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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2/28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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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인자하신 주님, 주님의 가족을 보호하시고 위로하시어 저희가 이 세상에서 언제나 선행을 하고 마침내 천상 선물을 풍성히 받게 하소서.

 

2024년 2월 28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2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마태오복음 20장 28절)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마태오복음 20장 28절) 성경말씀카드 마태오복음 성경구절이미지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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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복음 20장 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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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예레미야서 18,18-20)
    어서 그를 치자.

  • 오늘 복음
    (마태오복음 20,17-28)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2월 28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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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마태오복음
20장 17-28절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18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19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2월 28일 05:00
박민우 알베르토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6:28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최정훈 바오로 신부

 

예수님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드는 어리석음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세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신 장면을 그립니다. 바로 이어지는 후반부에서는 이 예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을 고집하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어리석음은 당신에게 닥칠 잔인하고 참혹할 수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더 무겁고 안타깝게 만듭니다. 그들은 복음의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에서 자기 아들들이 그리스도의 옆자리에 앉게 하여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그들이 마셔야 할 주님의 잔이 어떤 잔인지 모릅니다. 

그들의 담대함은 신앙이 아닌 무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옆자리를 차지하려는 행동에 다른 제자들은 불쾌해합니다.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높은 사람은 통치자처럼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는 이가 아니라 더 사랑하고 더 낮은 곳에서 섬기는 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세속적 욕심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듯 보였지만, 아직까지 그들이 바라는 것은 인간적으로 이해한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세속적 성공입니다. 곧 제자들은 종교적 영광의 탈을 쓴 세속적 출세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의 어리석은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어떤 잔을 마시는 것인지, 교회라는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지 못합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 존재한다고, 교회 안에서 세속적 지혜와 세속적 문화를 적용하려고 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처럼 하느님께 청하는 것에 자신의 그릇된 욕망이 얼마나 많이 섞여 있는지 알면서도 마치 교회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합리화합니다. 

주님께서 아파하고 슬퍼하시는 순간에도 자기밖에 모르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붙들고 무의미한 논쟁을 하며 힘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우리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리고, 주님의 뜻에 눈과 귀를 열 수 있는 은총을 청하여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진정 높은 사람은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어제 복음의 끝부분과 오늘 복음의 끝부분은 거의 똑같은 내용입니다. 어제의 말씀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를 나무라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주님의 제자들을 나무라시며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제자들이 자리다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스승은 죽으러 들어가시는데 제자들은 권력을 잡으러 들어가는 줄 알고 자리다툼이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는 기득권인 데 비해 자기들은 입성하여 그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사람인 셈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수난 예고를 하셨음에도 수난은 아랑곳하지 않고, 3년이나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는, 그야말로 구악을 대신하는 새로운 악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높은 사람,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것을 서번트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라고 얘기하기도 하지요. 진정한 리더는 종처럼 조직원을 섬기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것일까요? 첫째와 높은 사람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일까요? 쉽게 얘기해서 제일 높은 권좌에 오르는 것을 말함일까요? 

사실 제일 높은 권좌에 오르기 위해서도 섬기는 자와 종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려는 자들도 그러하면 그 섬김을 받는 백성이 행복하고 자신도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높은 자리와 첫째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그런 자리에 오르는 비결로서 서번트리더십과 첫째를 말씀하신 것이 아닐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일 높은 권좌에 오르려는 사람들은 “너희 가운데에서” 곧 “우리 가운데에서”라고 생각지 않고 “그들 위에서”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백성들 가운데 있지 않고 늘 위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무리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무리 위에 홀로 높은 자라고 생각할 것이며, 백성을 우리라고 생각지 않고 늘 그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을 대영광송과 연결하여 생각해봅시다. 대영광송은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이시라는 말로 대미를 장식합니다. 

주님만이 홀로 거룩하시고, 높으신 분이시고, 우리는 아무도 홀로 거룩하거나 높지 않으며, 아버지나 스승이라고 불리지 말아야 할 형제들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은 위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여럿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이때 높은 사람의 의미도 높은 곳에서 멀리 보고 무리 전체를 보는 사람입니다. 

‘너희 가운데 첫째인 사람’도 마찬가지 의미입니다. 무리 가운데에서 첫 번째로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다른 형제들보다 앞서 길을 헤쳐 나가야 하는, 물길로 치면 맨 앞에서 물살을 갈라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진정 높은 사람은 무리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 높이 나는 갈매기처럼 하늘까지 올라간 사람이어야 하고, 바로 눈앞의 이익만 보는 사람이 아니라 시야가 넓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 첫째인 사람도 무리를 안전하게 이끌기 위해서 맨 앞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힘든 일을 감당하는 수난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가 향하는 두 상반된 죽음의 방향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가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수난이 곧 섬김의 방법임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주님이며 스승이신 당신이 그들을 씻어주었기 때문에 그들도 그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요한 13,14)

겸손해지려면 먼저 주님이며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수력발전소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낮게 흐르는 물은 아무 에너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높이 있는 물은 위치에너지를 가집니다. 그것이 낮아질 때 에너지를 방출합니다. 이것이 겸손이고 우리가 가야 할 죽음의 방향입니다. 

그러나 오늘 두 제자와 어머니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다고 하면서도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들이 가는 죽음의 방향은 들어 높임을 위한 것입니다. 이는 지금 낮아져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죽음으로 가는데 어떤 사람은 죽음을 통해 다른 이들을 낮추고 자신을 들어 높이고 어떤 사람은 죽음을 통해 나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들어높입니다.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 대통령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전 재산은 오래된 자동차 한 대였습니다. 월급의 90%는 기부하고 경제성장률을 상승시켰고 극빈 계층을 위해 교육제도를 정비하여 그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그의 삶은 죽음입니다. 돈이 없으면 죽고 낮아지면 죽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시민들을 들어 높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순교에 가깝습니다. 이 겸손한 죽음은 오직 대통령이 되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하면서 겸손한 것은 그저 높아지기 위한 비굴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타볼산에서 예수님께서 먼저 높아지셔야 했고 우리도 성체성사로 높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지렛대를 이용한 도구에서 다른 것을 들어 높이기 위해 아래로 내려가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혼자 떨어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높이기 위해 높아졌다 스스로 낮아짐을 선택한다면 그것이 사랑입니다. 

오산성당에 있을 때 김완식 요셉 형제님을 초청하여 사순 피정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유명한 무당이었는데 한 천주교 집안에 굿을 해 주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 집 아이가 천재여서 어린 나이에 대학에 입학했고 대기업에서 돈을 받으면서 학교에 다니던 중 정신이상이 되어 누구도 치료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아이가 어렸을 때 부모는 아이를 사제로 봉헌하기로 했었지만, 아이의 재능 덕택으로 집이 부유해지다 보니 부모님은 옛 약속을 잊고 냉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세 명의 대무당이 모여 먼저 자기 집에서 준비 굿을 하였는데 이상하게 그 집으로 보내는 신마다 돌아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셋은 그 집에 가서 각자 7일씩 굿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김완식 보살이 7일 동안 굿을 하였지만 어떠한 신도 내리지 않아 코피만 쏟으며 쓰러졌고 나머지 두 무당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대나무를 잡고 굿을 하는데 그 나무가 흔들거리고 방울이 울리더니 이상한 영의 기운이 자신을 스쳐 지나갔고 김 보살은 몸을 비틀고 비명을 지르며 완전히 혼절하여 버렸습니다. 그 집은 성소자가 있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그 집을 성령님이 보호하고 계셨고 그래서 어떤 악령도 얼씬거리지 못했고 무당까지도 그렇게 쓰러뜨리셨던 것입니다. 한 번 성령의 기운이 스치고 지나가니 몇 달 동안은 신들이 자신 안에도 들어오지 않아서 그냥 집에서 숨어 지내야 했다고 합니다. 

몇 년이 흘러 우여곡절 끝에 김 보살이 요셉으로 세례를 받고 남양성모성지에서 복사를 서고 있는데 미사 후에 한 예수회 신부가 자신을 부르더니 “혹시 김 보살 아니세요?” 하더랍니다. 그분이 바로 자신이 굿을 해 주었던 그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성당에 다니신 부모님 덕택에 병이 낫게 되었고 나중에 예수회에 들어가 그 좋은 머리로 8개 국어를 하며 성경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제가 되는 것은 분명 들어 높임을 받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사제가 되어 더 높아지려고 한다면 그건 분명히 순교가 아닌 자살로 가는 삶입니다. 예수회의 신부가 된 분은 자신이 사제가 된 것이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께서 지켜주셨기 때문임을 잘 알 것입니다. 

이제 그분은 더 높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바쳐 다른 이들을 높이려는 순교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시던 죽음의 방향이었습니다. 낮아져서 높아질 일만 남은 사람이 아닌, 높아져서 낮아질 일만 남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학창 시절에 제 가슴을 뛰게 했던 노래였습니다. 감미로운 멜로디로 시작하다가 중간으로 넘어가면서 강력한 사운드를 내는 멋진 노래입니다. 특히 이 노래를 받치고 있는 기타 연주 소리는 십 대의 저를 푹 빠지게 했습니다. 그때 바라보던 오십 대는 젊은이들의 문화에는 전혀 관심 없고, 술 한 잔 마신 뒤에 젓가락을 두드리며 트로트를 부르는 것밖에 못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오십 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 대에서 바라본 오십 대의 모습은 잘못 본 것임을 깨닫습니다. 
 
오십 대도 열정이 있습니다. 또 오십 대도 요즘 노래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또 오십 대도 아이돌 노래를 들으며 가슴 설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냥 단정 지었습니다. 오십 대는 우리 세대와 너무 다르다고 말입니다. 
 
지금을 사는 청소년도 저의 청소년 시절과 같은 시각일 것입니다. ‘꼰대’라며 기성세대를 꾸짖으며 ‘우리와 다르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꼬마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면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어른들에게 사탕을 드리면 어떨까요? 더 좋아하십니다. 어른들도 노는 것 좋아하고, 뜨거운 열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세대와 차이, 나이의 차이, 사상의 차이 등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서로 다를 것 없다는 시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를 받아들이면서 함께하는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꿈꿀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나부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서로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말입니다. 오늘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청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아마 이 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다른 제자와 다르게 본 것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권력을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다른 열 제자들의 반응은 불쾌함이었습니다. 이 제자들도 어쩌면 하느님 나라의 권력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누구나 가고 싶은 나라, 누구나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통치자, 고관들의 모습을 따라서는 안 되고 오로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취해야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다른 점’만을 따지지 않게 됩니다. 우리 모두 함께 하느님 나라에 함께 가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지하고 도와가며 행복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 달라이 라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삶의 이유와 목적은 사랑과 감사에 있습니다. 사랑과 감사를 잃은 십자가는 오히려 독이 됩니다. 사랑의 여정이 바로 십자가의 여정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힘껏 사랑하고 힘껏 돌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 소중함을 잘 간직하며 잘 돌보는 사람입니다. 십자가가 목적이 아니라 사랑이 목적입니다. 사랑을 몰랐기에 십자가도 없었습니다.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을 하시며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바치는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면서 알게되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를 잃으면 사랑도 잃게 됩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합체는 다름아닌 십자가입니다. 

저마다의 십자가를 우리가 지는 일이야말로 최소한의 도리이며 목숨의 사명입니다. 십자가는 목숨의 본분이 사랑임을 뜨겁게 가르칩니다. 사랑의 본분에 충실한 사순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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