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오너라. 너희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가장 작은 내 형제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느님, 복된 엘리사벳에게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공경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섬기게 하소서.
2023년 11월 17일 (금)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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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다. (지혜서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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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서 13장 5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지혜 13,1-9)
세상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 오늘 복음
(루카 17,26-37)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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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루카복음
17장 26-37절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28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29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30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31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32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33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6)·37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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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7일 (금)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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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현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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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는 종말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의 표징들, 다시 말해서 정확한 시간과 구체적인 장소에 관하여 궁금해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날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으므로 일상생활 가운데 종말이 닥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종말에 대한 좀 더 정확하고 구체적인 표지들을 바라지만,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즉답을 피하시며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만 하십니다.
구약 성경의 예언서에서(이사 18,6; 34,15-16; 예레 7,33; 12,9; 15,3; 에제 39,17 참조) ‘독수리’ 같은 맹금류는 하느님의 심판과 연결됩니다. 루카 복음서 17장 37절에서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라는 말씀은 그 누구도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사람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께서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다시 오실지를 예견하느라 일상생활에서 동조하거나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종말을 준비하는 가장 현명하고 슬기로운 방식 가운데 하나는, 오늘 기념하는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의 모습을 본받는 것입니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신음하며 아파하는 이웃과 공감하여 주는 것, 그들을 위하여 드러나지 않게 헌신하고 봉사하며 자선을 베푸는 것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 곧 종말을 준비하는 합당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종말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교구청에 갈 일이 있을 때, 또 장례로 병원에 갈 때, 그밖에 송도를 떠나 도심지로 갈 때 자주 지나가는 동네가 있습니다. 바로 옛날에 그러니까 거의 50년 전에 살았던 동네입니다. 함께 차를 타고 있는 분에게 이 동네를 가리키면서, “이 동네가 예전에 자그마한 동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넓은 공터가 있기도 했지요.”라고 말하면 깜짝 놀랍니다. 왜냐하면 도저히 동산이나 공터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이거든요.
이 동네에서 제가 기억하는 예전의 모습은 전혀 없습니다. 동산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아파트들이 들어섰습니다. 갈대밭이 있었던 공터는 지금 많은 빌딩과 상가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당시에 어머니와 어머니 친구들이 함께 이야기 나누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때 어머니 친구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는 절대로 개발되지 않을 거야.”
이사 가자마자 곧바로 터미널이 생기는 등 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어머니와 친구분의 예상은 불과 몇 년 만에 완전히 틀렸습니다. 그 뒤 그곳이 계속 발전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예상도 틀렸습니다. 터미널은 다른 곳으로 이전했고, 이제는 개발이 멈춰진 완전 옛날 동네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예상은 늘 틀렸습니다. 그런데 자기 예상은 꼭 맞을 것처럼 생각하고 또 그렇게 기대합니다.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만이 틀림 없이 올바른 길로 가십니다. 하지만 여전히 틀린 주장을 맞는 것처럼 우기고 있던 우리가 아닐까요? 따라서 주님의 뜻만을 찾아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도 겸손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우리 역시 겸손의 모습으로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아 때, 사람들은 대홍수가 날 것을 알았을까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과연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예측할 수 있었을까요? 모두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종말을 준비하는 모습이 꼭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인간적인 기준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기준을 따르면서, 주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종말도 언젠가는 반드시 오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는 것입니다. 이 당연한 이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노아 시대의 사람들,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과 같은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뜻이 아닌, 주님 뜻에 집중할 때 잘 준비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용서하지 않는 사람의 내적 고통처럼 큰 고통은 없다. 그것은 평안을 거부한다. 그것은 치유를 거부한다. 그것은 망각을 거부한다.
- 찰스 스윈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죽음을 대비해 노아의 방주 짓는 법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 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일러주십니다. 마지막 심판 때는 노아의 홍수와 같을 것입니다. 노아처럼 방주를 만들던 사람은 죽음이라는 홍수가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삶에 집착하다 결국 홍수를 맞이한 이들은 슬픈 결말을 맞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소돔의 멸망입니다. 소돔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방주를 만드는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롯입니다. 방주에는 두 천사를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은총과 진리입니다. 은총과 진리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게 됩니다. 따라서 소둠의 멸망을 통해 노아의 방주가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됩니다.
이 와중에 방주를 만들지 않는 이가 있었습니다. 멸망한 이들이야 당연하겠지만, 롯의 아내입니다. 롯의 아내는 여전히 세상 것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자녀는 세상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 이들입니다. 물 위를 걷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이 돈에 집착하겠습니까, 세상 권력에 집착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방주를 잘 만들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세상 것들에 붙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롯의 아내는 세상 것에 붙들렸습니다. 그래서 소금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 재물과 쾌락, 명예로부터 자유롭다면 그 사람은 방주에 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을 때 성 요한 바오로 2세처럼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며 주님께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키워갑시다. 그리고 그 믿음이 세상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믿음이 되게 합시다. 아무리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다고 할지라도 세상 것들에 휩쓸리고 휘둘린다면 실제로는 구멍이 뚫린 방주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굳건한 노아의 방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배디민턴 안세영 선수는 한 선수에게만 일곱 번을 졌었습니다.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 때 단 한 게임을 뛰고 예선 탈락을 했었는데, 자신이 너무 창피하게 여겨졌습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졌습니다. 당시 게임이 전혀 되지 않았었고 모든 것을 쏟아부어도 천위페이는 절대 넘을 수 없는 만리장성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안세영 선수에게 좌절을 안겨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나는 인생에서 실패를 거듭해왔다. 이것이 정확히 내가 성공한 이유다.”
그녀는 “일요일도 운동하겠다”라는 결심을 굳힙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운동했습니다. 그렇게 맞이한 도쿄 올림픽 8강에서 다시 천위페이 선수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또 졌습니다. 이때 안세영 선수가 느낀 감정은 천위페이가 벽과 같았다고 합니다.
포기했을까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레슬링 지옥 훈련도 했고,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살리는 훈련을 끊임없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질 수 없겠네!”
그녀는 ‘대각스매싱’이란 기술을 완성하였고 이번엔 자신이 벽과 같은 선수가 되면서 단식과 복식 금메달을 휩쓰는 세계랭킹 1위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천위페이를 경기에서 피하고 싶었을까요? 빨리 만나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수능 때가 되면 시험이 두려워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능만 시험일까요? 이 세상 모든 시간은 다 시험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학생 때야 말할 것도 없고, 결혼해서도 그렇고 직장에서도 그렇습니다. 모든 삶이 평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 평가에서 뒤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시험을 그냥 두려워만 해야 할까요? 어차피 보아야 하는 시험이라면 안세영 선수처럼 시험이 기다려지는 실력을 쌓으면 안 될까요? 노력해서 그 시험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 시험은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인생을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은 오히려 시험이 기다려지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 인생을 열심히 산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삶이 막연히 두려워하며 공부하지 않는 학생보다 낫습니다.
“죽음이라는 시험아, 빨리 와라!”
우리 각자는 노아의 방주를 짓는 시험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아의 방주가 바로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 그래서 물 위를 걸을 수도 있고, 죽어도 영원히 사는 존재라는 믿음임을 알았습니다. 이 믿음을 측정하는 방법은 세상에 어떤 것도 집착하지 않는 것임도 알았습니다.
물 위를 걸을 수 있고 부활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그 믿음이 나의 방주입니다. 그것만 준비되었다면 죽음이란 시험이 기다려질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유일한 인생의 시험을 앞두고 우리가 할 일은 바로 믿음의 방주를 견고히 짓는 것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애착이 아닌 사랑을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어제는 하느님 나라를 다른 때, 다른 곳에서 찾지 말고, 지금, 여기서 찾아야 하고 만나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신다는 교리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교리를 가지고 오늘 저는 반대의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를 떠나야 하고, 지금 여기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 말입니다.
금요일도 하느님을 만나고 토요일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여기서도 하느님을 만나고 저기서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금요일이어야만 한다거나 여기여야 한다고 고집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니 지금과 여기를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그리고 롯의 아내처럼 재앙과 파멸이 불가피합니다.
지금과 여기는 떠나야지만 새로운 지금과 여기가 시작되고, 지금과 여기가 끝나야지만 영원과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니 지금과 여기는 살아야 하는 것이지 집착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집착하는 것은 더러운 영들이 게라사 지역을 더럽게 집착하여 돼지 떼 속에서라도 살려는 것과 같고, 그리하여 그 영혼들은 저세상 곧 하느님께 가지 못하고, 이 세상을, 아니 게라사 지방을 떠나지 못하고 영원히 떠도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애착도 집착과 마찬가지임을 또한 깨달아야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가지 못함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여기에 두고 떠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하느님께 기쁘게 감으로써 내 사랑하는 이들도 기쁘게 하느님께 따라오도록 하는 것이 애착이 아닌 사랑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반드시 오고야 말 우리모두의 죽음입니다. 끝내 가야 할 우리모두의 여정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고 창조가 있으면 반드시 종말이 있습니다. 죄인에게는 빛의 심판이 기다립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썩어 없어질 시체에 마음 빼앗기지 않습니다. 방향을 잃어버린 시체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시체는 시체를 갉아먹듯 죄는 죄를 갉아먹으며 모여듭니다.
시체는 가족의 근황을 결코 묻지 않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생명의 빵은 생명의 빵으로 사랑을 주고받습니다. 우리가 쌓아놓은 모든 것은 이와 같이 허물어지고 없어지고 말것입니다.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욕심을 물어뜯고 미움을 탐색하는 끝없는 시체놀이를 멈춥니다. 시체가 사는 곳은 영원한 죽음이지만 생명이 사는 곳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시체는 목적지를 모릅니다. 생명을 생명으로 바라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죽음이 덮쳐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이 믿음을 정화하듯 십자가는 십자가로 우리를 정화합니다.
우리자신이 죽어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야 할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그 길 위에 우리가 있습니다. 뼈와 살이 생명의 빵과 함께 춤추는 생명의 길입니다. 시체와 독수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뵙는 생명의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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