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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11/13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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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2023년 11월 13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1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라. (필리피서 2,15-16)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라. (필리피서 2,15-16) 성경말씀카드 필리피서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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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피서 2장 15-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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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지혜 1,1-7)
    지혜는 다정한 영이고, 주님의 영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

  • 오늘 복음
    (루카 17,1-6)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1월 13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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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라.

 

 

루카복음
17장 1-6절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1월 13일 (월) 05:00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동완 니콜라오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29

 

 

 

의정부 용현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13일 (월) 10:00
의정부 용현동성당
이충열 티토 신부

 

📌 미사시작 12:19

📌 강론시작 20:18

 

 

 

팔로티회 실시간 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1월 13일 (월) 15:00
팔로티회 홍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0:17

📌 강론시작 09:00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1월 13일 (월) 16:00
팔로티회 분당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 성체조배 0:01:24

📌 미사시작 1:31:20

📌 강론시작 1:39:16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상우 바오로 신부

 

공동체 생활의 세 가지 조건

 

오늘 복음은 공동체 생활에 관한 예수님의 세 가지 말씀을 소개합니다.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는 경고, 형제의 죄를 몇 번이고 용서하라는 권고, 믿음의 힘에 관한 말씀입니다.

첫 번째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이 됩니다. 스스로 죄를 짓는 것도 문제지만 권모술수로 형제를 구원의 길 위에서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입니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만큼 형제를 죄짓게 하는 행위가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 강조하시는 대목입니다.

두 번째로,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라는 권고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일곱 번만 용서하면 된다는 가르침이라기보다, ‘완성’을 나타내는 숫자 ‘일곱’이 드러내듯 회개하는 형제를 제한 없이 용서하라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힘에 관하여 역설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돌무화과나무는 상대적으로 웅장합니다. 그만큼 작은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그 믿음으로 공동체 안에서 큰일을 실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도 여러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가정 공동체, 직장 공동체, 본당 공동체가 구원의 길 위에서 바로 서도록 예수님의 세 가지 말씀을 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인생은 결국 사랑이 살린다.

 

괴테 연구가 전영애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람을 마지막 실족에서 물러서게 하는 것. 마지막 걸음을 못 내딛게 뒤로 불러들이는 것, 이게 유년 시절 사랑의 기억이거든요. 얘들은 많이 사랑해 줘야 합니다. 어렸을 때 받았던 그 절대적인 사랑은 어디가지 않거든요. 그게 몸에 남아 있어서 그 힘으로 사는 것 같아요.” 
 
괴테는 죽기 2년 전에 인생은 결국 ‘사랑이 살린다’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사랑은 지금 삶에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열쇠가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실천하는 사랑의 크기는 어마어마합니다. 더군다나 이 사랑의 확장성은 대단합니다. 나만이 아닌 우리가 지금 삶을 잘 살게 해주고,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함께 갈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도 사랑할 수 없는 이유만 찾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아이가 너무 예쁩니다. 이렇게 예쁜 아이도 때로는 무례한 말과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과 행동을 해도 여전히 예쁩니다. 신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아이들을 교육의 대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이때 아이들은 그렇게 예뻐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다 예쁩니다. 예쁘니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사랑의 기억을 많이 남겨 주고 싶습니다. 사랑받은 아이가 또 사랑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 사랑의 극치가 바로 용서입니다. 자기에게 잘한 사람에게는 누구나 잘합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사랑으로 다가서기란 쉽지 않지요. 그 모범을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모두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만이 우리 공동체가 하나 될 수 있으며, 사랑만이 우리가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갖고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세상 속에 살면서 무조건 용서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래서 주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주님께 대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불가능한 일이 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행복이란 자신에 국한되지 않은 다른 무언가를 사랑하는 데에서 싹트는 것이다.

- 윌리엄 조지 조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용서에 믿음이 끼어드는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라고 하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가장 큰 일은 무엇일까요? 미운 감정이 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에 미운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라고 하십니다. 

그렇더라도 이 지상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용서를 배우는 일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를 청하는 사람이 있다면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믿음’의 역할이 강조됩니다. 사도들은 용서 이야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용서를 하려고 해도 잘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해도 잘 안되는 예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믿음의 역할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삼례 나라슈퍼 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주목할 만한 잘못된 처벌의 사례 중 하나로 꼽힙니다. 1999년 9월 28일,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의 나라슈퍼에서 할머니 한 분이 살해되었습니다. 조카 부부와 어린아이도 있었는데 그들에겐 눈을 가리고 위협만 하고 상해를 입히지는 않았습니다. 

경찰은 가까운 곳에서 찾아낸 세 명의 용의자를 범인으로 몰아갔고 심한 고문과 가혹행위를 이기지 못한 청년들은 자기들이 범인이라고 허위 자백을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양심의 가책으로 진범 세 명이 자수하였지만, 경찰과 검찰, 그리고 판사는 그들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진행된 것을 번복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다 복역을 마치고 공소시효도 지난 시점에서 한 진범이 악몽에 시달려 자수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용서하지도 않는데 자신이 그러면 뭐 하겠느냐며 다시 그 말을 번복했습니다. 그래서 변호사는 당시 아이 엄마였던 최성자 씨에게 할머니를 살해한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최성자 씨는 망설였습니다.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최성자 씨는 스무 살이 된 아들에게 할머니가 그때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말을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강도가 들어올 때 아들은 다행히 잠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 아들을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서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했어야지!”, 곧 재심을 도와주었어야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최성자 씨는 여기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그동안 아이에게 피해가 갈 줄 알고 용서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 용서가 아이에게 오히려 인정받는 행위임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해자를 만나서 용서해주었고 가해자는 그것에 힘입어 증언하여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세 명의 누명을 풀어주었고 나라로부터도 보상받게 했습니다. 

용서는 사실 나의 죽음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보상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용서의 십자가를 지면 부활의 기쁨을 준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다면 못 할 게 없다는 것입니다. 고통은 쓰지만 그 열매는 반드시 달다는 것만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이뤄내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최성자 씨는 아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그 부활의 기쁨이었습니다. 

에바 모제스 코어(Eva Mozes Kor)는 악명 높은 나치 전범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에 의해 자행된 실험의 생존자였습니다. 멩겔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쌍둥이에 대한 잔인한 의학 실험을 실시했고, 코어와 그녀의 쌍둥이 자매 미리암은 그의 실험 대상이었습니다. 에바 코어는 수십 년 동안 요제프 멩겔레에 대한 깊은 증오와 분노를 품고 살았습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멩겔레의 실험으로 인한 고통과 트라우마로 얼룩졌고, 그 기억은 그녀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그녀의 쌍둥이 자매 미리암도 실험으로 인한 건강 문제로 고통받았고, 이로 인해 코어의 분노는 더욱 굳어졌습니다.

코어가 용서하기로 한 것은 1995년, 아우슈비츠 해방 50주년 기념식이 있기 전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과 자매가 겪은 고통에 대한 멩겔레의 인정과 사과를 원했지만, 그는 이미 사망한 후였습니다. 그러나 코어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내면의 평화를 찾기 위해 용서라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용서하기로 한 코어는 용서의 선언문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이 선언문을 통해 멩겔레에게 자신이 느낀 모든 고통과 분노를 용서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행위는 그녀에게 적극적인 선택이었으며, 그녀는 용서를 자신의 힘을 되찾는 행위로 보았습니다. 그녀는 용서를 통해 멩겔레가 그녀의 삶에 더 이상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녀 자신을 그녀의 과거로부터 해방하기를 원했습니다.

용서의 선언은 에바 코어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녀는 이 용서를 통해 해방감을 느꼈고, 증오와 분노의 감정에서 벗어나 내면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선택이 자유를 의미한다고 느꼈으며, 더 이상 희생자로 정의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코어는 이러한 용서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녀는 나머지 생애를 교육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바쳤습니다.

만약 용서를 통한 평화를 믿었다면 50년 동안 미움과 증오로 살며 고통을 겪지 않았어도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십자가에는 부활이 있음을 믿고 십자가를 져 봐야 합니다. 손해를 볼 게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뒤에 오는 부활의 기쁨을 자주 체험하다 보면 내가 하느님의 뜻을 위해 죽는다는 그 믿음이 확고하게 자리함으로써 참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용기내어 꾸짖으라고 하시는데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오늘 복음은 죄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남을 죄짓게 하는 나의 죄와 나에게 지은 남의 죄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가르침을 보면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두 가지를 말씀하시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보통 남이 내게 죄를 지었을 경우 그 죄를 용서하는 것만 생각하거나 거기에 초점을 두는 것이 보통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용서하기 전에 꾸짖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시고 남이 내게 지은 죄를 꾸짖기 전에 내가 그에게 지은 죄를 보려고 하는데 그것 말고도 남을 죄짓게 하는 나의 죄에 대해서도 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직접 지은 죄에 대해서만 반성하기 쉽습니다. 아니 그것조차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아채더라도 인정하려고 들지 않기에 그것을 알아채고 인정하는 것만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겨우 애씁니다. 

그런데 부지불식간에 남을 죄짓게 하는 죄도 있으니 그 죄도 놓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저는 두 단어 ‘부지불식간에’와 ‘조심’에 대해 유의합니다. ‘부지불식간에’란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않는 사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내가 무심코 한 말이 남을 죄짓게 한다는 것을 모르고, 내 행위가 남을 죄짓게 하는 죄라는 것을 아예 모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조심하라는 것인데 조심(操心)이란 방심(放心)의 반대말로서 ‘操’자가 ‘잡다’ 또는 ‘쥐다’는 뜻이니, 방심하지 않고 곧 마음을 놓지 않고 마음을 다잡거나 꽉 움켜쥔다는 뜻이지요. 아무튼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남을 죄짓게 할 수 있음에 대해 방심하지 말고 조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용서 못지않게 꾸짖는 것도 해야 하고 잘해야 합니다. 사실 용서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꾸짖는 것이 실은 더 쉽지 않고, 잘 꾸짖는 것은 더 쉽지 않기에 우리는 꾸짖지 않으려고 하기 쉽습니다. 

더욱이 나도 죄를 짓는 놈인데 하는 생각이 들면 주님 말씀처럼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를 빼주려는 것만 같겠지요. 그렇기에 우리가 남의 죄를 감히 꾸짖기 위해서는 겸손과 사랑에서 비롯된 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용서하는 것보다 꾸짖는 것이 더 어렵고 그래서 어쩌면 더 큰 사랑이고 그래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실 용서하는 것은 용기를 낼 필요까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꾸짖는 것은 용기를 내야 하고 반드시 겸손과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많은 기도 뒤에 꾸짖어야 할 것입니다.  그에 대한 사랑이 내 마음 안에 차오르도록 기도하고, 내가 꾸짖거나 충고할 때 그가 받아들일 마음이 생기도록 기도한 뒤에. 

이런 준비를 거쳐서 잘 꾸짖는 사람은 용서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고, 용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용서는 이미 이루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꾸짖으라고 하셔도 저는 감히 꾸짖을 사람은 못되고 충고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용감히 꾸짖으라시는데 저는 감히 그러지 못하겠다는 오늘 저입니다. 사랑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가을도 가을을 껴안으며 늦가을로 깊어집니다. 용서와 회개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용서와 회개입니다. 회개와 사람 사람과 용서는 가장 아름다운 우리들의 사랑법입니다. 비로소 사람이 보일때 더 뜨겁게 하느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용서는 우리자신의 본모습을 되찾게합니다. 그러기에 용서는 우리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사랑이며 가장 많이 하느님의 사랑을 닮아 있습니다. 용서의 시작과 용서의 끝 이 모든 여정과 함께하시는 용서의 하느님이 계십니다. 

회개가 자라는 만큼 사랑도 깊어집니다. 고통을 모르면 슬픔을 모르면 우리는 결코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길을 우리들에게 몸소 보여주십니다. 길이 없으면 갈 수 없지만 길이 있기에 우리는 갈 수 있습니다. 

회개와 용서는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게하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용서는 하느님을 향한 가장 좋은 믿음의 영역입니다. 기도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회개이며 용서입니다. 

회개와 용서로 이끄시는 하느님께 기도로 이 좋은 날을 맡겨드립니다. 가장 좋은 회개와 용서가 시작되었습니다. 회개와 용서가 하나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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