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 얼굴을 찾으라 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
하느님,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따르라고 명하셨으니 하느님의 말씀으로 저희 믿음을 북돋아 주시고 영혼의 눈을 맑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2024년 2월 25일 사순 제2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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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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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여기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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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2장 1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기 22,1-2.9ㄱ.10-13.15-18)
우리 성조 아브라함의 제사. - 제 2독서
(로마서 8,31ㄴ-34)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십니다. - 오늘 복음
(마르코복음 9,2-10)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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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빛나는 구름 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르코복음
9장 2-10절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 무렵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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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5일 05:00
김성우 이사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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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스튜디오 주일미사
2024년 2월 25일 11:00
원당동성당 이병근 대건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1:27
✚ 강론시작 15:07
성필립보생태마을 주일미사
2024년 2월 25일 17:00
산티아고대성당 김희성 그레고리오, 정경민 세례자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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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최정훈 바오로 신부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은 상처투성이
오늘 제1독서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사악의 희생 제사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사악을 바친 아브라함의 모습은 모든 이의 속죄를 위하여 번제물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치신 하느님의 예표입니다. 주님의 명령에 따라 아들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게 됩니다.
당시 유다 민족의 사고방식으로 볼 때, 자신의 생명은 아들을 통하여 이어지고 지속됩니다. 아브라함이 백 살이 되어서야 얻은 이사악은 그에게 있어서 새롭게 얻은 생명이었습니다.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또 다른 생명이고, 자신을 계속 살아 있게 할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는 행위는 단순히 자신의 소유물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어려운 행위로서 자신의 생명을 멈추고 자신을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당신의 “친아드님”이자 “사랑하는 아들”을 속죄 제물로 내주셨고, 이는 당신 자신을 내주신 것과 같습니다. 아니, 서로가 서로에게 중심이 되고 다른 위격이 자신보다 더 중요해지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생각할 때, 사실 자신보다 더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자신은 아무 위험 없이 몰래 숨어 계시면서 대신 아들을 죽음으로 내모시는 무자비하시고 비겁하신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당신과 똑같은, 당신 자신보다 더 소중한 아들과 함께 몸소 고통을 겪으시고 희생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당신 스스로 직접 희생하셨다는 것이 다른 종교의 신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점입니다. 상처 하나 없이 하늘의 권세로 우리를 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상처투성이의 하느님이십니다.
교회도 아버지를 닮아 세상에 나아가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그 길에서 상처받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믿음의 맑은 눈으로
오늘 사순 제2주일의 두 독서는 두 아버지의 아들 봉헌을 얘기합니다. 두 아버지가 외아들을 아끼지 않고 봉헌하였다고 얘기합니다.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제1독서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봉헌한 얘기이고, 제2독서 로마서는 성부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봉헌하셨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순 제2주일은 당신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하느님께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우리의 아들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처럼 아들을 바치라는 것이 진정 사순 제2주일의 주제일까요?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복음의 다음 말씀에 들어있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분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언제 흔들입니까? 박해나 극심한 시련의 때가 아닙니까? 믿음이 언제 필요합니까? 박해나 극심한 시련의 때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시련의 때에 믿음이 제일 많이 흔들리고 크게 흔들리지만 이때가 믿음이 더 필요한 때라는 얘기입니다. 모든 것이 평안할 땐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굳은 믿음도 굳이 필요치 않습니다.
씨뿌리는 이의 비유에서도 믿음이 약한 사람을 돌밭에 뿌려진 씨에 비유하시며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사랑하는 아들을 잃게 될지도 모를 때, 제자들처럼 믿고 의지하던 사람을 잃게 될지도 모를 때, 그리고 그때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없을 때, 그때도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 우리의 믿음이 지금 비록 시련 당하지만, 이때 믿음이 더 필요하고 시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단련되고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하십니다.
수난 예고 때는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하며 수난과 죽음은 빼놓고 듣고, 막상 수난이 닥치고 주님께서 확 돌아가시고 나면 절망감 때문에 부활에 관한 말씀은 빼놓고 들을 수 있는데 바로 그 절망의 때에 부활의 말씀을 상기하고 영광을 내다보라는 거지요.
오늘 본기도는 그래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따르라고 명하셨으니 하느님의 말씀으로 저희 믿음을 북돋아 주시고 영혼의 눈을 맑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여기서 중요한 말이 ‘영혼의 눈을 맑게 하시어’입니다. 육신의 눈은 지금 죽음을 목도하지만 영혼의 눈은 불신과 의심과 절망으로 흐려지지 않고, 맑은 눈으로 부활을 내다보며 ‘부활 관상’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진정 믿음의 눈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 맑은 눈으로 부활 관상함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변화는 신에 대한 감정에 의해 결정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변모입니다. 예수님께서 변모하실 때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어떤 인물일까요? 모세는 진리와 엘리야는 은총과 관련이 깊습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엘리야는 불이 세상에 내려오게 하였습니다. 은총과 진리는 마치 어머니의 젖과 가르침처럼 자녀를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은총과 진리를 통해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었고 그 새로운 존재의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만, 또 제자들도 새로 태어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기도는 진정 새로 태어남의 시간이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는 기적의 시간입니다. 사순절에 교회에서 권고하는 세 가지 재계, 곧 기도-자선-단식에서 오늘은 기도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기도하건 하지 않건 사람은 조금씩 변해갑니다. 더 높은 본성으로 변하든지 더 악해지든지 할 뿐입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어떤 것 때문입니다.
안 좋은 것을 받아들일 때는 안 좋게 되고 좋은 것을 받아들일 때는 좋게 변화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악마와 같이 변화되었다면 그런 것들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악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에 SNS에 N번방을 만들어 수십 명의 여성을 노예처럼 착취하며 돈을 번 일당이 잡혔습니다. 그중 상당수가 미성년자였습니다. 천재적인 수법으로 사람의 인권을 철저히 짓밟으며 그것을 돈벌이로 이용한 젊은 청년 중 주도자 두 명이 자신들의 아이디를 ‘갓갓’(GodGod) ‘붓다’라고 한 것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신이 되려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신으로 불러줬기 때문입니다. 신이 되는 방법은 돈을 소유함으로, 쾌락을 추구함으로, 힘을 과시함으로써입니다.
곧 스스로 주님, 창조자, 심판자가 되려 한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신이 되려 했는데 알고 보니 악마가 되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경찰에 잡혀 자신들의 악마와 같은 삶을 끝내줘서 감사하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이들은 왜 스스로 신이 되려 했을까요? 세상에 아무도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무언가 만들어주는 도구입니다.
아기가 짐승에게 사랑받고 길러지면 짐승이 되고 사람에게 길러지면 사람이 되며 하느님께 길러지면 하느님이 됩니다. 그들은 사랑받지 못했기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이때 스스로 높아지는 방법은 돈과 여자, 힘이었던 것이고 그것이 사람을 악마로 만듭니다.
영화 ‘한공주’(2014)는 집단 성폭행을 당한 아이가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 했지만, 부모로부터 외면당하고 학교, 그리고 친구에게마저 외면당함으로써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나옵니다. 목숨을 끊는다는 말도 내가 신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안타깝지만, 자기 힘으로는 절대 높은 수준의 본성으로 올라올 수 없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사람을 한층 더 높은 수준의 본성으로 상승시킵니다. 주윤발 배우와 같은 이들은 세상에 가진 전 재산을 아낌없이 주고 가겠다고 말하며 자신들은 매우 검소하게 삽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이들은 세상이 자기들을 그만큼 사랑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만큼 본성이 상승하여 다른 이들도 들어 높일 줄 압니다. 그의 오랜 친구 오맹달이 술과 쾌락에 빠져 그에게 돈을 빌리려고 왔을 때 주윤발은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그리고 그가 분노로 재기할 수 있도록 감독들에게 전화해서 그를 써 달라고 청합니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안 오맹달은 그때 자신에게 주윤발이 돈을 빌려주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다고 단언합니다. 주윤발이 준 교훈은 진리이고 그가 오맹달이 재기할 수 있도록 감독에게 한 전화는 은총입니다.
기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아 본성이 새롭게 변모하는 시간입니다. 베드로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변모하여갑니다. 그가 타볼산에서 본 변모는 은총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함은 진리를 받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십자가에 거꾸로 순교하면서 또 누군가에게 은총과 진리를 베푸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갓갓이나 붓다는 가지는 것과 즐기는 것, 강해지는 것으로 무언가 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대로 부모로부터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에겐 기도라는 시간이 있고 기도하면 은총과 진리로 누구나 작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고3 졸업을 하고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고민이 생겼습니다. 과연 ‘나’ 같은 사람이 신부님이 될 수 있을까? 신부가 되기 위해 모인 천사 같은 신학생들 사이에서 악마 같은 내가 잘 살 수 있을까? 뭐, 이런 고민이었습니다.
입학 후 친구들과 산책하다가 너무 놀라서 나무 뒤에 숨은 적이 있었습니다. 수단 입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4학년부터 수단을 입습니다. 당시 신학생 수가 많았기 때문에 수단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었지요.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1학년의 눈에는 모두 신부님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숨이 있는데, 깜짝 놀랄 말을 들었습니다. ‘욕’이었습니다. 쌍 ‘ㅅ’ 들어가는 말을 서슴지 않고 수단 입은 신부님들(당시에는 수단 입고 있으면 다 신부님으로 생각했음)이 막 하는 것이 아닙니까? 천사만 사는 곳, 좋은 말만 하고 사랑이 넘쳐나는 곳이 이곳 신학교라고 생각했는데, 첫날에 환상이 완전히 깨졌습니다. 후에 깨달았습니다. 이곳은 천사가 사는 곳이 아니라, 천사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사는 곳임을 말이지요. 이런 깨달음 이후에 신학교가 좋아졌습니다. ‘나’ 같이 악한 사람도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성당 다닌다는 사람 왜 이래?’라고 말씀하시는 분을 종종 봅니다. 아마 이분들 역시 성당 안의 사람이 모두 천사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천사만 있는 곳에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천사만 있는 곳은 하느님 나라, 곧 이 세상 삶을 마쳐야만 갈 수 있으니까요.
우리 교회 안에는 천사가 아닌, 천사가 되려는 사람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차별 없이 이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것이며, 부족함을 나누면서 완벽함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교회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천사만 모여 있는 곳이 아니기에 나 같은 사람도 교회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모습을 제자들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엘리야와 모세가 있는 곳, 그래서 이곳이 하느님 나라라고 생각했고 베드로가 나서서 여기서 지내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습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뜻은 완전히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이 천사만 사는 곳이 될 수는 없지만, 천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이 늘어나면서 가장 좋아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의 뜻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바뀐 것은 없다. 단지 내가 달라졌을 뿐이다. 내가 달라짐으로써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삶을 등진 변화가 아니라 삶을 위한 기쁜소식이 우리의 참된 변화입니다. 참된 변화는 참된 실천을 동반합니다. 변화를 위한 부르짖음이 변화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이 우리를 위한 변화입니다. 스스로 손발을 묶는 어리석음이 변화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역동적인 실천이 변화입니다.
실천이 함께하기에 어제의 우리와 오늘의 우리는 다릅니다. 변화를 낳는 실천의 탄생이며 실천을 부정하지 않는 복음과 실천의 살아있는 관계입니다. 참된 실천은 눈부시도록 아름답습니다. 주위를 밝히는 빛과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실천하는 부활의 삶입니다. 반성과 희망 십자가와 부활은 변모의 또 다른 이름들입니다.
복음의 실천은 떠들썩하지 않습니다. 핑계를 벗어나 주님께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변화의 만남이며 실천의 만남입니다. 실천의 힘이 새로운 만남의 힘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십자가를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주님은 이미 한 몸입니다. 실천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사순 제2주일 입니다. 서로의 얼굴에서 실천을 만나고 서로의 십자가에서 부활을 만나는 은총의 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서로를 구원하는 참된 실천과 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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