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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11/14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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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2023년 11월 14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1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루카 17,10)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루카 17,10) 성경말씀카드 루카복음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루카복음 17장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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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1월 14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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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루카복음
17장 7-10절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1월 14일 (화) 05:00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조태현 스테파노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15

 

 

 

의정부 용현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14일 (화) 10:00
의정부 용현동성당
이충열 티토 신부

 

📌 미사시작 14:12

📌 강론시작 22:25

 

 

 

남양성모성지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14일 (화) 11:00
남양성모성지 미사
이상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 미사시작 41:13

📌 강론시작 52:54

 

 

 

팔로티회 실시간 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1월 14일 (화) 15:00
팔로티회 홍천
장화기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2:30

📌 강론시작 12:04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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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4일 (화) 16:00
팔로티회 분당
야렉 카미엔스키 김석주 베드로 신부

 

📌 성체조배 0:00:28

📌 미사시작 1:31:33

📌 강론시작 1:40:3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상우 바오로 신부

 

봉사하는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봉사와 희생을 할 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세상의 기준에 따르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지배하고 내리누르며 무시하는 것이 낯설어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신분 제도가 있던 시대와 달리 종과 주인이 구분되지 않지만, 오히려 돈과 권력과 지위 같은 가치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갑과 을을 나눕니다. 

이러한 기준으로는 나보다 약한 사람을 아무렇게나 대하여도 상관없고, 자신의 욕구 불만이나 짓눌린 감정을 아무런 관련이 없는 힘없는 불특정 다수에게 분출하거나 화풀이하여도 괜찮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마르 10,45 참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도 그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스승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와 봉사와 희생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인정받거나 좋은 평가를 얻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거나 서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곧 겸손하게 섬기는 종의 자세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봉사와 희생은 우리 자신을 향하여 있습니까? 아니면 하느님을 향하여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공자의 논어를 읽어서, 읽기 전과 읽은 후나 그 인간이 똑같다면 구태여 읽을 필요가 없다.

 

성리학의 해설서라 할 수 있는 ‘근사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공자의 논어를 읽어서, 읽기 전과 읽은 후나 그 인간이 똑같다면 구태여 읽을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제게 책을 어떻게 읽느냐는 질문을 많이 하십니다. 정독이냐, 다독이냐, 일 년에 어느 정도의 책을 읽어야 하느냐 등을 물어보시지만, 근사록의 말처럼 1,000권을 읽어도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면 굳이 읽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책을 읽는 것 그 자체가 의미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책을 저자는 읽었을까요? 또 이 책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유의 시간을 가졌을까요? 따라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유능한 과외 선생님 한 분을 보시고 직접 교육을 받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과외 선생님이 바로 옆에 있다고 하더라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또 보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다면 굳이 돈 들여서 과외 선생님을 모실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이처럼 책을 읽는 것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면 오히려 책 읽는 것이 낭비일 수 있습니다. 
 
유능한 선생님도 학생이 따라오지 않으면 그 유능함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습니다. 즉, 학생의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여기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완벽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고, 또 하느님의 뜻을 계속 무시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개조시켜서 당신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만드실까요?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계속해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서 기회를 주실 뿐입니다. 따라서 변화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무슨 일인가를 했다고 해서 자기 자랑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주인이신 주님께는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했다고 주님께서 부귀영화를 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함 없는 분이 우리의 기도나 선행, 희생을 가지고서 무엇을 얻으시겠다는 것일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치 갓난아기가 환하게 웃는 것만으로도 그 부모가 큰 기쁨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랑으로 당신의 길을 따르기만을 원하실 뿐입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도 없고, 당연히 해야 할 일임을 기억하면서 자기의 변화를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면 됩니다. 그 결과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두 가지는 신뢰 그리고 믿음이다.

- 제임스 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왜 억지로라도 감사를 표현해야 할까? - 사람은 표현되는 자신을 믿는다.

 

오늘 복음은 ‘감사’에 관한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종의 비유가 나옵니다. 종이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돌아와 주인의 음식 시중을 들고는 이렇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9-10)

그리고 이어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신 내용이 이어집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 중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전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명뿐입니다. 곧 나중에 용서의 삶을 살게 되는 이는 그 한 사람뿐일 것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감사가 곧 믿음입니다. 믿음의 궁극적 대상은 내가 누구냐입니다. 내가 하느님께로부터 많은 능력을 받았다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능력을 발휘합니다. 믿는 대로 되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전에 제자들은 이렇게 청했습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믿음이 곧 능력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능력은 ‘용서’의 능력입니다. 용서할 수 있다고 믿어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

감사는 내가 은혜를 받은 것을 아는 능력입니다. 다시 말해 용서도 사랑인데 사랑은 받은 사람만 줄 수 있습니다. 아니 ‘받았다고 믿는 사람’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족력 멀미 때문에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는 사연이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섬에 사시는데 멀미 때문에 내륙으로 가지 못합니다. 배는 물론이요, 버스도 타지 못합니다. 그런데 내륙에 사는 큰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10년 동안 어머니를 보지 못했습니다. 버스 한 정거장도 가지 못하는 멀미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작진의 도움으로 수없이 멀미하면서 어머니를 만나러 갑니다. 그리고 10년 만에 어머니를 만납니다. 둘은 너무 행복한 시간을 갖습니다. 불효자를 용서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렇게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아들은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어머니를 뵈러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의료진이 동행하지 않아서 그 멀미를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2년 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묻히셨지만, 산소에도 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장례도 참석하지 못한 죄인이 된 것입니다. 

제작진은 다시 의료진을 대동해 아들을 도와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더는 멀미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하늘에서 도와주시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쨌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5년 만에 산소를 찾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두 번째 갈 때는 멀미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어머니가 하늘에서 기도해 주셔서 그렇다고 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한 번 다녀왔기 때문에 또 갈 수 있는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미 표현된 자신을 보게 된 것이고 믿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며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이미 감사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감사가 표현되고 그것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니 더 감동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자신은 어머니에게 감사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머니만큼 살 수 있습니다. 

억지로라도 감사한 것들을 찾아서 표현해야 합니다. 사람은 타인이 나에게 하는 말보다 내가 타인에게 표현하는 것을 더 믿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 일기’를 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감사 일기를 쓰며 우리 자신은 우리가 감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제야 진정한 믿음이 솟구칩니다. 내가 진정으로 감사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왜 억지로라도 감사를 표현해야 할까요? 아담과 하와는 본인이 감사하는 존재임을 믿지 못해 뱀에게 당했습니다. 우리는 표현되는 우리의 모습을 믿습니다. 감사하는 자체가 아니라 내가 감사하는 존재라고 믿게 되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 감사하는 대상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지혜롭게 하는 고통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과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오늘 지혜서를 보면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지혜로운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말에 혜안이라는 표현이 있고 그 사람은 혜안이 있다는 말도 있는데 혜안이라는 말이 바로 지혜의 눈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인도 사람의 미간과 부처님의 미간에 있는 점과 보석이 바로 이 혜안을 뜻하는 것인데 두 눈으로만 봐서는 안 되고 이 지혜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 그 안에 있습니다. 

실로 지혜의 눈을 가진 사람은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두 눈은 보이는 것만 보지만 지혜의 눈은 보이는 것 너머를 보고 꿰뚫어 보기 때문입니다. 

우선 어리석은 사람의 눈은 죽음밖에 볼 수 없지만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죽음 밖에 있는 생명을 보고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불사의 희망을 지닙니다.

이 얘기는 죽음의 안과 밖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안을 보면 죽음만 보이지만 죽음 밖을 보면 죽음이 아닌 생명도 보이는데 어리석은 사람의 눈은 죽음만 보고 죽음 밖은 볼 수 없지만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죽음 밖의 생명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 또는 시련을 보는 눈도 다릅니다.

역시 어리석은 사람의 눈은 고통을 시련으로만 보지만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고통을 단련으로 봅니다. 다시 말해서 시련은 고통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고통은 곧 불행이지만 단련은 고통이 우리를 단단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시련은 당하는데 비해 단련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련은 수동적인데 비해 단련은 능동적인 것이며, 설사 단련을 스스로 하지 않고 받더라도 의미를 알고 단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지혜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지혜와 영적인 지혜의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적인 지혜는 고통을 단련으로 보고 고통 안에서 증강(增强)의 씨앗, 곧 고통을 통해 더 강해지고 성장할 것이라는 것만을 본다면 영적인 지혜는 고통 너머에서 하느님을 보고 더 나아가서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단련시키는 하느님의 사랑까지 봅니다.

그래서 영적인 지혜를 지닌 사람은 용광로 속의 금처럼 불로 단련을 받아 하느님께 맞갖은 아들이 되고 하느님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라고 그것은 하느님께서 이들에게 은총과 자비를 주시기 때문이라고 오늘 지혜서는 얘기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지혜가 고통 속에서 하느님과 사랑과 행복을 보게 하는 면도 있지만 고통이 이런 지혜를 갖게 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호적인 측면, 곧 고통이 지혜롭게 하고 지혜가 고통을 사랑과 행복으로 보게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니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은 지혜를 얻기 힘들고, 영적인 지혜는 더더욱 얻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 지혜롭게 하는 고통이여!'라고 고백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한 자루의 촛불이 묵묵히 타오르며 환한 빛을 내뿜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우리의 스승이십니다. 우리가 교만하지 않다면 언제나 우리 옆에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보게 하시는 귀한 말씀이 우리 마음을 울립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조금 더 소유하려는 사람들과 조금 더 높이 오르려 하는 마음들로 가득한 우리들 삶입니다. 그래서 점점 하느님께로 멀어지는 삶이 되었습니다. 악감정을 갖고 살거나 악감정을 남기고서는 두 말할 나위없이 그 끝이 좋을 리 없습니다. 

우리들의 미성숙한 신앙 행태를 아프게 반성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삶을 사셨고 어떠한 가르침을 남기셨는지에는 통 관심이 없습니다. 실속 없고 헛된 자기과시의 태도를 이제는 버려야합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교만과 아집으로는 신앙의 길을 건강하게 걸어갈 수 없습니다. 올바른 마음으로 실천하는 길만이 우리 신앙인 본연의 자세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갈등과 미움이라는 대립의식을 벗어나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며 복음으로 살게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 말씀에 귀기울이는 소중한 오늘 되십시오. 종들의 본래 이름은 겸손과 겸허이기에 우리 또한 해야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머물렀다 가는 여정에 많은 마음들을 만납니다. 좋은 마음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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