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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3/01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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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가 당신께 피신하오니,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숨겨진 그물에서 저를 빼내소서. 당신은 저의 피신처이시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를 거룩한 참회 생활로 깨끗하게 하시어 다가오는 축제를 성실한 마음으로 준비하게 하소서.

 

2024년 3월 1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3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시편 105장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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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5장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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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기 37,3-4.12-13ㄷ.17ㄹ-28)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저 녀석을 죽여 버리자.

  • 오늘 복음
    (마태오복음 21,33-43.45-46)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3월 1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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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마태오복음
21장 33-43.45-46절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45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46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3월 1일 05:00
황중호 베드로 신부

 

✚ 교황님 3월 기도지향 00:24

✚ 미사시작 00:38

✚ 강론시작 09:10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우리의 사랑이 중심을 잃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오늘 복음은 포도밭 주인의 행동을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공들여 포도밭을 일구었는지 잘 드러내 주는 표현들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묘사가 확인하여 주는 것은 이 밭의 소유자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주인’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에게서 저항과 반역의 움직임이 생겨납니다. 주인이 자기 몫의 소출을 받으려고 종들을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을 죽여 버립니다. 주인은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종들을 보내지만, 같은 소행이 되풀이됩니다. 

주인은 끝까지 사랑과 신뢰로 자기 아들을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아들이야말로 소유권자이기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며 죽여 버립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을 죽이려 하는데, 그가 자신들을 제치고 아버지의 상속자가 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받는 사람에게 학대받거나 조롱당하는 일이 일어나니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세상을 만드셨고 살기 좋은 곳, 포도 열매가 잘 맺히는 곳으로 일구시어 우리에게 내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진심을 조롱하고 그분의 사랑을 회피하여 온 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이 중심을 잃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러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우리 포도밭의 주인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반역과 저항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를 되찾는 것이 사순 시기에 우리가 다시 세워야 할 삶의 질서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좋아하는 인간, 사랑하시는 하느님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오늘의 주제는 ‘인간이 버린 사람을 하느님께서 귀하게 쓰시고, 인간이 죽인 사람을 하느님께서 살리신다.’로 해도 좋을 겁니다. 

요즘 들어서 우리 인간은 참으로 많은 것을 쓰레기로 만듭니다. 실로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 인간이 버립니까? 

그것을 저는 저희 아나바다 장터에서 실감하는데 전국에서 여러분들이 물건을 보내 주시는 덕분에 저희 장터는 성업 중이고 의미 있는 사업이 되었지요. 

그래서 그냥 쓰레기가 될 것을 재활용할 수 있도록 협력해주신 여러분에게 늘 감사를 드리고 있지만 마냥 좋게만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프란치스칸마저 신자유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신자유주의가 끊임없이 소유와 소비를 부추기는데 우리 프란치스칸들조차도 이 부추김에 넘어간 것입니다. 

과거 우리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회 밖의 건전한 가르침들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을 욕심이라고 규정하고 우리 인간의 그 끝없는 욕망과 욕심을 억제하라고 가르쳤는데 신자유주의는 소유욕과 욕망들을 죄악시하지 말라고 부추기지 않습니까? 

신자유주의는 그러면 왜 그렇게 합니까? 우리 인간의 행복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겁니까? 아니지요. 기업이 잘 돌아가고, 그래서 기업이 많은 이윤을 내게 하기 위해서지요. 

부추김, 이것이 실은 창세기 뱀의 유혹입니다. 뱀은 아담과 하와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다 가졌고 다 따먹는데 낙원 한가운데 저 나무 열매만은 못 따먹는 것 아니냐고 일깨우고 따먹으라고 부추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나무가 뭐냐 하면 바로 선악과, 곧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입니다. 그 열매를 따서 먹는 순간 하느님만 아셔야 할 선과 악을 인간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대로 생겨난 모든 것을 보시고 좋다고 하셨고, 그래서 선이란 하느님 좋으실 대로 된 것인데 그런데 인간이 자기 좋을 대로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 결과 바란 대로 된 것은 선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악이 된 것이며, 바란 대로 된 선 곧 좋아하는 것은 소유하고 바란 대로 되지 않은 악 곧 싫어하는 것들은 버려버리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소유하고는 버립니다. 더 좋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덜 좋은 것을 버려 쓰레기로 만들고, 새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쓰던 것을 싫증 내고는 쓰레기로 버립니다. 그런데 너무도 놀라운 것은 이 자기중심적 소유와 소비가 물건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기 욕망과 필요에 따라 인간마저 소유하고 버립니다. 욕망 때문에 애를 낳고는 성가시다고 애를 버립니다. 좋을 때는 사랑한다고 하고는 싫어지면 사랑을 버립니다. 하느님마저도 필요할 때는 소유하고 욕망의 순간이나 필요 없을 때는 버려버립니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느님은 그렇게 버린 인간을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 인간이 버린 주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십니다. 좋아하고 소유하는 인간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 그 큰 차이를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십일조를 전혀 힘들이지 않고 바치는 법

 

오늘 복음은 ‘못된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아담과 하와가 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는지 설명해줍니다. 바로 선악과를 바치지 않아서입니다. 바로 소출의 일부를 주인에게 바치지 않아서입니다. 그것을 바치게 되지 않은 이유는 자신들이 주님의 덕분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자신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으신 주인님을 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소작인들은 이렇게 결의합니다.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자신들이 주인님이 되려고 하니 주인님이 죽게 됩니다. 내가 옳다고 조금이라도 믿는다면 진리로 오시는 분을 죽이는 것이 됩니다. 내 안에 능력이 있었다고 믿는다면 전능하신 분을 죽이는 게 됩니다. 내 안에 생명력이 존재한다고 믿으면 성체로 오시는 참 생명이신 분을 죽게 만듭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할 수도 없고 스스로 살아갈 수도 없고 스스로 옳은 길을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말할 때 모든 것을 해 주시는 분을 죽여 버리는 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못된 소작인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겸손함을 키우고 감사함을 키워 모든 게 주님 덕분임을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정말 부모가 되어보기 전에는 절대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하듯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님의 마음을 알려면 주인님이 되어보는 수밖에 없고 하느님의 마음을 알려면 하느님이 되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 된다는 말이 교만처럼 여겨지지만, 이 길이 겸손해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김희아 씨는 모반을 가지고 태어나서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기를 버린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보지도 못한, 그리고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녀가 자기 딸에게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딸을 키우며 그렇게 태어나서 키울 수 없는 어머니의 마음을 느낀 것입니다. 어머니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어머니의 마음을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요즘 사순이라 구역 판공을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부족하여 두세 구역씩 묶어서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한 구역에 두세 분씩이라도 냉담하시던 분들이 고해성사를 보러 오십니다. 냉담을 풀기에 성당까지는 너무 멀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소공동체 봉사자들, 특별히 반장님들의 역할이 큽니다. 그분들의 설득이 아니면 냉담하시던 분들은 사제에게 고해성사하고 면담까지 하는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소공 봉사자분들도 다 느끼시겠지만, 저는 특별히 ‘강생의 신비’를 느낍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재래식 화장실에 떨어진 채변봉투를 주워주시기 위해 그 냄새나고 더러운 곳까지 손을 뻗쳐 그것을 건져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덕분으로 저는 학교에서 혼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가지 않아도 되는 곳까지 굳이 가게 되는 것도 하나의 강생의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 속으로 내려오시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겠지만, 어쨌거나 신자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의 낮춤이고 아버지가 되어감입니다. 그러며 저를 위해 낮아지신 아버지와 하느님께 대한 감사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아버지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함으로써 그분들에게 고마움을 갖게 되는 게 교만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못된 소작인들이 정말 못된 것은 그들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것을 맡기며 살게 한 일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받았으면 베풀어야 합니다. 베풀다 보면 그렇게 베풀었는데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주인을 외면하는 잘못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선교합시다. 선교는 하느님이 되는 길입니다. 새로운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하며 고생을 할 때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통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앞에서 십일조를 바치는데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 낮에는 식당, 밤에는 술집을 운영하는 가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손님이 줄어 운영이 어려워진 것입니다. 주인은 며칠 간의 고심 끝에, 저녁에 자기 집에서 술을 마시면 다음 날 점심을 공짜로 주겠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손님이 점점 몰려들어 장사는 나날이 잘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이 가게의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글쎄 저녁 술값에 다음 날 점심값이 이미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공짜를 좋아하면 도둑놈 심보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공짜만을 좋아하고 또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주님께 어떠합니까? 
 
우리 교회의 발전이 공짜로 이루어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봉헌이 있었고, 많은 순교자의 피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많은 신앙인 덕분에 우리 교회가 계속 발전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는 계속 공짜 인생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그 어떤 노력 없이 세속적인 자기 욕심이 채워지길 바라는 기도의 연속은 아니었습니까? 
 
공짜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대로 더 사랑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하늘나라에서 모두 갚아주시겠다고 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포도밭을 일군 다음 소작인들에게 맡기지요. 그리고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소출을 받아 오라고 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매질하고 또 죽이기까지 합니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역시 마찬가지의 악행을 저지릅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은 존중할 거라는 마음으로 보냈지만, ‘상속자인 아들을 죽여 버리면, 이 포도밭을 차지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립니다.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많은 예언자를 죽이고, 심지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스라엘 사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당연히 많은 것을 누려야 한다는 욕심과 이기심이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과 무엇이 다를까요? 
 
그 어떤 노력도 없이 세속적인 자기 욕심이 채워지길 바라는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못된 소작인의 모습이 아닌, 겸손한 삶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착한 소작인의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으로 인정을 받고, 주님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경청의 태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찬사 가운데 하나이다.

- 카네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반드시 빈손으로 떠나야 할 우리들임에도 욕심이 앞을 가립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 하는 사람인지를 묻는 내려놓음의 사순입니다. 사람을 살게하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잊고 삽니다.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느님의 목숨 마저 원하는 우리들을 바라보시는 구원자 하느님이십니다. 

목숨보다 강한 사랑이 있습니다. 욕심을 이기는 하느님의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쪽은 언제나 욕심으로 가득찬 우리자신들임을 발견합니다. 이제까지 우리 것이라 믿어 왔던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는 십자가의 숨결입니다. 포도밭은 결코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욕심을 대가로 하여 얻어진 행복은 누군가의 슬픔이며 죽음입니다. 

하느님 마저 우리의 욕심이 포도밭에서 추방하지만 또 다시 추방 당하는 쪽은 언제나 우리자신들입니다. 성자의 피로 씻기워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병든 우리의 욕심입니다. 제 발등을 찍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라고 우리에게는 회개의 복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잠시 머물러 있다 흘러가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마저 살해하는 교만과 잔인성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는 본연의 자리로 우리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다시 만나는 삶이 예수님의 삶이며 우리의 참된 행복입니다. 아들을 보내신 성부의 뜻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사순의 봄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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