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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11/12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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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2023년 11월 12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1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2주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지혜는 바래지 않고 늘 빛이 난다. (지혜 6,12)

 

지혜는 바래지 않고 늘 빛이 난다. (지혜 6,12)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지혜서 6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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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지혜서 6,12-16)
    지혜를 찾는 이들은 그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 제2독서
    (테살로니카1서 4,13-18)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25,1-13)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1월 12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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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리라.

 

 

마태오복음
25장 1-13절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1월 12일 (일) 05:00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조정래 시몬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5:38

 

 

 

의정부 용현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12일 (일) 10:00
의정부 용현동성당
이충열 티토 신부

 

📌 미사시작 08:37

📌 강론시작 19:58

 

 

 

남양성모성지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12일 (일) 11:00
남양성모성지 미사
이상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 미사시작 42:07

📌 강론시작 58:01

 

 

 

가톨릭스튜디오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12일 (일) 11:00
가톨릭스튜디오 미사
이병근 대건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2:08

📌 강론시작 18:45

 

 

 

팔로티회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12일 (일) 15:00
팔로티회 홍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0:11

📌 강론시작 09:11

 

 

 

성필립보생태마을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12일 (일) 17:00
성필립보생태마을 다볼사이버성당
홍대건 대건 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1:12

📌 강론시작 15:16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상우 바오로 신부

 

종말은 두려움이나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이번 주일 성경 말씀을 관통하는 주제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종말’입니다. 제1독서 지혜서의 저자는 지혜를 의인화합니다.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 

구약 전통에서 하느님 말씀인 ‘토라’(오경, 율법)는 후대에 ‘지혜’로 변경됩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던 유다인들의 전통이 ‘하느님-토라-지혜’ 순서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의인화된 지혜를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합니다(요한 1,1-18 참조). 참된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 뵙게 될 희망이 그리스도인의 종말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제2독서 테살로니카 1서에서 바오로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세상을 떠난 교우들 때문에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합니다. 이 위로 안에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종말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복음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열 처녀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종말은 정확히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닥쳐올지 모르니 늘 깨어 준비하라는 신앙의 권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종말은 두려움이나 공포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부활하신 뒤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영광스러운 순간을 기다리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재회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부모가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입니까?

 

부모가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입니까? 많은 부모는 자녀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 때라고 대답합니다. 
 
“아빠, 엄마 덕분에 행복해.” 
 
이 말을 들은 부모는 아이에게 아마 “아빠, 엄마도 너희 덕분에 행복해.”라고 말할 것입니다. 
 
자기 행복을 고백하는 말은 듣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고 합니다. 특히 부모 자녀 사이의 이 말은 안도감과 동시에 기쁨을 갖게 합니다. 부모 자녀는 일 촌 관계, 자신이 아닌 타인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타인’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서로 행복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부모가 가장 큰 충격을 받을 때는 “부모 때문에 불행하다”라는 말을 들을 때라고 합니다. 사실 완벽한 부모는 없습니다. 각종 육아 관련 방송을 보면 문제 있는 부모투성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방송에 나오는 부모와 달리 완벽한 부모일까요? 마찬가지로 부족함이 가득합니다. 이제 자녀는 어떨까요? 완벽한 자녀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부족함이 가득한 나약한 인간일 따름입니다. 부족한 부모와 부족한 자녀가 만나서 완벽한 사랑을 향해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긍정의 말, 사랑의 말, 행복의 말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만의 관계만이 아닙니다. 나의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말과 행동에 있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완벽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완벽한 사랑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삶이 우리에게 오실 주님을 마중할 준비가 됩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늘 깨어있으라고 하십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단순히 잠들어 있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열 처녀의 비유는 이 점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등과 함께 기름도 준비했지만, 어리석은 처녀는 등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등’은 혼인 잔치에 들어가도록 부름을 받았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기름’은 부름을 받은 이로 맡은 바 사명에 충실하며 깨어있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뜻을 늘 깨어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기름까지 충실히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상대방 때문에 행복하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이를 위해 사랑의 말과 행동은 필수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의 삶을 통해 오시는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명확한 목적이 있는 사람은 가장 험난한 길에서조차도 앞으로 나아가고, 아무런 목적이 없는 사람은 가장 순탄한 길에서조차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 토마스 칼라일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더 높은 기도 : 나는 기도가 기대되는가?

 

오늘 복음은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현명한 처녀들은 여분을 가지고 있었고 미련한 처녀들은 챙겨놓지 못했던 ‘기름’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입니다. 신학에서 “성령과 기름 부음은 동의어로 쓰일 정도”(『가톨릭교회교리서』 695)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붙은 등잔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령의 열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참포도나무에 접목시켜 주신 그분께서는 우리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23)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736) 주십니다. 

이것으로 미루어본다면, 미련한 처녀들은 사랑, 기쁨, 평화와 같은 감정들이 사그라졌을 때 성령을 받겠다고 기도하러 가는 사람을 의미하고,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감정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를 잘하는 신앙인을 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기도와 영성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기도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규칙적으로 하느냐’, ‘필요할 때만 하느냐’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막 달리기 경주할 때 선수들은 일정 걸음을 내디딘 후에는 반드시 물을 마신다고 합니다. 사막에서는 땀이 바로 증발해버리기 때문에 목마를 때만 물을 마신다면 탈수증으로 쓰러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탈수증에 쓰러진 선수들을 보면 물통에 물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마셔야 내 것이 됩니다. 만약 수험생 자녀를 위해 어떤 엄마가 100일 기도를 했다면 그 엄마는 영성이 높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필요할 때만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녀의 시험과 상관없이 매일 그렇게 기도할 수 있다면 그제야 ‘기름’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환경은 이렇게 기도의 수준이 높아지는 데 큰 방해를 주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만약 미사를 몇 번 했는지, 묵주기도를 몇 번 했는지 보고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이는 묵주기도에 천천히 젖어 드는 것을 방해하는 원인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복음 나누기 7단계’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3분 묵상하고 무슨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적어도 30분은 집중해서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묵상은 3분만 해도 된다고 여기게 만듭니다. 그리고 더욱 안 좋은 것은 기도가 ‘부담’이 되게 합니다. 

묵주기도를 더 많이 바치기 위해 빨리 바쳐야 하고 묵상 나누기를 위해 묵상한 것도 아닌 자기 생각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면 레지오도 힘들어지고 소공동체 모임도 부담스러워 나가지 않게 됩니다. 

만약 기도가 행복한 것이라면 남이 시키지 않아도 혼자서 꾸준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 큰형은 한때 매일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가위에 눌렸고 심지어 악마에게 공격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귀신 잡는 해병대, 그리고도 수색대 조교였던 형은 자존심상 주님께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느 날은 성호를 긋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날은 오랜만에 편히 잠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다음 날도 성호를 긋고 잤습니다. 그런 습관이 수십 년이 지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형은 이제 성호경을 제대로 긋는 기도의 수준에 오른 것입니다. 이렇게 영성을 높여갈 수 있습니다. 

 가끔 자기를 키우던 가족이 먼저 죽자 반려견이 매일 무덤에 와서 슬퍼하다가 돌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반려견이 주인을 사랑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한 번 왔다가 다시는 안 온다면 이는 그저 자기 위로일 뿐입니다. 그러나 매일 같은 시간에 온다면 정말 그분과 그분한테서 나오는 사랑이 그리워 오는 것입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살기가 싫다는 한 자매에게 저는 매일 한 시간씩 성체조배를 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20~30%만 꾸준히 실천합니다. 그 자매도 매일 성체조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1년 동안 꾸준히 그렇게 한 이유를 물었더니, 남편이 아닌 자신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남편이 밉지 않고 며칠 만에 집에 돌아와도 밥을 차려주고 이부자리를 마련해준다고 합니다. 미워할 때보다 기도할 때 행복하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자매는 성체조배 한 시간 할 정도로 영성이 높아진 것이고 그렇게 현명한 처녀로 인정받게 됩니다.

사실 기도는 힘이 드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봉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꾸준히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좋은 열매가 맺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매일 새벽 만나를 거두러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불시의 하느님

 

저는 오늘 질문으로 강론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엄마가 자녀의 사랑을 더 원할까요? 자녀가 엄마의 사랑을 더 원할까요? 

하느님이 우리의 사랑을 더 갈망하실까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더 갈망할까요? 

엄마와 하느님이 더 원하고 갈망하시는데 그것은 더 큰 사랑이 더 원하고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갈망을 기준으로 하면 이렇게 되는데, 필요를 기준으로 하면 어떻게 될까요? 

엄마가 자녀의 사랑을 더 필요로 하지 않고 자녀가 엄마의 사랑이 더 필요로 하고, 하느님에게 우리 사랑이 더 필요치 않고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더 필요하지요. 

이와 관련하여 연중시기 감사송은 이렇게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아버지께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도움이 되나이다.” 

그렇지요. 엄마의 사랑이 없으면 곧 엄마가 밥해주지 않고 빨래해주지 않고 학교 보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엄마의 사랑이 더 필요한데 그런데도 자식은 종종 엄마의 사랑은 무시하며 애인의 사랑을 더 갈망합니다. 

이것이 오늘 연중 제32주일이 얘기하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연중 제32주일은 우리에게 두 가지 지혜에 관해 얘기합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사랑이 더 간절하기에 우리가 하느님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고, 집에서 이미 문 앞에 와 계신 하느님을 기다리면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독서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를 찾아오는 더 큰 사랑을 앉아 만나지 않고, 오히려 사랑이 작기에 찾아오지 않는 사랑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닙니다. 

늘 가까이 있는 엄마의 더 큰 사랑은 제쳐놓고 엄마보다 훨씬 보잘것없는 다른 사랑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늘 가까이 계시고 우리 자신보다 더 가까이 계신 하느님 사랑은 놔두고 멀리 있고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찌질한 사랑을 찾아 방황합니다. 

시편과 신명기의 주님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당신을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신다.”(시편 145, 18)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신명 4,7) 

그러므로 위대한 족속은 우리 이웃보다 가까이 계시는, 아니 나 자신보다도 더 가까이 계시는 위대한 하느님을 알아보고, 태양으로 계시는 하느님, 바람결에 다가오시는 하느님,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처럼 널브러져 있는 하느님을 알아봅니다. 

다음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복음의 비유에서 얘기하는 슬기로운 처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찾아오시어 거리와 장소적으로 가까이 계시는 분일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언제고 찾아오시는 분이시고 그래서 불시에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저는 불시에 오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불시(不時)란 말이 어떤 뜻입니까? 때가 아닌 때라는 말이고 내 때가 아닌 때라는 말이 아닙니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오시지만 그때가 내가 정한 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오십니다. 그 하느님의 때에 늘 그리고 언제나 준비하고 깨어 있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라고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이 땅에서 꽃이 피고 이 땅에서 뜨거운 가슴이 나누어지는 복음이 됩니다. 사람이란 아는 것만큼 행하고 행하는 만큼 알게 됩니다. 이렇듯 앎과 행위 믿음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복음입니다. 사제와 평신도들은 함께 주님을 맞이하고 함께 믿음을 지켜나가야 할 신앙의 주체들이며 신앙의 기쁨입니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작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최소한 공동체 구성원 우리만이라도 서로 화합하여 반목하지 않는 것이 조화로운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라 믿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 신앙의 참된 실천의 장(場)이 됩니다. 올바른 신앙의 실천인 기도와 봉사야말로 그림자를 빛으로 바꾸는 은총이 됩니다.

부정적인 마음의 습관들이 이제부터는 바뀌어 진실되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 공동체는 소유를 나누고 재능을 나누어 서로를 돕는 것이 신앙 공동체의 본질이며 정신입니다. 그래서 실천하는 공동체의 주역은 다름 아닌 평신도 분들입니다. 한분 한분은 모두와 함께 연결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성전입니다.

가톨릭은 널리 두루 미치고 모든 것에 공통되는 보편의 종교입니다. 이 땅의 역사적 사회적 실천의 주역들은 복음과 결합되었던 평신도 분들이었습니다. 이웃형제들을 생각하고 봉사하고 기도하는 마음이 한마음이 되게합니다. 이렇듯이 예수님의 참 모습과 참 뜻은 사제와 평신도들을 통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뜨거운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평신도 분들의 진실한 뜻과 진실한 실천은 우리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오늘 은총의 주일이 우리가 누군지를 묻는 시간이기를 기도드립니다. 깊고도 소중한 기도는 서로를 향한 감사의 기도임을 깨닫는 평신도 주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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