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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11/08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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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합당히 섬기고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달려가게 하소서.

 

2023년 11월 8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1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7)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루카복음 14장 27절

오늘성경구절이미지_231108.jpg
444.6 kB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로마서 13,8-10)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4,25-33)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1월 8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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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너희는 행복하리니 하느님의 성령이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시리라.

 

 

루카복음
14장 25-33절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1월 8일 (수) 05:00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재인 스테파노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6:15

 

 

 

의정부 용현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8일 (수) 10:00
의정부 용현동성당
김유철 요한 보스코 신부

 

📌 미사시작 13:34

📌 강론시작 21:16

 

 

 

남양성모성지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8일 (수) 11:00
남양성모성지 미사
이상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 미사시작 41:31

📌 강론시작 49:09

 

 

 

팔로티회 실시간 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1월 8일 (수) 15:00
팔로티회 홍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09

📌 강론시작 06:30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1월 8일 (수) 16:00
팔로티회 분당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1:06

📌 미사시작 1:31:57

📌 강론시작 1:37:2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작은 공간과 짧은 시간 만들기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루카 복음 14장 26절에서 ‘미워하다’로 옮긴 그리스 말은 ‘선호하다’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 나를 선호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보통은 돌잔치 때 돌잡이를 합니다. 손에 무엇인가 쥐고 있는 어린아이는 그것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다른 것을 잡을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을 잡으려면 꽉 쥐고 있는 손을 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게 하려면 우리도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최소한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여야 합니다. 자기 의지나 생각이나 계획으로 가득 차 있다면 하느님께서 그 안에 머무르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며 주님으로, 예수님을 스승이며 구세주로 고백하면서 자기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남편, 형제와 자매, 자녀와 손주,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것들, 자신의 소유라고 여기는 것들, 그것을 버리면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들, 바로 그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작은 공간과 짧은 시간을 봉헌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참제자가 될 수 있으며 하느님께서도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도박처럼 불확실한 보상이 탐닉을 유발한다

 

미국 행동주의 심리학자 벌허스 프레더릭 스키너는 손잡이를 누르면 먹이가 나오는 ‘스키너 상자’ 안에 쥐를 가두고 네 가지 조건 중 어떤 조건에서 쥐가 손잡이를 더 많이 누르는지 실험했습니다. 
 
1) 손잡이를 누르는 것과 관계없이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먹이가 나온다. 
 
2) 손잡이를 누르는 것과 관계없이 불규칙한 시간 간격으로 먹이가 나온다. 
 
3) 손잡이를 누르면 반드시 먹이가 나온다. 
 
4) 손잡이를 누르면 불확실하게 먹이가 나온다. 
 
실험 결과에 의하면, 손잡이 누르는 횟수는 4, 3, 2, 1의 순서였습니다. 즉, 손잡이를 누르는 것은 먹이가 나오는 것과 관계있을 때 더 많이 눌렀습니다. 그런데 손잡이를 누르면 반드시 먹이가 나올 때보다는 불확실하게 먹이가 나올 때 더 많이 눌러댔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도박처럼 불확실한 보상이 탐닉을 유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보상에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착한 일 한 번에 한 번의 좋은 일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불공평하다며 또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의 악행에 대해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왜 보려고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의 보상은 불확실한 보상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을 부족한 인간의 존재에서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늘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부분은 하느님의 보상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집중하는 사람은 오늘 복음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라고 말씀하시지요. 사랑하라고 그토록 강조하셨던 예수님께서 왜 미워하라고 하실까요? 하느님 사랑을 첫째 자리에 두라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 사랑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미워한다는 말은 사랑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뒤로 돌리다’, ‘이차적으로 생각하다’라는 뜻의 표현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부조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어떤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위로받고 힘을 받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사랑에 집중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하는 것이 인생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합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다.

- 괴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도록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길을 가시다 당신을 따르는 군중을 돌아보시며 하신 말씀인데, 그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이런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데 군중이 뒤따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갑자기 돌아서서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따라오는데 왜 따라오느냐? 

나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 따라오느냐? 

그런데 네가 진정 내 제자가 되려면 너 자신과 네 가족을 미워해야 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만 한다. 

그럴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생각도 말고, 나를 따라오지 말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가족에게 돌아가라! 

그런데 주님께서 갑자기 돌아서서 이 말씀을 하시니 군중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리고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꼭 이렇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은 죽으러 가시고 아버지께 가시는 것이니 제자로서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그저 성지 순례나 단풍놀이 가는 것이 아니지요. 

주님을 성지 순례나 단풍놀이 인솔자로 따라간다면 자신과 가족을 미워할 필요도 없고 가족과 함께 희희낙락하며 가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러 가고, 하느님께 가고, 하늘나라로 가기에 이 세상을 애착하는 나와 떠나지 말라고 붙잡는 가족을 미워해야 하는 거지요. 

몇 차례 얘기한 바 있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러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가는 거지’ 하며 생각을 바꿉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죽음이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두렵지도 않고 어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되다가도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이것이 힘들고 이것이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더 사랑하는 하느님과 함께 있게 되는 것이고, 죽어도 하느님 사랑 안에 사랑하는 사람들도 함께 있을 거라는 통공의 교리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이 두려움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11월 위령 성월이 이 통공의 교리에 대한 믿음이 우리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게 하는 성월이 되도록 한 달을 거룩히 살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계절이 바뀌듯 우리의 삶도 가로질러 드디어 산을 넘습니다. 산을 넘어가듯이 넘어가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삶과 죽음의 허허로운 여정입니다. 잠시 들렀다 가는 우리네 인생길입니다.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마저 내려놓고 하느님께로 돌아갑니다. 버리지 않고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소유를 다 버리는 행위가 바로 하느님을 믿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소유에서 넘어지고 버림에서 다시 일어섭니다. 붙잡고 있는 것을 놓으니 하느님께서 손을 잡아주십니다. 하느님이심을 깨닫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버림과 비움이 필요한 우리들입니다. 버리지 않고서는 볼 수 없고 비우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만나게 되는 은총입니다. 

묶인 소유욕에서 우리를 풀어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들에 마음 빼앗기지 않습니다. 하느님마저 저울질했던 어리석은 교만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여정은 버림과 비움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버림과 비움으로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버림과 비움의 기도입니다. 버림과 비움으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단풍나무와 은행나무도 잎을 비우는 비움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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