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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2/22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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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전능하신 하느님, 베드로 사도의 신앙 고백을 반석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셨으니 어지러운 이 세상에서 교회가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2024년 2월 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2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너는 행복하다. (마태오복음 16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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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복음 16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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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베드로1서 5,1-4)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인 원로.

  • 오늘 복음
    (마태오복음 16,13-19)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2월 22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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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저승의 세력도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오복음
16장 13-19절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2월 22일 05:00
현종민 세례자요한 신부

 

✚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1:20

✚ 강론시작 09:02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최정훈 바오로 신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교회는 오늘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기념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고,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와, 무엇이든 묶고 푸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 뒤 베드로의 계승자들은 하느님 백성 전체에 대한 특별한 봉사직을 수행합니다.

가톨릭 공동체 안에서 로마 주교의 수위권의 역할은 이미 2세기부터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와 리옹의 이레네오 같은 교부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다시 확인되었습니다. 

“교회의 친교 안에는 고유한 전통을 지니는 개별 교회들이 당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베드로 교좌의 수위권은 온전히 보존된다. 사랑의 모든 공동체를 다스리는 베드로 교좌는 정당한 다양성을 보호하고 또 동시에 개별 요소들이 일치에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일치에 이바지하도록 감독한다”(교회 헌장 13항).

베드로 사도좌는 단순히 인간적 관점에서 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도록 만들어진 직무가 아니라, 그 안에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치의 표지이자 목자의 구실을 하는 베드로좌는 당신 교회를 하나로 모아 구원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느님의 목자적 사랑을 보여 주는 특전적 표지입니다.

하느님 백성 전체를 돌보아야 하는 교황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전망을 제시하고, 하느님의 백성이 그 길을 담대히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끌고 독려하여야 하는 교황의 직무가 한 인간이 맡기에 얼마나 크고 버거운 것인지 묵상하게 됩니다. 

세상의 풍파와 도전에도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굳건한 반석의 구실을 하는 교황께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제가 처음 양성책임을 맡을 때 겨우 서른이었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더 먹은 형제들도 가르쳐야 했습니다. 

당연히 양성을 잘할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할 때 양성을 하다 보면 할 수 있게 된다고 여러분이 조언하였고 재속프란치스코회에서 양성을 처음 하게 된 분들도 양성하면서 양성자로 자신이 차츰 양성되었다는 말을 많이 하셨습니다. 

저도 실제로 하다 보니 할 수 있었고 차츰 양성자가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더 큰 힘이 된 조언은 역시 신앙적인 조언으로서 소임을 주신 주님께서 할 수 있는 힘도 주실 거라는 조언이었습니다. 

사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망치기도 하지요. 권력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이용하여 자기 사욕을 차리다 잘못되곤 하잖습니까?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좌는 이런 것과 달라야 합니다. 사도좌는 인간이 쟁취한 자리가 아님은 물론 인간이 마련해준 자리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당신 교회를 세우시고 그 으뜸 자리를 맡기신 겁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당신 교회의 으뜸 자리를 맡기신 것은 베드로가 하느님으로부터 지혜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좌 곧 교황의 자리에 앉는 사람은 주님의 양 떼를 돌보는 역할을 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서간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그러므로 베드로처럼 주님의 양 떼를 돌보는 자리에 앉는 사람은 자기 욕심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다스려야 할 사람으로서 그에게 주님께 대한 순명과 사랑은 기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잘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양 떼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당신 양 떼를 맡기시면서 당신 양 떼를 사랑하느냐 묻지 않으시고 당신을 사랑하는지 베드로에게 물으시지 않습니까? 

얼핏 생각하면 당신 양들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것 같고 우리 같으면 주님의 양들을 사랑하느냐고 물을 것 같은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묻지 않으시고 당신을 사랑하냐고 물으십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주님의 양들에 대한 사랑도 있을 것이고, 주님을 사랑해야 주님의 양들에 대한 사랑도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 대한 사랑과 순종의 자세 없이 책임자의 자리를 맡고 인간적인 사랑만으로 양들을 사랑하면 자주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그 사랑은 금세 고갈될 것이고 그 사랑에는 욕심이나 기대라는 불순물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양들을 사랑해야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처럼 순수하고, 무엇보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완전한 사랑이 되어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교회의 수장으로 한 명만이 있어야만 하는 이유.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가톨릭과 다르게 이 성경을 해석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 위에 세우신 게 아니라 ‘반석’ 위에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페트로스)는 남성이고 반석(페트라)는 여성 명사이기에 베드로라는 인간 위에 세우신 게 아니라 베드로의 반석과 같은 믿음 위에 세우신 것이란 주장입니다. 

두 번째는 이 이야기 뒤에 곧바로 베드로가 예수님의 뜻에 반하여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말을 들었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는 불완전한 인간인데, 어떻게 그런 인간 위에 교회를 세우겠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시고 곧바로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하는 말은 페트라가 베드로의 믿음이거나 믿음을 가진 일반인을 가리킨다면 믿음이 있는 모든 이들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받았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사제가 죄를 용서하는 것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는 결국 죄 때문에 쫓겨난 에덴동산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권한, 곧 죄를 용서하는 권한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이 지상에서 죄를 용서해주면 천상에서도 용서할 것이고 이 지상에서 용서하지 않으면 천상에서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불렀다고 베드로가 사탄이 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회개시키기 위함이었고 베드로는 언제나 베드로였습니다. 성령강림 때 교회를 대표해 설교할 때 첫 번째 설교자는 베드로였고 그 설교로 첫 번째 개종자들 3천 명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도 당신이 누구이신지 잘 대답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인간적으로 완전하여 교회의 수장이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과 은총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여인들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먼저 나타나시고 사도들에게는 늦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에 따라 보상을 주십니다. 사도들은 믿음이 강해서 사도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치의 중심으로 뽑아주셨기에 사도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부족한 인간은 베드로를 교회의 수장으로 뽑으셔야 했을까요? 예수님의 이 기도에 해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십니다. 

또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도 하십니다. 이는 삼위일체 원리로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파견하셨음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으로 남편이 아내 안에 있고 아내가 남편 안에 있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모든 것’을 주고 아내도 남편에게 ‘모든 것’을 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사랑의 선물이고 성령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주는 대상은 엄마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교회 안에 머물게 되십니다. 

교회는 예수님 때문에 모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모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로 모였다고 하나가 되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계셔야 합니다. 자신들이 하나의 원천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아야지, 어머니에게서 나왔다면 각기 자기의 다른 특성을 주장하며 나뉠 것입니다. 

교회 자체는 어머니입니다. 만약 교회에 아버지의 존재가 없다면 교회 자체는 어머니만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모이기는 하지만, 분열됩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에게서 왔다고 믿지만,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에는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필요합니다. 만약 본당에서 사제가 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못 한다면 신자들이 미사에 나올지라도 분열될 것입니다. 

가시적으로 아버지처럼 묶어주는 누군가가 공동체에 한 명만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아버지가 둘이면 그리스도파, 베드로파, 바오로파, 아폴로파로 갈라졌던 것처럼 교회에 나오더라도 자녀들은 둘로 분열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공동체에는 한 어머니, 한 아버지만 계셔야 합니다. 이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한 성당에 한 사제, 한 교구에 한 주교, 한 교회에 한 교황만이 계십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30회에 보면 두 금쪽이가 만날 때마다 싸웁니다. 그러나 이혼한 엄마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 모든 게 자기 탓만 같습니다. 어머니는 모을 수 있지만, 일치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엄마는 사랑하는 역할이 핵심입니다. 

규율을 잡는 것은 아버지가 해야 합니다. 자기를 사랑해야 할 엄마가 규율을 강조하면 아이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사랑하는 엄마의 말엔 힘이 부족합니다. 엄마는 은총을 담당하고 아빠는 진리를 담당합니다. 은총은 자비고 진리는 정의입니다. 은총은 용서고 진리는 심판입니다. 이렇게 은총과 진리가 둘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이면서도 서로 대치되는 성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축구에서 싸움이 일었습니다. 감독은 4강에서 진 게 두 선수 때문이라고 탓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탓은 감독에게 있습니다. 아버지의 역할을 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일치시키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은 은총과 진리, 두 갈래로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개는 아니지만, 주인이 하지 못해 싸우는 개들을 서열정리 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강영욱 훈련사가 필요했던 장면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일치를 위해 그들 모두가 순종할 한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가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하시며 당신의 대리자를 보내지 않아 현 개신교처럼 여러 교파로 갈라지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각자가 성경을 각자의 주장대로 해석하지만, 개신교에서는 그것에 대해 명확하게 정해줄 권위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수천 개의 종파로 갈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을 리가 없고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의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 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셨을까요?

 

아는 후배가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하나의 사진을 보여줍니다. 이 사진 안에는 아주 멋진 몸(상반신)을 드러낸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후배 신부였습니다. 보디 프로필 사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진, 사진 편집 프로그램으로 편집한 거야?”라고 묻자, 아니라고 합니다. 이 사진 한 장을 남기기 위해 식단 조절을 하면서 몇 개월 동안 다이어트를 했고 또 하루도 빠짐없이 헬스 트레이닝을 열심히 받았다면서 너무 힘든 시간이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이 후배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움이 묻어 있었습니다. 이 힘든 것을 해냈다는 뿌듯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은 깜짝 놀랄 정도로 멋져 보였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지금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멋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전의 통통한 모습만 기억하고 있었기에, 지금의 많이 마른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살이 빠져서 그런지 얼굴에는 주름이 많이 보였고, 그래서 실제의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습니다. 물론 본인의 만족도가 커서 괜찮다고는 하겠지만, 이 사진 한 장을 위해서 그렇게 힘든 시간은 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일 수 있는 사진 한 장이 중요한 것일까요? 그보다 스스로 느끼는 멋진 사람으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남에게 보이는 삶은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보이는 삶은 계속된 만족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멋진 사람이라고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여건들을 계속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합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는 예수님 질문에, 다른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지요. 베드로는 인간적인 약점이 너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정답 하나 말했다고 해서,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어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보시고 크게 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멋진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며, 이 세상을 만족하며 살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당신이 사랑하는 삶을 살아라.

- 밥 말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우리의 인격을 되찾아 주시는 예수님의 인격입니다. 계시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인격입니다. 그래서 인격적인 하느님의 은총은 사도좌의 인격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가톨릭 교회역사 전면에 교회를 이끌어가는 사도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도좌를 이끌어가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사도좌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친히 맡기십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끝까지 신뢰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성사 안에 사도좌가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인 우리를 위해 사도좌가 있습니다. 신앙의 현실과 마주하는 가운데에서 사도좌는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 올바른 교리를 전달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열린 마음으로 갈등과 반목의 현장에서 이해와 화해를 시도하십니다. 괴롭고 절망적인 현실사회의 아픔을 위로하시며 실천성과 만남으로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오늘의 역사적 현실을 대변하시며 소중한 가치를 신앙의 차원으로 성장시키십니다. 복음으로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신앙을 수호하는 사도좌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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