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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2/26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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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를 구하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제 발은 올바른 길에 서 있나이다. 거룩한 모임에서 주님 찬미하오리다.

하느님, 영혼의 건강을 위하여 육신의 극기를 명하셨으니 저희가 결코 죄를 짓지 않고 자애로우신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

 

2024년 2월 26일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2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복음 6장 36절)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복음 6장 36절) 성경말씀카드 루카복음 성경구절이미지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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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복음 6장 3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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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다니엘서 9,4ㄴ-10)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복음 6,36-38)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2월 26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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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루카복음
6장 36-38절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2월 26일 05:00
김광두 고스마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7:54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최정훈 바오로 신부

 

용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우리는 여러 관계 안에서 서로 많은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상처를 주지 않고 산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상대방은 나에게 무시당하였다고 느끼고, 수치감과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남에게 상처를 한 번도 주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느꼈을 때,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압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가시 돋친 말을 던졌을 때, 그것이 내가 먼저 준 상처의 대답은 아닌지, 또한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같은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돌아봅시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그 사람처럼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임을 스스로 깨달았다면, 그리 쉽게 남을 판단하거나 단죄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또한 상대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인식은 그 모든 것을 용서하여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합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나의 능력으로는 결코 기워 갚을 수 없는 많은 잘못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한다면,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다른 이들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자신을 보지 못한다면, 그리고 언제나 기다려 주시고 용서하여 주시는 하느님을 느끼지 못한다면, 너무나 쉽게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끝까지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죄의 무거움을 잘 아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행복한 사람이고 성숙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더 크게 느끼며, 체험한 그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자비 남용 용서 남용

 

오늘 독서와 복음 모두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관해 얘기합니다. 그래서 저도 자비와 용서에 관해 얘기하고자 하는데 오늘은 하느님 자비와 용서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집중코자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제가 남용하고 있다는 반성 때문입니다. 자비 남용, 용서 남용, 이것이 저의 태도입니다. 

자비란 죄를 지었는데 죄지은 나를 하느님께서 용서하실 때 그 용서하시는 사랑을 특별히 일컬어 자비라고 하고,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용서해 주시는 사랑을 일컬어 자비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용서하실 때 저의 태도는 어떠해야겠습니까? 하느님께는 감사하고 다시 죄를 짓지 않는 것, 다시 말해서 반복하지 않는 것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하느님처럼 자비롭고 용서하는 것이어야 하겠지요. 

이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잘못된 태도들이 있습니다. 우선 하느님 자비와 용서를 우습게 여기는 가장 나쁜 태도가 있습니다. 

교만한 자의 태도이거나 세상 권력자의 자비와 용서가 필요하지 하느님 자비와 용서는 필요 없다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지는 않습니다. 그 정도로 교만하지 않고, 세상 권력자들을 제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심판하거나 용서할 사람이지 그들의 자비와 용서를 구할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을 정도로 저는 도도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해 다음으로 잘못된 태도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그것이 감사로 이어지지 않는 태도입니다. 

복음에서 열 나병환자가 같이 치유 받았지만 이방인들은 주님께 감사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과 달리 정작 이스라엘 사람은 당연하게 여겼기에 아무 감사를 드리지 않았지요. 

저의 잘못된 태도는 이런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긴 합니다. 그러나 잘못에서 돌아서지 않는 잘못을 또 범하는 것입니다. 

저의 자비 남용과 용서 남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약의 남용과 비유하면 좋을 것입니다. 약이 좋다는 것을 믿습니다. 아니, 믿는 정도가 아니라 과신합니다. 그래서 약만 믿고 나쁜 짓을 계속합니다. 간에 좋은 약을 믿고 술을 계속 먹는 다시 말해서 끊지 않는 것입니다. 

저도 계속 용서하실 거라고 하느님 자비를 믿습니다. 이 믿음은 철석같고 찰떡같고 확고하지만, 과신이고 잘못된 믿음입니다. 과신이고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가 그렇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분명 계속됩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내가 뉘우치지 않고 고치지 않는 것이 과신이고 잘못입니다. 이는 부모의 사랑을 믿고 흥청망청 돈을 쓰고 나쁜 짓을 계속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다니엘서는 이런 저와 같은 이스라엘의 잘못에 대한 반성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고,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자비와 용서에 대한 잘못된 또 다른 태도는 이웃에 대한 것입니다. 내가 위로부터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받았으면 옆으로 그 자비와 용서를 이웃에게 베풀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 것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자비를 그렇게 받았어도 아직도 하느님 자비가 부족한 것처럼 자비하지 않은 것입니다. 얼마나 하느님께서 더 자비를 베푸셔야 내가 자비로 가득 찰지! 

이런 저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남을 되질할 되를 깨버린 이의 행복

 

오늘 복음은 남을 심판하지 않으면 나도 심판받지 않는다는 주제입니다. 내가 자비로울 때 자비로운 기준으로 심판받습니다. 주는 대로 받습니다. 반면 남을 단죄하면 그것으로 나도 단죄받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테네와 엘레우시스 사이의 성스러운 길에 살았던 불량 대장장이이자 산적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손님에게도 완벽하게 맞을 것이라고 주장한 침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방법은 잔인했습니다. 여행자가 침대에 비해 키가 너무 작으면 선반에 눕혀 잡아 늘여 펴곤 했습니다. 여행자의 키가 너무 크면 다리를 잘라서 몸에 맞도록 만들었습니다. 

테세우스는 처음으로 아테네를 여행하던 중 프로크루스테스를 만났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자신이 다른 많은 사람에게 가했던 것과 똑같은 잔인한 대우를 테세우스에게도 가할 생각으로 테세우스를 침대에 누워 쉬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프로크루스테스를 제압하고 그를 자신의 침대에 눕혔습니다. 그런 다음 프로크루스테스를 같은 방식으로 대했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손님을 괴롭히던 바로 그 방법으로 죽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며 나는 얼마나 부자유스럽습니까? 자기도 그렇게 못하면서 남에게 하도록 강요하면 다른 사람들 눈치가 있으므로 말도 실수할까 봐 제대로 못 하고 행동도 경직됩니다. 자기 판단의 감옥에 자신이 갇히는 것입니다. 자유로워하고 싶으면 자비를 원하면 남을 판단하는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우리 속담에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 진리를 압니다. 내가 외로우면 다른 사람들을 외롭게 만들고 있고 내가 짜증 나면 분명 다른 사람들을 짜증 나게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영화 ‘셰임’(Shame)에서 주인공 브랜든은 평범한 직장인지만 성에 대한 강박적인 중독으로 비밀스러운 삶을 살아갑니다. 당연히 그는 항상 고독하고 공허하고 외롭습니다. 여자를 자기 욕구의 충족도구로 여기기 때문에 세상도 그를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브랜든의 여동생 시씨는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브랜든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브랜든은 시씨의 삶을 응원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상사 데이비드와 술집에 들렀을 때 시씨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데이비드는 그녀를 원하게 됩니다. 데이비드는 유부남임에도 브랜든의 집에서 그의 동생과 잠자리를 가집니다. 데이비드는 구토가 날 정도로 직장 상사가 밉지만, 그 화풀이를 동생에게 합니다. 

오빠에게 쫓겨난 동생은 오빠에게 계속 전화하다가 자살 시도를 합니다. 동생을 품어줄 수 없었던 이유는 유부녀를 막론하고 흑심을 품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가 직장 상사와 동생에게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이유는 자기를 먼저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이 갈등의 굴레 안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받고 싶거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영화 극한 직업에서는 형사들이 잠복근무하기 위해 치킨집을 차렸는데 의외로 장사가 잘된다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왜 장사가 잘됐을까요? 사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돈 벌려고 한 게 아니니 아무 생각 없이 퍼주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주방장이 주인이 미워서 양념을 팍팍 썼더니 장사가 더 잘되더라는 것입니다. 더 주려 하니까 더 받습니다. 

이 진리를 알면 세상에서 인정받지 않을 수 없고 가난할 수도 없습니다. 남을 건강하게 하는 트레이너가 몸이 안 좋아지기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돈을 떼먹으려 하고 남의 명예를 도둑질하며 남을 아프게 합니다.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몇 배로 돌아올 줄 모르면서 말입니다. 

행복해지고 싶거든 우리 안에 사랑을 방해하는 남을 심판하는 되를 깨버립시다. 저절로 심판하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죄와 싸웁시다. 이웃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할지만 생각합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세상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받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바람둥이 남자가 있습니다. 워낙 여자 문제를 많이 일으킨, 어느 날 동생이 형에게 “제발 정신 차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형은 어릴 때, 동생에게 엄마의 사랑을 빼앗긴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엄마가 동생만 챙기는 바람에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었고, 결국 지금의 인간관계까지 망치고 있다는 항변이었습니다. 이 남자의 바람기가 과연 어머니 때문일까요? 
 
어떤 형제님은 어린 자녀에게 폭력을 자주 씁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주변에서 말리자, 어렸을 때 자기 부모님께 맞았던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많이 맞은 경험이 자기 역시도 그렇게 폭력을 쓰는 사람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의 폭력성이 과연 부모 때문일까요? 
 
이 두 사례 말고도 ‘~탓’을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과거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를 탓하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로써 자기의 문제로부터 도망가는 것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났고 절대 바꿀 수가 없으니, 자신의 문제도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나의 모든 문제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자기는 늘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지금 모습을 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탓’만 하면서 지금 모습을 계속하고 싶을 뿐입니다. 나는 문제 없으니 그냥 이대로 살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으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나의 문제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도 문제를 넘기게 되어서 모두 힘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자비로우신 아버지’라고 선포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하게 됩니다. 따라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하지 않는 삶, 단죄하지 않는 삶, 용서하는 삶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앞선 예에 등장하는 사람처럼, ‘~탓’을 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면 자기도 그러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랑의 삶을 그대로 되갚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그저 따를 뿐인데도, 그런 삶을 살 때 더 많은 은총과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탓’을 하는 삶에서 철저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비로우신 아버지’에 집중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을 보고 또 이를 따르는데 철저한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에게 문제 되는 것들을 과거의 일로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지금, 그리고 나 자신이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에 매이지 않고 올바르게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생의 목적은 우리의 자유를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을 찾는 데 있다.

- 휘시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 예수님의 자비로우신 말씀입니다. 심판을 멈추어야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결코 심판으로는 가까워질 수 없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입니다. 자비의 실천이 없기에 용서의 체험도 없습니다. 심판의 끝은 죽음이지만 용서의 끝은 우리모두의 자유입니다. 

하느님으로 인해 우리는 자비와 용서를 얻습니다. 먼저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밝히는 것은 마음입니다. 자비도 용서도 평화도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이 우리를 살리는 마음입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심판과 단죄가 없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자기의 소중함을 올바로 아는 사람은 남을 해치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에게 필요한 것은 심판이 아닌 자비이며 용서입니다. 자신의 아픔에만 골몰하면 타인의 십자가를 볼 수도 없고 동정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으로부터 구원을 체험하는 은총의 사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미움이 아닌 용서를 통해 용서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사랑의 실천이 예수님의 참된 정신입니다. 부끄러워할 것을 부끄러워하며 뉘우칠 것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랑이 심판을 이기며 자비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사람이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를 묻는 사순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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