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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11/15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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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2023년 11월 15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1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테살로니카1서 5,18)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테살로니카1서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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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살로니카1서  5장 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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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지혜 6,1-11)
    임금들아, 들어라. 지혜를 배워라.

  • 오늘 복음
    (루카 17,11-19)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1월 15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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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

 

 

루카복음
17장 11-19절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1월 15일 (수) 05:00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박재득 테오도로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20

 

 

 

의정부 용현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15일 (수) 10:00
의정부 용현동성당
이충열 티토 신부

 

📌 미사시작 14:55

📌 강론시작 23:42

 

 

 

명서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15일 (수) 10:00
명서동성당 미사
구성진 율리아노 신부

 

📌 미사시작 06:51

📌 강론시작 16:28

 

 

 

남양성모성지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15일 (수) 11:00
남양성모성지 미사
이상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 미사시작 38:18

📌 강론시작 48:17

 

 

 

팔로티회 실시간 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1월 15일 (수) 15:00
팔로티회 홍천
장화기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0:17

📌 강론시작 09:36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1월 15일 (수) 16:00
팔로티회 분당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약 시대에 유다 지역에 살던 이들과 사마리아 지역에 살던 이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 기준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기기보다 다른 민족과 섞여 우상 숭배를 일삼는 불경한 이들로 비쳐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사상이 매우 강하였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 섞여 ‘혼혈’로 살며 이방인들의 종교를 받아들인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나병 환자 가운데 돌아와 하느님께 감사 인사를 드린 이는 사마리아인뿐입니다. 그래서 유다인이신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시듯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데는 출신이나 이해관계가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걸림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마리아 사람’으로 단정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각자가 만들어 놓은 편협한 기준에 따라, 때때로 집단 이기주의에 눈이 멀어 혐오와 경멸과 증오의 대상으로 낙인을 찍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일상 속 작은 은총에도 감사드릴 줄 아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사람이 단 한 명뿐인 이유

 

처음 사제 서품을 받고서 제일 고민되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해소 안에서 훈화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였습니다. 고해성사를 본 교우가 참 사랑이신 주님 안에서 진정한 위로와 힘을 얻으셨으면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훈화의 한계가 너무 컸습니다. 젊은 제가, 또 경험 없는 제 말이 오히려 아픔과 상처는 되지 않을까 싶어서 늘 조심하고 조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고민을 안고 고해소에 들어간 지, 벌써 2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금의 제 모습과 새 사제였을 때의 제 모습을 비교하면 정말로 많이 바뀌었음을 깨닫습니다. 

외적인 모습은 당연하고, 내적인 모습도 엄청나게 바뀌었습니다. 훈화, 강론, 강의…. 모든 면에서 부족했던 첫 모습과 달리 처음의 순수한 모습은 사라졌지만, 지금은 꽤 많이 능숙해졌고 또 실질적인 도움도 드릴 수 있는 모습으로 성장했습니다.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25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이 부족함을 깨닫습니다. 여전히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편하고 쉬운 것만을 하려는 안일함과 게으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계속해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을 향해 나아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어떤 성장이든 시간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의 흐름 없이 곧바로 성장이 이루어지길 바랐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곧바로 완성의 모습으로 나아가기까지는 ‘나’의 존재가 너무 나약하고 부족하지 않을까요? 
 
시간은 계속 흐릅니다. 이 흐르는 시간 안에서 ‘나’의 생각이 차곡차곡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성장과 함께 하느님의 영광을 나의 이 몸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다가 어떤 마을에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에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치유의 은총을 내려 주셨습니다. 왜 이렇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치유하셨을까요? 그동안 그들이 겪었던 아픔과 상처의 시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병이 나은 것을 깨닫고 다시 돌아와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사람은 단 한 명만이었습니다. 이 사람만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온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하느님을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이라는 특별한 선물도 받습니다. 
 
우리의 시간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매 순간 하느님의 뜻을 새기며 그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모든 것을 손에 넣으면 희망이 사라진다. 언제나 어느 정도의 욕심과 희망을 비축해 두어라.

- 발타자르 그라시안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은총이 은혜가 될 수 있고 저주도 될 수 있다

 

오늘 복음도 ‘감사’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치유되었지만, 오직 이방인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와서 감사를 표했습니다. 은혜는 열 명이 다 받았지만, 구원은 한 사람만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은총을 받아도 은혜를 주신 분과 받은 은총에 감사가 표현되지 않으면 그 은혜는 오히려 독이 됩니다. 그러니 내가 주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엄마 돈을 훔치는 금쪽이가 있습니다. 금쪽이는 엄마에게 많은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잘 보이려고 엄마 돈을 훔칩니다. 그렇다면 금쪽이에게 지금까지 엄마가 준 돈은 은혜가 아니고 저주입니다. 그가 돈에 집착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어떤 아이들은 부모에게 받은 돈을 모아서 다시 부모에게 작은 선물이나마 해 드립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지금까지 부모가 자녀에게 준 돈은 은혜입니다. 감사할 줄 알게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누군가에게 은혜를 줄 때는 그것이 그 사람에게 은혜가 될지, 저주가 될지도 고려해야 합니다. 저주가 되고 있는데 계속 주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감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더 나빠지지 않게 은총을 끊으십니다. 

감사하면 생각나는 분이 김희아 씨입니다. 얼굴 반쪽에 커다란 모반이 있어 부모에게 버림받았습니다. 보육원에서 자라면서 자기 얼굴의 점을 지워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더 마음 아파하시는 것을 알고는 더는 그런 청을 드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서 감사를 찾았습니다. 그랬더니 결혼도 하게 되었고 예쁜 두 딸도 낳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나가면서 희아 씨의 얼굴을 보더니 “밥맛이야, 저것도 얼굴이냐?”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 말을 하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러나 희아 씨는 그런 사람에게까지 감사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라는 성경 말씀을 실천할 기회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은 안 봐도 주위에 좋은 사람이 많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람에게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느님의 성막을 정화하기 위해 짐승들의 피를 뿌렸습니다. 기둥과 제구들, 모든 것에 그 피를 뿌려 정화하였습니다. 우리가 받는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는 우리 피를 뿌리는 일과 같습니다. 

나의 감사의 대상이 된 것은 정화됩니다. 그리고 은혜가 됩니다. 은혜는 구원에 도움이 되는 은총입니다. 모든 은총이 은혜가 되지 않고 감사의 피가 뿌려진 것만 그렇게 됩니다. 모든 것에 감사의 피가 뿌려졌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에 살게 됩니다. 거룩한 것들에 둘러싸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해서 손해 볼 게 있을까요? 우리는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받았다고 믿고 감사의 봉헌을 하면 사람이 착해집니다. 그러나 받은 것이 없다고 믿고 불만을 가지만 사람이 악해집니다. 착해지면 좋은 친구들이 생기고 악해지면 외로워집니다. 좋은 친구가 많은 이들은 일반적으로 건강하고 오래 살고 행복합니다. 

하지만 친구가 없는 이들은 그 반대입니다. 그러니 감사해서 손해 볼 게 없습니다. 우리는 감사 일기를 쓰며 내가 받은 일부를 봉헌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일이 잘될 수밖에 없습니다. 받는다고 다 은혜가 아니라, 내가 받은 것이 은혜가 되려면 받은 것의 일부를 감사로이 되돌려드려야 함을 잊지 맙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은총이 당연한 사람들의 불행

 

잘 아시다시피 오늘 복음의 얘기는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얘기입니다. 제 생각에 루카 복음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똑같은 은총을 받았는데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이스라엘 사람이 그렇지 않은 이방인보다 하느님께 더 감사드리지 않음을 꼬집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이스라엘 나병 환자들이 이방인보다 감사를 드리지 않았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더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을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께 감사를 더 잘 드려야겠지요. 

그런데도 감사를 오히려 더 드리지 않음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감사드리지 않음은 감사하지 않기 때문이고, 감사하지 않음은 그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자식과 남이 똑같이 받았다면 그 사랑이 자식에게는 당연하고 남에겐 특별하겠지요. 나병 환자들이 같이 치유 받고 이방인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감사드리지 않은 이유도 이와 같을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은 하느님의 선민이고 아들이니 하느님 치유는 당연하다고 생각한 데 비해 이방인은 받을 자격이 없는데 받았기에 그것은 특별한 선물이고 은총이고 그래서 감사드린 것이겠지요. 

은총이란 것이 이런 것입니다. 당연한 것은 은총이 아니고 특별할 때 은총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이런 이유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부모가 아니라 의사입니다. 어떤 환자가 돈 주고 의사에게 병을 고쳤습니다. 그런데 어떤 환자는 돈이 없어서 공짜로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 경우 돈 주고 치유 받은 사람은 그 치유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공짜로 치유 받은 사람은 무상의 은총이 되게 되겠지요. 차로 말하면 유상 수리가 아니라 무상 수리입니다. 

이때 돈 주고 치유 받은 사람은 의사에게 불평할 것입니다. 왜 치유가 친절하지 않으냐? 왜 나에게는 돈 받고 그에게는 공짜냐? 이스라엘 나병 환자들도 하느님께서 치유해주신 것이 아니라 의사가 치유해준 것쯤으로 생각한 것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자신에게 감사드리러 오지 않았다고 한탄하시지 않고, 하느님께 영광 드리러 오지 않았다고 한탄하시지 않습니까?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그래서 오늘 우리도 반성합니다. 우리는 병을 치유 받고 많은 경우 의사가 치유해줬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치유해주셨다고 생각하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은총이 당연하고 그래서 은총이 아닌 사람은 불행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기도와 감사로 시작하는 오늘의 마음입니다. 오늘의 마음이 내일의 마음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드려야 할 감사에 진실로 인색한 우리들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자리에 감사를 모르는 우리가 있습니다. 삶의 의미는 하느님과의 참된 감사의 만남입니다. 삶에 감사드릴 수 있는 사람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이 진실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나간 시간이 은총의 시간인 것은 시간의 마디마디마다 그 안에 하느님의 축복이 깃들었기 때문입니다. 축복을 잊지않고 기억하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삶의 가장 큰 지혜입니다. 

하느님께 자비를 간절히 청하였던 순간이 사실은 우리가 정화되던 가장 좋은 은총이었습니다. 자비와 치유 정화와 감사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가장 바람직한 우리들의 믿음이며 구원입니다. 믿음을 키우는 것은 감사입니다. 

빈곤한 감사를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감사의 족쇄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이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고 하느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믿음은 감사에서 사랑은 만남에서 깊어짐을 배우는 은총의 오늘입니다. 하느님께 제 삶의 모든 것을 바쳐 영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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