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주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시어 언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2023년 11월 20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1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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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루카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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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복음 18장 41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마카베오기 상권 1,10-15.41-43.54-57.62-64)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렸다. - 오늘 복음
(루카 18,35-43)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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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루카복음
18장 35-43절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1월 20일 (월) 05:00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최정열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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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용현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20일 (월) 10:00
의정부 용현동성당
김유철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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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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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티회 홍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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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1월 20일 (월) 16:00
팔로티회 분당
김지학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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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상우 바오로 신부
다른 것과 타협하지 말아야 할 신앙적 가치는 무엇입니까?
이번 주는 제1독서로 마카베오기 상권을 읽습니다. 이 책은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을 시사합니까?
마카베오기는 상권과 하권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기원전 176년부터 134년까지 펼쳐진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룹니다. 이는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계 왕조 셀레우코스 4세 통치 말기부터 유다의 대사제 요한 히르카노스의 즉위까지 해당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짓밟았던 비유다계 출신 왕조의 통치부터 유다계 왕조가 재정립되는 역사적 종교적 과정을 서술하기 때문에, 교회 전통은 이 두 책을 ‘역사서’로 분류합니다.
한편 마카베오기 상권은 그리스계 왕조에 대항하였던 유다 마카베오와 그의 두 형제의 무용담을 차례로 엮은 삼부작 드라마입니다. 오늘 제1독서(1마카 1장)는 유다 지방에 그리스 관습과 문화, 곧 이교 풍습을 강요한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의 불경한 작태를 고발합니다.
마카베오기 상권 2장부터는 마타티아스 사제와 그의 세 아들(유다 마카베오, 요나탄, 시몬)의 반란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시나이 계약과 율법을 수호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방 출신 왕조의 핍박과 박해 앞에서 유다인들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고 계약의 수혜자가 되는 길은 철저한 율법 준수와 폭력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이교 풍습의 거부로 제시됩니다.
그러면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율법 준수’처럼 다른 것과 타협하지 말아야 할 신앙적 가치는 무엇입니까? 복음 정신과 반대되는 현대의 ‘이교 풍습’은 모든 것을 돈과 실적으로만 환산하려는 세속적 유혹이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딱히 무슨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불안하고 우울한 기분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분명 우울증과는 다릅니다. 그런데 이런 불안감과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고통스러워할 만한 특별한 일을 체험한 것도 아닌데,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불안감과 우울감에 당황스럽게 됩니다. 왜 이런 감정이 생겨날까요?
영국 심리학자 멕 어럴은 이를 ‘스몰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으로 생긴 마음의 상처가 쌓이고 쌓여서 이유 없는 우울감과 불안감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스몰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을까요?
멕 어럴은 우선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그러나 그렇게 중요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경험들을 계속해서 떠올려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떠올렸을 때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스몰 트라우마의 원인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원인을 알게 되면 누군가에게 털어놓아야 한다고 합니다. 자기 입 밖으로 나가면서 편안한 마음이 생기고 갑작스럽게 찾아오던 불안과 우울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별것도 아니라면서 나를 우습게 여길 것 같고, 자신의 이런 나약한 모습이 알려질 것 같은 또 다른 불안감도 생길 것 같습니다. 또 누군가에게 말해서 오히려 문제가 더 커졌던 적도 많았기 때문에 망설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성찰하면서, 또 고해성사를 보면서 주님께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찰과 고해성사를 통해 편안한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평화를 주시는 주님을 체험하는 중요한 순간이 됩니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는 곧바로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사람도 이 눈먼 이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사람들의 가만있으라는 말을 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더 큰 소리로 외칩니다.
사람의 해결책은 문제를 오히려 더 복잡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해결책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최고의 효과를 가져옵니다. 실제로 이 눈먼 이는 예수님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직접 말함으로 인해,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해결책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해결책을 굳게 믿고 주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기도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해결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원의 선물을 받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
-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중에서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구원에 필요한 믿음이 다 들어있는 가장 짧고 강력한 기도문
오늘 복음에는 우리가 매 미사 때 하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가 나옵니다. 예리코의 눈먼 이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청합니다.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해도 멈추지 않고 청합니다. 불의한 재판관에서 올바른 판결을 해달라고 청하는 과부와도 같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런데 믿음은 단순히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다거나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 있는 이들도 하느님이 있는 줄 알고 그 아드님이 예수님임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저주합니다. 이스카리옷 유다도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알았습니다. 온갖 기적들을 다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드님을 자신이 이겨 먹는 기쁨을 선택하고 지옥에 갔습니다. 이렇듯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단순히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아담과 하와도 하느님을 믿었지만,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어야 나를 구원하는 믿음이라고 할까요? ‘우와한 비디오’에 ‘쓰레기로 가득 찬 트럭에서 먹고 자는 남자’ 사연이 나왔습니다. 한 아저씨가 하루 24시간 중 20시간을 일하며 고물을 모아 팔며 생활합니다. 그러나 이틀에 밥 한 끼 먹기 힘들 정도로 벌리는 돈은 없습니다. 차 기름값이나 수리비도 나오지 않습니다. 잠도 하루에 한두 시간밖에 자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원룸이 있기는 한데 전기세와 수도세 등을 내지 않아 집은 살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아저씨는 한 시간 정도 차에서 앉아서 눈을 붙이고 하루 종일 일을 합니다. 그러나 남는 것은 없는 삶을 3년째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산 이유는 힘들게 번 돈을 원룸에 숨겨놓았는데 도둑이 들어 가져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가격이 오를 것 같은 쓰레기들을 차에 그대로 싣고 다니며 폐지를 주워 하루 몇천 원 정도 벌어 생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작진이 아저씨를 동사무소로 모시고 가서 도울 방법을 찾습니다. 보조금을 받게 하여 집에 다시 전기와 수도가 들어오게 합니다. 그러고는 차에 있는 오래된 쓰레기들을 처리해줍니다. 기분이 어떠냐는 말에 아저씨는 “속이 후련하죠!”라고 대답합니다.
만약 제작진이 없었다면 아저씨는 언제까지 그 고생을 하며 살았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아저씨는 제작진을 믿었습니다. 무엇을 믿었을까요? 제작진이 자신을 그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할 ‘능력’이 있음을 믿었고 또 제작진이 자신을 이용해 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도울 것이라는 ‘자비와 사랑’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움을 청하면서도 자기가 잘해서 도움을 받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저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도 수많은 핑계를 늘어놓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도와주면 자신이 그렇게 꾸준하게 청하고 말을 잘해서 도움을 얻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저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들의 능력으로 그것들을 얻어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더 자주, 더 많이 청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저는 그들에게 주는 도움을 멈춥니다. 그 도움이 그들에게 이익이 아니라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지은 죄를 주님께서 용서하실 수 없는 분으로 여겼습니다. 자신들이 잘해야 에덴동산에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려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에덴동산에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였습니다. 그러니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하는 말은 오로지 그분께만 ‘능력’이 있고 그분은 ‘자비’로운 분이라는 두 믿음의 본질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기도에는 주님의 능력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 들어가야 하기에 모든 기도의 바탕에는 주님께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끊임없는 호소가 동시에 들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다시 보고 달리 보고 달라지는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오늘 눈먼 이가 자비를 청하는데 자비의 내용은 다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도 다시 보게 되는 자비에 대해 묵상해봤습니다.
그러나 제가 다시 본다는 것은 복음의 눈먼 이와 다릅니다. 저는 그와 달리 눈먼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에 다시 보게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사람인데 전에는 이렇게 보다가 다르게 보게 될 때 이르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옷차림이 후줄근하고 초라하여 우습게 보았는데 선뜻 큰돈을 희사하는 것을 보면 다시 보게 되지요.
그러니까 그때부터 그가 달리 보이는 것인데, 그는 변한 것이 없고 나의 눈이 바뀐 겁니다.
첫째로 그것은 교만의 눈에서 겸손의 눈으로 나의 눈이 바뀜으로써 다시 보는 차원입니다. 교만한 사람의 눈은 남을 대체로 얕잡아 보고 심하면 무시하고 업신여깁니다.
사실 무시한다는 한자어나 업신여긴다는 우리말은 같은 뜻입니다. 무시(無視)한다는 말은 없을 無와 볼 視가 합쳐진 말이고, 업신여긴다는 말은 ‘없이 여긴다’는 말의 변형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말 다 엄연히 있어도 없다고 보거나 없이 여기는 것이니 얕잡아 보는 것 곧 나보다 낮게 보는 것보다 훨씬 잘못 보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미움의 눈이 사랑의 눈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미움의 눈으로 보면 그의 잘못만 보이는데 사랑의 눈으로 보면 그의 고통이 보입니다.
사랑을 하면 이해하려는 눈으로 보게 되고 그가 그런 것은 그가 큰 고통을 겪고 있어서 그런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르게 하면 그의 겉만 보지 않고 그의 안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보고자 하는 것은 이 정도가 아닙니다. 세상 것만 보던 눈이 신비도 보는 눈으로, 육의 눈으로만 보던 것이 영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는 것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땅만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을이 됐는데 단풍도 못 보고 한해가 지난 적도 있습니다.
땅만 보게 하는 육의 정신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러다가 그런 자신을 자각하고 하늘을 봐야겠다고 작정하면 그때부터 서서히 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늘 보던 것만 보지 않고 새로운 것을 보기 시작하고, 늘 보던 것을 보더라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될 것이고, 복음의 눈먼 이와 군중처럼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라고 오늘 복음이 얘기하듯 우리도 그것을 보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주님을 따르는 너와 내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끝없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합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간절히 청합니다. 귀로만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듣고 귀로 보아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삶의 수단으로 믿음의 옷을 입고 살지는 않습니다.
믿음이 곧 우리 삶의 의미이며 우리 삶의 목적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믿음의 삶이 빛나는 구원의 삶입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삶을 꿰뚫고 흐르는 것이 하느님의 자비이며 그 자비를 간절히 청하는 우리의 뜨거운 신앙입니다.
뜨겁지 않고서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이에게는 의사가 되어 주시고 길 잃은 이에게는 바른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다함이 없듯이 하느님을 향하는 우리의 믿음도 다함이 없습니다. 서로를 믿음으로 대하지 않고서는 서로를 기쁘게 볼 수 없습니다.
우리 존재에 대한 참모습을 보게 하는 것이 올바른 믿음의 빛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치유의 빛이며 모든 것을 새롭게 보게 하는 생명의 빛입니다. 주님, 믿음으로 제가 다시 새롭게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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