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하신 어머니, 찬미받으소서. 당신은 하늘과 땅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임금님을 낳으셨나이다.
주님,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를 영광스럽게 기념하며 공경하오니 저희가 그분의 전구로 주님께 풍성한 은총을 받게 하소서.
2023년 11월 21일 (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1월 2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즈카르야서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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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카 2장 14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즈카르야서 2,14-17)
딸 시온아, 즐거워하여라. 내가 이제 가서 머무르리라. - 오늘 복음
(마태오 12,46-50)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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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여라.
복음
마태오 12,46-50 장 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1월 21일 (화) 05:00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나종진 스테파노 신부
📌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소개 00:05
📌 미사시작 01:14
📌 강론시작 07:54
의정부 용현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21일 (화) 10:00
의정부 용현동성당
김유철 요한 보스코 신부
📌 미사시작 09:48
📌 강론시작 17:21
남양성모성지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21일 (화) 11:00
남양성모성지 미사
이상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 미사시작 38:53
📌 강론시작 49:34
팔로티회 실시간 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1월 21일 (화) 15:00
팔로티회 홍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27
📌 강론시작 08:30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1월 21일 (화) 16:00
팔로티회 분당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3:57
📌 미사시작 1:31:54
📌 강론시작 1:38:00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상우 바오로 신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에 대한 신심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에 대한 단서를 발견합니다.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실 때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방문합니다. 고대 근동 지방과 성경 전통에서 “형제”라는 말은 한 어머니의 자식들뿐 아니라 가까운 친족까지 포괄합니다.
이어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라고 서술하는데, 직역하면 ‘그러고서는 당신의 제자들 위로 당신의 손을 뻗으시며 또 이르셨다.’가 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과 말씀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이는 제자 공동체가 스승 예수님의 새로운 가정 공동체라는 신학적 의미로 풀이됩니다. 이 구절에서 ‘하느님’ 대신 ‘아버지’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제자 공동체가 지닌 가정으로서의 새로운 신원과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혈육으로 이루어진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만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이 구성된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이 부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포함한 친족에게 면박을 주시기보다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사명을 더욱 강조하시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이며 그분의 가정 공동체에 속합니다. 이 공동체의 본질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며, 이것이 곧 존재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고, 그 뜻을 삶에서 실천하도록 초대받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다정함’을 기억하자.
현재 인간의 종은 ‘호모 사피엔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생존 시기가 겹치는 다른 종도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바로 ‘네안데르탈인’입니다. 이들은 신체적으로 ‘호모 사피엔스’보다 아주 우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뇌 용량이 1.8리터로 1.4리터에 불과했던 ‘호모 사피엔스’보다 훨씬 컸습니다. 또한 매머드나 고래 등을 사냥할 수 있을 정도로 몸집도 컸지요. 이런 외적 조선을 보면, 멸종해야 할 종은 ‘네안데르탈인’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인 현 인류 종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멸종의 주인공이 바뀌었을까요?
‘호모 사피엔스’ 종이 남은 것은 ‘다정한 종’이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유력합니다. ‘다정함’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했고, 모든 어려움과 시련을 다정함으로 함께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우월한 ‘네안데르탈인’은 함께 하는 다정함이 없어서 멸종했다는 것입니다. 개개인으로는 뛰어나도 함께하지 못한다면 살아날 수 없음을 인류의 역사를 통해 알게 됩니다.
요즘의 사회를 보면, 현 인류 종인 ‘호모 사피엔스’의 고유 특징인 ‘다정함’이 점차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다 보니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많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늘어갑니다. 함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함께하는 중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는 ‘다정함’을 표현하는 것을 왜 어려워할까요?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밝은 미소를 짓는 것, 긍정적이고 희망의 말을 전하는 것, 남에 대한 배려가 담긴 행동을 하는 것 등은 일상 안에서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 종의 고유한 특성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를 힘들게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인간의 고유 특성을 잃어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멸종의 위기를 겪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은총을 가득히 채워주신 그 성령의 감도로 성모님께서 아기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시는 것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바로 아기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셨다는 것은 아기 때부터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모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아기 예수님을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받아들이지요. 그 어떤 인간보다도 커다란 ‘다정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정함이 하느님의 뜻도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다정함’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작은 호의를 다정함에 담아서 서로 주고받아야 하겠습니다. 삶의 품격을 지키면서 남은 생을 멋지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에는 한 가지 법칙밖에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 스탕달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녀의 봉헌은 새장의 문을 열어주는 것
오늘은 성모님께서 성전에 봉헌된 날입니다. 전통에 따르면 성모님은 세 살 때 요아킴과 안나에 의해 성전에 봉헌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16세 정도로 추정되는 나이에 결혼하기 전까지 성전에서 살았습니다.
하.사.시.에 의하면 당시 메시아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예언을 바탕으로 다윗의 후손 여인들을 성전에서 교육하며 키웠다고 합니다. 이때 가장 예쁠 나이의 귀여운 딸을 성전에 봉헌해야 하는 늙은 요아킴과 안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팔을 한쪽 잘라내는 것보다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유대인들의 전통은 아이들을 나의 것이 아닌 하느님 것으로 돌려드림으로써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도록 허락해야만 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태어나고 길러져서 부모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은혜에 보답하려 하기에 부모가 놓아주지 않으면 새장에 갇힌 새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새장에서는 나는 법을 배울 수 없고 나는 법을 배울 수 없다면 큰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괴물 대신 쓰레기로 2층까지 꽉 찬 트레시 홈’이란 영상이 올라왔습니다.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한 이층집이 온갖 쓰레기로 덮여 있는 것입니다. 주인 할머니 할아버지는 막내아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자 아들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모으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아들은 병원에 실려 가면서도 꼭 필요한 것들은 치우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부모는 착하지만,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는 아이를 긍정하면서 본인들도 병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성당에서는 이번 주 주일 교중미사에서 아이들 첫영성체와 견진성사를 동시에 진행합니다. 이때 특별 순서로 부모들이 자녀들을 제단에 봉헌하고 ‘요게벳의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요게벳은 모세의 어머니입니다. 누구든 이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려면 수많은 시련을 겪어야 합니다. 요게벳은 어쩔 수 없이 모세를 바구니에 넣어 나일강으로 떠내려 보냈습니다. 이것이 봉헌입니다.
바구니는 악어에게 먹힐 수도 있고 지나가는 배에 깔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파라오 공주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서 자라며 더 넓은 지식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참 소명을 깨닫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하는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만약 요게벳이 아이를 자기 품에만 안고 있으려 했다면 어땠을까요? 하느님께도, 모세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요게벳의 노래 가사를 살펴봅시다.
“작은 갈대 상자,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네.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흘러. 동그란 눈으로 엄마를 보고 있는 아이와 입을 맞추고, 상자를 덮고 강가에 띄우며 간절히 기도했겠지.
정처 없이 강물에 흔들흔들, 흘러 내려가는 그 상자를 보며, 눈을 감아도 보이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겠지.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참 부모이신 하느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맡긴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를 이끄시는 주, 하느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드린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흐르고 흘러.”
만약 이태석 신부님을 어머니가 말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태석 신부가 지금까지 쌓아 주님께 가져간 보화를 얻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태석 신부의 어머니는 이태석 신부를 진정으로 주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에서도 상을 받는 일이 될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에게 “너는 더 큰 세상으로 나갈 자격이 있다!”여야지, “우리가 있으니 우리 품 안에 있으면 안전해!”여서는 안 됩니다. 이는 자녀를 새 장 속의 새처럼 자신들 크기 안에 규정하는 일이지, 절대 자녀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이 세상이 아닌 천국에 살 수 있다는 자존감을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봉헌하여 은총 얻는
오늘은 성모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스스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날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다신 자신을 스스로 봉헌하신 것을 우리가 그리 대단하게 생각할 것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드님을 봉헌하신 분이 당신을 봉헌하신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성모님 성가 가운데 ‘아드님이 가신 길 함께 걸으셨네’라는 성가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가사처럼 성모님이 아드님과 함께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함께하셨지만 오늘 우리가 특별히 기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들을 위해 봉헌하신 것보다 우리를 위해 봉헌하신 점입니다.
아들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시는 것은 성모님이 아니어도 하는, 다시 말해서 다른 엄마들도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이 다른 엄마와 다른 것은 인류를 위해 봉헌하신 것이고, 그것은 아들 예수께서 인류를 위해 자신을 봉헌하신 것과 함께하신 거였지요.
그렇습니다. 아들 예수님의 봉헌은, 아버지 하느님께는 겟세마니에서 피땀을 뚝뚝 흘리는 순종의 봉헌이고 다른 한편 우리 인간을 위해서는 십자가 위에서 심장이 찔리어 피와 물을 쏟기까지 당신을 전부 내어 주시는 희생 제사의 봉헌입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봉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전해졌을 때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지라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의 봉헌이었고,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심장이 찔리신 것을 아들을 성전에서 봉헌하실 때 당신 심장도 미리 꿰 찔리시며 아들을 인류를 위해 내어 주신 봉헌이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아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전부 내어 주신 것이고, 어머니 마리아는 당신 아들을 몽땅 우리 인간에게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기념하는 오늘 미사의 봉헌기도는 이렇게 축원합니다.
“주님, 주님 백성의 기도와 희생제물을 받으시고 성자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봉헌하여 은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시고, 청원하여 응답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소서.”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는 오늘 복음 말씀에 근거하여 이렇게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 우리는 그분의 형제들입니다. 우리가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지니고 우리의 마음과 몸에 그분을 모시고 다닐 때 우리는 어머니들입니다. 표양으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
성모님이 자신을 봉헌하여 아드님을 잉태하는 어머니가 되셨다면 우리는 자신을 봉헌하여 말씀을 잉태하는 어머니가 되라는 권고인데, 이렇게 봉헌하면 은총을 받지 못하는 이가 없을 거라고 오늘 봉헌송은 노래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똑같은 일상이지만 봉헌의 마음은 다릅니다. 생활과 봉헌은 떼어놓을 수 없는 한 몸입니다. 우리자신으로 시작되는 봉헌입니다. 하느님의 깊은 체험으로 이끄는 것이 우리자신의 봉헌입니다.
열린 마음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바로 봉헌입니다. 봉헌은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활짝 열어줍니다. 타인들의 추켜줌과 깔봄에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며 어떤 심적인 그림자의 작용에도 냉철하게 우리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봉헌의 삶입니다.
봉헌의 생활은 이와 같이 외적인 것에 조종당하는 꼭두각시놀음과 외적인 신앙에만 머물러 있는 껍데기 신앙에서 우리자신이 나오는 것이 봉헌의 삶입니다. 이렇듯 가장 아름다운 말씀의 실행은 우리자신을 기꺼이 하느님께 봉헌하는 봉헌의 여정을 우리가 성모님과 함께 기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기쁨의 봉헌은 오염된 우리 마음을 정화하여 줍니다. 밝은 빛으로 나가는 것이 봉헌입니다. 봉헌으로 삶에서 겪게되는 시련과 역경 고통과 실패가 하느님의 선물이 됩니다. 삶이 선물이고 십자가가 은총인 것은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봉헌이 있기 때문입니다.
봉헌이 맑아지면 삶도 맑아집니다. 마음 쓰는 법이 봉헌입니다. 봉헌의 영성이 성모님의 영성입니다. 바깥만 보지 말고 마음을 먼저 보라고 봉헌의 삶이 있습니다. 봉헌은 십자가로 이어지고 부활로 꽃을 피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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