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주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시어 언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2023년 11월 23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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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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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날에 나를 불러라. 나는 너를 구해 주고 너는 나를 공경하리라. (시편 5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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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0장 15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마카베오기 상권 2,15-29)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 오늘 복음
(루카 19,41-44)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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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루카복음
19장 41-44절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1월 23일 (목) 05:00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최정열 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8:26
의정부 용현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23일 (목) 10:00
의정부 용현동성당
김유철 요한 보스코 신부
📌 미사시작 13:10
📌 강론시작 22:28
남양성모성지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23일 (목) 11:00
남양성모성지 미사
이상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 미사시작 38:36
📌 강론시작 46:22
팔로티회 실시간 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1월 23일 (목) 15:00
팔로티회 홍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13
📌 강론시작 07:49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1월 23일 (목) 16:00
팔로티회 분당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0:02
📌 미사시작 1:27:15
📌 강론시작 1:35:28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상우 바오로 신부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읍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 시대에 유다교의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 중심축이었습니다. 유다 백성에게 신앙생활의 정점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기원후 70년 무렵 로마군에게 함락되자 그들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절망감과 위기감에 휩싸입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가톨릭 교회에서 구약이라고 부르는 성경에 자신들 삶과 종교의 중심점을 새로 잡으며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다시 정립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깊이 있게 공부하였고, 새로이 겪게 될 위기와 절망과 고통의 순간들을 극복하여 나아갈 힘을 성경에서 찾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메시아 구세주 그리스도이신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 유다인들을 향하여, 특히 그들을 대표하는 상징물인 예루살렘 성읍을 향하여 눈물 흘리시며 통탄하여 마지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유다인들은 오늘날까지도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위기의 순간에 그것을 지혜롭게 이겨 내는 용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절망과 고통의 순간에 자신의 십자가를 예수님과 함께 지고 걸어가는 믿음입니다.
삶의 무게에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오늘을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준비로 채워 나가려면, 일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암 걸린 사람이 다리 잘린 사람을 만났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다행이다. 다리가 있어서.”
다리 잘린 사람이 암 걸린 사람을 만났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다행이다. 암이 아니라서.”
각자 다행이어서 참 다행이다.(박미경, ‘생각이 달라도 괜찮아.’)
작가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모두가 ‘다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닐까요? 그런데 ‘다행이다’라는 말보다, ‘희망이 없어, 끝장이야.’ 등의 부정적인 말을 쏟아낼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이는 주변 사람을 주의깊게 바라보고, 나의 환경을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등의 긍정적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행복할까요? 희망이 없다고, 절망적이라면서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만 바라봐야 할까요? 아니면 ‘다행이다, 감사하다’를 외치면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환하게 웃어야 할까요?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면서, “오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한 거룩한 도성을 보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참 평화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멈추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한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그런 안타까움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희망을 보지 않고 절망과 좌절로 고개를 숙이고만 있다면, 그런 모습에서 평화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다행이다, 감사하다고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평화의 주님, 희망의 주님, 사랑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기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싸움을 자제하는 것이 싸움에서 빠져나오기보다 쉽다.
- 세네카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당신을 죽이고 결국엔 자신마저 멸망하게 될 이스라엘의 운명을 미리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세상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는 게 돈이나 명예, 맛있고 풍부한 음식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게 있습니다. 바로 ‘외로움’입니다. 외로운 이들은 이 지상에서 인간과 관계가 안 되기 때문에 지하의 마귀와 관계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들에게 뜯어먹히는 참 지옥을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하며 살게 됩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도둑을 피해 6년째 거리로 나온 여자, 그 뒤 숨겨진 사연’이 나왔습니다. 연세가 지긋한 이 자매는 집에 있는 고양이와 물품들을 가지고 집 밖으로 나와 이틀에 많으면 닷새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고 노숙합니다. 그 이유는 집에 도둑이 들기 때문이랍니다. 물론 조현병 증세로 피해망상에 걸린 것입니다.
그녀가 이렇게 된 이유는 바로 아버지,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히 어머니 혼자 힘겹게 자신을 키웠는데, 세상은 어머니에게 일자리도 주지 않았습니다. 학생 때는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머리가 똑똑했던 자매이지만, 그렇게 어머니를 떠나보내야만 했던 세상을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집에 도둑으로 들어온다고 믿는 것은 바로 세상입니다. 세상이 자신을 비웃고 세상이 자신의 것을 훔쳐 간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세상에 속할 수 없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지하의 것들과 친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하의 것들과 친하다면 세상에는 속할 수 없습니다. 만약 내가 누군가와 말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고양이하고만 말하고 있다면 나는 ‘내가 고양이보다 못한 존재인가?’라는 생각으로 무시당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미 세상에 대한 신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SBS 제작진은 그분에게 대화할 수 있는 봉사자들을 붙여주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업무적으로 그 자매와 이야기했지만, 자매는 호전되었습니다. 이런 분들만 있으면 자신의 병이 진작 나았을 것이라 합니다. 자신의 병이 무엇인지도 압니다. 바로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소속감을 느끼지 못할 때 인간은 스스로 무너집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바라보는 예루살렘의 미래였습니다.
예수님은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려 오신 분입니다. 병아리가 암탉을 물리치고 죽이면 그들에게 평화를 누가 줄 수 있을까요?
‘EBSCulture’에서 ‘두 팔이 감전 사고로 절단되었음에도 홀로 아이 넷을 키워내며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는 아빠와 그런 아빠를 존경하는 아이들’이란 내용도 유튜브에 올라와 있습니다. 아버지는 두 팔이 없지만, 4남매를 열심히 키웁니다. 아이들은 비록 어머니가 없지만, 그런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가족들이 둘러앉아 삼겹살을 궈 먹는 모습은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속감’입니다. 평화의 반대는 불안입니다. 이 불안은 생존에 대한 걱정입니다. 이 걱정은 자신을 창조한 누군가의 사랑을 느낄 때만 해결됩니다. 사춘기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들을 창조하지 않은 것을 알기에 부모에게 저항하는 것입니다. 느껴야 할 평화를 더는 부모에게서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아이들을 하느님 품에 봉헌해야 합니다. 그 평화가 아이들을 무너지지 않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유일한 손, 곧 예수님의 구멍 뚫린 손안으로 안기며 이렇게 말합시다.
“나는 나에게 평화를 주는 것을 찾았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선택적 무지
오늘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십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얼마 가지 않아 파괴될 텐데 그것을 모르고 천하태평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모름을 꼬집으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이 모름을 묵상하며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제가 잘 아는 분이 당신 아들을 한번 만나달라고 부탁합니다. 자기 아들이 술과 마약과 게임 중독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한번 만나달라는 것이었고 그래서 간신히 시간을 내어 방문했는데 그분의 아들은 언제 오라고 했냐며 저를 박대합니다.
그때 제가 겸손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런 그가 밉거나 그에게 화가 나지 않을 것이고 오늘 주님처럼 그를 보고서 애처로워할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주님은 그 당시 평화의 길을 모르는 예루살렘이 애처롭고, 평화의 길을 알려주려 오신 당신을 몰라보는 예루살렘이 애처롭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평화의 길을 모르고, 아직도 평화를 가르쳐주신 예수님이 주님임을 거부합니다.
공존하려고 하지 않고
공동선을 추구하지 않고,
형제를 적으로 만듭니다.
지금의 전쟁은 하마스가 미사일 공격을 함으로써 시작되었지만 그들이 왜 공격했겠습니까? 공존하고자 했는데도 그랬겠습니까?
사실은 팔레스타인이 이미 오랫동안 살고 있던 곳에 이스라엘이 들어가 나라를 세우면서 분쟁의 씨앗이 심어진 것이기에 정의로운 족속이라면 그곳에 들어가 살게 된 것이 미안해야 정상이며, 같이 사는 길을 찾았어야 했는데 몰아내려 하고 박해하였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하느님의 선민이라면 공동선을 추구하고, 하느님의 선을 나눴어야 했는데 잘못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하느님의 선을 독점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의 유산을 형제들이 골고루 나눠 가져야 하는데 형이라는 자가 부모의 유산을 다 차지하려고 하는 것과 같지요. 이들의 이런 잘못된 의식은 예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슬기롭고 충성스러운 집사여야 하고, 도조를 잘 내는 소작인들이어야 하며, 미나를 잘 바치는 종들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나무라고, 그래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될 거라고 예수께서 나무라자 오히려 ‘저자가 상속자다.’하며 하느님 아들마저 죽이려 하고 있지요.
이 예수가 또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고 그 외에는 모두가 형제들이라고 하자, 다시 말해서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권력자나 힘없는 자나, 이스라엘 사람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한 아버지의 형제들이라고 하자, 이들은 그런 예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며 죽이려 하고 있지요.
아무튼 그들은 주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데, 제 생각에 그 무지는 선택적 무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알고 싶지 않은 무지입니다. 그리고 알고 싶지 않은 것은 하느님 아들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면 인정해야 하고, 인정하면 따라야 하는데 그러면 자기들의 기득권을 다 내려놔야 하기에 모르는 채 살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도 선택적 무지의 잘못을 많이 범합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채 살려는 무지 말입니다. 또한 모르고 살면 편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선택된 무지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똑같이 우리를 비춥니다. 잠들어 있는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는 평화입니다. 올바른 사람의 길이 평화입니다. 그 평화의 길을 예수님께서 걸어가십니다.
사람과 사람이 나누며 함께하는 자리가 바로 평화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평화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평화의 요구는 높지만 평화의 실천은 요원합니다. 올바른 관계의 실천이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으로 평화를 만들어가십니다. 단 한 번도 진정한 평화를 누려본 적이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때를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단절이 아니라 혼돈이 아니라 무지가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와의 올바른 관계, 사랑입니다.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사랑의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가장 좋은 평화를 잃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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