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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2/29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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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저를 꿰뚫어 보시고 제가 걸어온 길 살펴보소서. 저의 길 굽었는지 보시고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

하느님,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니 저희 마음에 성령의 불을 놓으시어 굳은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2024년 2월 29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2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신다. (시편 1장 6절)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신다. (시편 1장 6절) 성경말씀카드 시편 성경구절이미지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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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장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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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예레미야서 17,5-10)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오늘 복음
    (루카복음 16,19-31)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2월 29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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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루카복음
16장 19-31절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2월 29일 05:00
김광두 고스마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7:07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최정훈 바오로 신부

 

교회의 문을 열고 사랑을 전하러 밖으로 나가야 해.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불의를 저지르거나,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착취하여 부정한 재물을 축적하거나, 하느님의 가르침에 거스르는 길을 걸었다거나 하는 표현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라는 묘사로 재물을 남용하며 살았을 수 있겠다는 느낌을 줍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돈을 쓰는 것이 흠이 아니라, 오히려 미덕이 될 수 있는 지금의 관점에서는 그의 삶이 저승에서 고통을 받을 만큼 그릇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저지른 큰 잘못이 있습니다. 바로 ‘무관심’입니다. 문을 여는 작은 수고만 하여도, 불쌍한 라자로의 처지를 볼 수 있었을 터인데, 그리고 그 현실을 보면 그의 마음이 움직였을 터인데, 그는 자신의 관심을 자신과 자신의 즐거움에만 돌렸습니다. 

사실 부자는 자신의 집 앞에 라자로가 있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자로를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그에게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이 차가운 무관심이 부자가 저지른 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현대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이 무관심의 문화가 하느님 사랑의 반대라고 강조하십니다.

이 무관심을 극복하고자 교회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의 현실에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 교회 안에 머물면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안락하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사랑을 전하러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길에 나가 상처를 입고 더럽혀지는 그때에, 우리는 성령의 활동을 체험합니다. 문 앞에 라자로가 있었던 것처럼, 교회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우리는 이 시대의 라자로를 만날 것이고, 그들의 현실은 우리 마음에 이르게 될 것이며, 그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은 우리를 사랑의 실천으로 이끌 것입니다. 교회 문을 여는 작은 첫 시도에서 위대한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는 어떤 사람?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그 잎이 푸르고 줄곧 열매를 맺는다.” 

오늘 예레미야서를 바탕으로 의지와 신뢰의 차이를 묵상해봅니다. 누구에게 의지하는 것과 누구를 신뢰하는 것의 차이 말입니다. 

의지의 문제점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기대어 서기에 스스로 지탱하거나 설 수 없습니다.지팡이에 의지하면 지팡이 없이는 서 있거나 걸을 수 없습니다. 술에 의지하면 술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술 중독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지하는 그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 서지 못합니다. 

의지하는 그 사람이 다행히 좋은 사람이면 다행이지만 좋은 사람인 줄 안 그가 그렇지 않으면 큰 문제겠지요. 

그에 의한 행복이 그에 의한 불행으로 바뀔 것이고, 나의 인생과 나의 행불행이 그에 의해 좌우되고 그에게 매입니다. 

그렇다면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자기를 믿고 자기 힘에 의지하는 사람 말입니다. 자기 인생과 자기 행복을 남에게 맡기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훌륭하고, 불교의 경우 이런 면에서 훌륭한 가르침을 주는 종교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오늘 예레미야서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라고 얘기하듯 자기를 과신하거나 아무도 믿지 않는 곧 과신과 불신의 자기 믿음이라면 다른 얘기일 것이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보다 더 문제일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과신이 타인 불신으로 이어지고 타인 불신이 단절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과신은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문제이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문제이고 하느님과도 단절하게 하기에 더 큰 문제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물가의 나무처럼 싱싱하고 열매를 많이 맺지만 자기를 과신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단절되어 생명의 물과 단절된 사막의 나무와 같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믿으면 엽니다. 사람을 믿으면 사람에게 열고, 하느님을 믿으면 하느님께 엽니다. 그러니 믿는 것은 과신이나 불신보다 낫고 앞서 봤듯 의지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라자로 얘기를 볼 수 있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루카 복음은 다른 복음과 비교할 때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해 특별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라자로가 가난해서 천국에 갔다고 하는데 실은 돈만 없어서 천국에 간 것이 아니라 의지할 돈도 의지할 사람도 없어서 천국에 간 것입니다. 

돈도 없고 사람도 없어서 하느님께만 믿음을 둔 것이고 하느님밖에 믿을 곳이 없어서 하느님이 계신 천국에 간 것입니다. 

반면 부자는 라자로와 정반대 지점에 있고 그곳이 실은 지옥입니다. 지옥이란 돈도 있고 사람도 있는데 하느님이 없는 곳이 지옥이고 불타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과 영원히 단절된 곳이 지옥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부자입니까? 가난한 사람입니까? 의지하는 사람입니까? 신뢰하는 사람입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부자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과학적 이유

 

부자가 되면 행복할까요? 그렇다면 돈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자살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1조 원 가진 부자가 자살한 예도 있었습니다. 15조 원 가졌다가 미국 리먼 브러더스 사건 때 14조 원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와 거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지옥 갔고 라자로는 천국에 갔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부자는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받았고 거지는 나쁜 것을 받아서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자는 이 세상에서 행복했고, 거지는 불행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지상에서 천국 갈 것처럼 잘 살다가 한순간에 지옥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예는 없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가는 사람들은 이 지상에서부터 점점 더 행복해졌던 사람이고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조금씩 더 불행해졌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부자가 행복할 것이란 착각 때문에 이 지상에서는 고통받으며 살아야 한다고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가장 행복하셨던 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왜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는지 그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헤밍웨이는 엽총으로 자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부족한 게 없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탄 소설가였고 그 덕분으로 부와 명예, 가족도 있었습니다. 그는 왜 자신이 끊어진 필라멘트와 같다고 말했을까요? 그가 죽어야 했던 이유는 그가 마지막으로 쓴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노인이 아주 커다란 물고기를 잡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의 사투 끝에 엄청나게 큰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배에 실을 수 없어서 옆에 밧줄로 매어 자랑스럽게 항구 마을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상어 떼가 나타나 그 물고기를 물어뜯습니다. 노인이 노를 가지고 쫓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만신창이가 되어 항구로 돌아왔을 때는 생선 머리만 남아있었습니다. 노인은 침대에 푹 쓰러져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헤밍웨이는 엄청난 명예를 얻었지만, 말년에 이전과 같은 작품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얻은 기쁨보다 지금 가진 것을 잃을 고통 때문에 더 큰 무언가를 잡으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었던 것입니다. 

학자들은 얻는 것, 가진 것보다 잃는 것, 그리고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의 고통이 두 배 정도 더 크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도박에 빠지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20달러씩 주고 50% 확률 게임에서 이기면 50달러를 더 딸 수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도박하지 않습니다. 굳이 공짜로 얻은 20달러를 잃을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50달러를 주었다가 미안하다며 30달러를 빼앗고 배팅을 하려면 하라고 하면 대부분이 다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돈이 50달러였는데 20달러 공짜로 가지게 된 것보다 30달러 잃은 고통이 더 커서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만회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20달러를 공짜로 받고도 자기 것을 조금이라도 잃었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참아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왜 돈을 빌린 사람보다 꾸어준 사람이 더 고통을 당하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왜 미국이나 다른 나라의 거부들은 자기들 재산을 자녀에게 주지 않고 다 기부하겠다고 말할까요? 만약 자녀에게 물려주면 그 돈이 어쨌거나 자기 돈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잃을 두려움에 행복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모든 것에 십일조를 내면 됩니다. 돈과 시간과 재능의 십일조를 내면 어차피 그것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잃는 고통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들로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내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생각하며 산 사람이 거지 라자로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거지였지만, 잃는 두려움 없이 가진 것을 나누며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부자는 자기가 무엇을 가졌다고 여기니 이 세상에서부터 고통의 굴레에 묶여 살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우리 마음속에 천국과 지옥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부자와 라자로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화가 앨리스 카하나는 15살에 독일군에 의해 가족과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이때 앨리스 카하나는 뼈아픈 기억을 하나 만들게 되었습니다. 
 
수용소로 끌려갈 때, 앨리스 카하나는 여덟 살인 남동생과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신발 한 짝만 신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에 의해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신발이 벗겨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주의한 동생이라는 생각에 “넌 왜 그렇게 바보 같니! 너 자신의 물건 하나도 제대로 못 챙기니?”라고 소리친 것입니다. 
 
수용소로 끌려가며 닥친 혼란 속에서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동생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동생은 다른 트럭으로 끌려갔고, 그 후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라고 한다면 과연 미움과 저주의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삶의 끝에 서면 후회되는 것이 얼마나 많을까요? 나의 말과 행동으로 타인에게 주었던 아픔과 상처가 오히려 내게 되돌아와 나를 힘들게 합니다. 
 
그런 후회를 더는 만들지 않기 위해 깨어 있는 삶이 필요합니다. 특히 사랑에 집중하면서 받는 사랑이 아닌 주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후회를 줄여나갈 수 있게 됩니다. 특히 마지막 심판 때에는 우리가 얼마를 벌었는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라갔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사랑의 실천에 얼마나 온 힘을 기울였나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바로 그 시간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온갖 호화로운 생활을 했고, 라자로는 너무나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둘의 상황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에 머물고,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 부자가 고통을 받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악행을 저질렀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즐겁고 호화롭게 살면서, 가난한 라자로를 보살피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개가 다가와 라자로의 종기를 핥을 정도로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무관심했습니다. 그 무관심이 그를 저승의 고통으로 이끈 것입니다. 또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부자의 이름은 전혀 알 수 없고, 가난한 이인 라자로의 이름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기억하는 사람은 이 세상 안에서 풍요와 안정을 누린 사람이 아닌, 어렵고 힘든 삶을 산 사람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억하는 사람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사랑 실천이 중요합니다. 나중에 후회할 일을 더는 만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가장 지적인 종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가장 강한 종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는다.

- 리언 메긴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맑은 날도 흐린 날도 공평하게 주어진 우리의 시간입니다. 지금부터가 더 중요한 시간들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다시 시작되는 우리들 삶입니다. 삶의 고초도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나쁜 일도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배우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삶을 바르게 바라보면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우리모두의 공평한 죽음입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더 소중한 것입니다. 맑은 삶이 맑은 죽음이며 하느님께 발길을 돌리는 맑은 만남이 됩니다. 

하느님의 위로를 바라고 지극한 사랑을 바라는 우리들 인생입니다. 그래서 삶이란 그 어떤 것들을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완성자이신 하느님을 향해 우리의 생명이 앞으로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십자가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모든 바탕이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하나의 위로가 다른 모든 위로를 대신합니다. 공평한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사순을 새롭게 살아가는 은총의 새로운 삶이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고초와 위로라는 실존적인 우리의 삶을 다시 껴안는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 삶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주는 십자가에서 우리는 가면을 벗고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을 통한 새로운 시작 영원한 생명이며 영원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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