로 억압받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사랑에서 솟아나는 분노입니다.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든 것을 보시고 상을 뒤엎어 버리신 예수님의 분노나 구약에서 불의 앞에서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분노가 이러한 분노입니다.
이 두 번째 분노는 이유가 있는 분노로, 성내지 않으면 오히려 죄가 되는 분노입니다. 무질서한 것을 올바르게 질서 잡으려는 분노는 정당합니다. 이것은 정의와 사랑을 위한 ‘거룩한 분노’로 일컬어집니다.
지금 나에게 분노가 일어났을 때, 그것이 이기심에서 오는 분노인지, 의로움을 지향하는 분노인지 식별하여야 합니다. 불의 앞에서 분노하지 못하는 것은 덕이 아니라,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거룩한 분노일 때도 그 분노의 부정적인 감정에 잠식되어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겸손도 함께 지녀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 사랑에 압도되어.
오늘은 부끄러운 제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너희의 의로움이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묵상하다가 부끄러운 저를 보게 된 것입니다.
저에게 의로움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불의를 자주 많이 보는데, 얼마 전엔 어느 나라 대통령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서 종교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요즘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 인간이 사라져야 종교 자유가 올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비단 한 번이 아닙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간의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이 났을 때도.
그런데 오늘 에제키엘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저는 그들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주님은 그들의 죽음이 당신의 기쁨이겠냐고 저에게 물으십니다.
저의 의로움은 악인이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을 단죄하는 의로움입니다. 저의 의로움에는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로움이 의로움이기는 한 것입니까? 자기 불의를 보지 못하는 의로움을 어떻게 의로움이라고 하고, 사랑이 없는 의로움을 어떻게 의로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까지가 악하면서 더 악한 사람을 단죄하려는 저의 의로움, 사랑이 없는 저의 의로움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이제 악인도 죽기를 바라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겠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의도도 고작 저와 인간의 죄와 악을 들추는 것이 아니고 악인도 살게 되길 바라시는 하느님의 압도적인 사랑을 돋보이게 하고자 함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을 왜 압도적인 사랑이라고 합니까? 어떤 거대한 힘들도 어쩔 수 없을 정도일 때 우리는 압도적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압도적인 사랑이란 어떤 거대한 악도 하느님의 사랑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어떻게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의 이해는 자주 능력의 하느님이 왜 극악한 사람을 내버려 두시는지, 당신을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 사람까지 살려 두시는지 이해하기에 버겁습니다.
그 한 사람의 악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데, 그러니 그 한 사람을 척살하면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지 않는데, 그러니 많은 이를 위해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의일 텐데 왜 그러지 않으시는지.
그러나 어쨌거나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의보다 사랑을 선택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당신 의로움 때문에 악한 인간을 죽이시면 살아남을 자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내가 나보다 더 불의하다고 하여 그를 죽여야 한다고 하면 의로우신 하느님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튼 하느님은 아무리 악해도 그가 죽길 바라지 않고 살길 바라십니다. 아무튼 하느님 사랑은 한 사람도 죽기를 바라지 않고 살기를 바라십니다.
물론 하느님도 의를 선택하여 벌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벌도 사랑입니다. 그 벌은 불의에서 의로 돌아서게 하는 사랑의 벌이고, 돌아설 기회마저 없애버리는 마지막 징벌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벌 때문에 의로 돌아서는 그런 미성숙한 자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악을 압도하는 그 사랑에 감동하여 돌아서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미사가 무의미해지는 결정적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의로움’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의로움은 심판의 기준입니다. 의로움은 자신이 받은 것만큼 내어줄 줄 아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의롭지 못함은 내가 그렇게 받았는데도 이웃을 심판하는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나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 하십니다.
만약 우리 자녀가 서로 형제끼리 싸우고 미워하면서 부모에게 와서 사랑한다고 하면 기쁠까요? 모두가 나의 자녀들이고 나의 자녀를 무시하면 나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미워하며 부모를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성당에 아무리 오해 다녀도 사랑이 증가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 구역 판공을 하다 보니 그런 것들로 상처받아서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새삼 놀라게 됩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어서 상대가 성당에 나오지 않게 되었는데 자신만 하느님을 만나러 오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까요? 먼저 예물을 바치기 전에 상처를 준 사람에게 가서 사과해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예배하려 할 때는 그 누군가와 관련된 모든 것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과 집착은 완전히 다릅니다. 미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무엇일까요? 성체성사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봉헌입니다. 봉헌이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이어주는 중앙에 위치합니다. 말씀도 성체도 중요한 부분이지만, 봉헌이 온전하지 않으면 두 부분이 다 의미를 잃습니다. 선악과를 바치지 않은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과 생명나무를 무의미하게 만든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봉헌해도 내가 봉헌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예전에는 짐승을 바쳤습니다. 짐승을 바칠 때는 흠 없는 것을 바쳐야 했습니다.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을 바쳐야 주님께서 나에게 해주시는 말씀과 성체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그래야 마음이 이어져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봉헌하면 어떨까요? 그들은 집착하는 걸 바쳤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봉헌한 것에 보답을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아야 했습니다. 바로 사람들의 인정입니다. 참다운 봉헌은 집착하는 것이 아닌 사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 여겨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아이가 형제를 소유하게 되지 않고 부모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보면 동생이 태어난 질투 때문에 동생의 머리카락을 뽑거나 꼬집으며 괴롭히는 경우를 봅니다. 누나는 아기 남동생이 밉습니다. 만약 아기 남동생의 뽑힌 머리카락을 부모에게 내밀며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게 사랑일까요? 먼저 자신이 바친 것이 부모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첫째가 부모처럼 아기에게 젖을 주고 목욕시키는데 도와주라 권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자기가 부모가 된 듯이 동생을 돌봐줍니다. 이때 누나는 동생을 부모의 심정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러면 동생에게 봉사하며 부모를 예배하게 됩니다. 이때 하는 행위는 부모를 기쁘게 합니다. 사랑은 창조자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때 생기고 그 사랑하는 것을 바칠 때 참다운 예배가 되고 성체를 영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생명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야만 온전한 봉헌이 되고 온전한 봉헌이 될 때야만 미사가 참다운 예배가 됩니다. 성당엔 나오지만, 생명을 경시하고 이웃을 미워하는 사람 중에 여러분이 하느님이라면 누구를 구원해주시겠습니까? 답은 뻔합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며 형제를 미워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참다운 예배는 부모의 피땀이 묻어있는 것에 대한 태도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 제물을 봉헌하기 전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가 사랑하는 하느님의 것으로 먼저 사랑합시다. 가장 완전한 피조물인 인간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물러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은 이야기는 ‘결과보다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결과를 가지고 과정을 말합니다. “A 학점을 맞지 못한 것을 보니, 공부 안 했구나.”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해도 A 학점을 맞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산수’를 강조하셨습니다. 지금 ‘산수’를 잘해야 중학교 올라가서 수학을 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시간 시험을 봤고, 그 결과를 보시고는 몽둥이로 때리셨습니다. 특히 성적이 떨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지난번에 다 맞았는데, 이번에 1개 틀렸으면 성적이 떨어졌다고 맞아야 했습니다. 항상 긴장의 연속이었고, 이때 많은 친구가 수학 자체를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성적이 잘 나오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를 가지고 실패의 삶이라고 단정 지어서도 안 됩니다. 완벽주의는 직관적이고 익숙한 문제 해결에는 탁월하지만, 이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익숙한 문제만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직관적 형태의 문제만 찾아오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결과 중심의 삶은 오히려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아직도 결과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과정 중심의 삶이 이 세상을 사는데 훨씬 더 현명하고 지혜롭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결과보다 과정의 삶이 중요함을 명령하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결과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를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바로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사랑은 마음 깊은 데서부터 실천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계명을 새롭게 해석해 주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에는 험담이나 멸시도 금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래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과 화해 없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리고 형제와 화해하지 못한 사람이 바친 예물을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결과만을 위한 삶보다 과정을 더욱더 깊이 있게 실천해야 한다면서,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고 화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절대로 사랑할 수 없고 화해할 수 없다고 하는 순간, 하늘 나라는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 스티브 잡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사순시기는 특별히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를 일깨워주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해이며 존중입니다. 하느님의 참 뜻을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화해이며 존중입니다.
정말 중요한 하느님의 뜻은 서로 만나는 화해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그 뜻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화해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자신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자신의 허물을 반성하는 거기에서 화해는 시작됩니다. 성찰의 눈빛은 서로를 위하는 기도가 되고 서로를 살리는 지혜가 됩니다. 참된 지혜는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말씀에 우리가 경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해를 실천하는 바로 그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형제와 화해하는 것이 곧 나 자신과 화해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화해 없이는 평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서로를 향한 인정이 필요한 것이지 서로를 못 박는 단정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화해의 길은 우리가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존중과 기도로 우리 관계의 일방적 모순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앙금을 털어버리고 화해이신 예수님과 함께 화해로 나아가는 존중의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참된 화해는 참된 성찰이며 참된 존중이며 평화입니다. 옳고 그름을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완전한 우리들의 노력이며 실천입니다. 그 노력과 실천이 저마다의 십자가이며 저마다의 성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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