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합당히 섬기고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달려가게 하소서.
2023년 11월 6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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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 (요한 8,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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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31-32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로마서 11,29-36)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4,12-14)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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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
루카복음
14장 12-14절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12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1월 6일 (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05시)
황대기 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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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티회 실시간 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1월 6일 (월)
팔로티회 홍천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0:13
📌 강론시작 09:46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1월 6일 (월)
팔로티회 분당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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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용현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6일 (월)
의정부 용현동성당 미사 (10시)
김유철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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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상우 바오로 신부
자유에는 반드시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셨습니다(창세 1,26-27 참조). 그리고 자유 의지를 주시어 모든 피조물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권한과 그들을 다스릴 권한까지 허락하셨습니다(창세 2,19-20 참조). 그런데 이러한 자유에는 반드시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이 따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불순종할 자유까지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발견합니다. 인간의 불순종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유 의지가 있기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그분께서는 인간의 불순종마저 당신 자비를 베푸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고백합니다.
한편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누군가에게 식사를 대접할 때 자신이 베푼 자선이나 선행에 보답할 수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은 인정받고 싶어 하고, 보상받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인내심은 부족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현세적 보상을 바라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서 오는 보상은 결코 영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책임 있게 사용하는 그리스도인, 사람에게서 오는 위로와 인정으로 자신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을 먼저 추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 고통받는 ‘변두리 이웃’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때에, 당신께서 바라시는 방법으로 모두 갚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답게 살아갈 때, 나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만난다.
어렸을 때부터 제 바로 위의 형님과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얼굴도 비슷하고 키도 비슷했습니다.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다른 모습도 닮아야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형님처럼 공부도 잘하고, 악기도 잘 다루고, 또 각종 능력도 닮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외모 외에는 닮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형님과 저는 네 살 차이가 납니다. 어렸을 때의 네 살 차이는 능력과 재주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 차이로 어렸을 때 열등감이 생겼고, 소심해졌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간 뒤에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다르게 만드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일이 아닌 각자 다른 역할을 주신 것입니다. 서로 다르게 태어났으므로 우리 각자는 고유한 천직과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찾지 못할 때, 그리고 남처럼만 되려고 할 때 자기 삶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함은 참으로 큰 은총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은 공동체 일부가 되어 전체를 형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르게 만드신 하느님의 손길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나를 다르게 만드셨을까를 묵상해야 했습니다. 묵상 안에서 ‘나’ 같이 사는 자기 존재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되면서, 하느님 뜻에 맞게 이 세상을 ‘나’답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보답을 바라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거저 주는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랑에 보답해 주십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업신여김과 천대를 받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참사랑을 베푸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 있다고 하시지요.
거저 주는 사랑을 베풀라는 주님의 말씀에 우리는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합니다. 주는 사랑이 아닌 받는 사랑에만 더 큰 관심을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받을 것만을 생각합니다. 남들과 비교하면서 왜 나는 남들처럼 능력과 재주가 부족하고, 남들처럼 가진 것이 없냐고 불평합니다. 그 ‘남’이 ‘나’가 될 수 없음에도 ‘남’이 되려고만 생각하면서 행복의 주인공이 아닌 불행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우리 각자는 다양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양함은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데 써야 했습니다. ‘나’답게 살아갈 때, 나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얼마나 기쁨 속에 살 수 있는 곳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는 약함과 실패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그분 아드님의 모상이 될 실질적 역량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 성 요한 바오로 2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진짜 사랑을 알아보는 유일한 법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나에게 보답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지 말고 보답할 수 없는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보답받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내가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하는 일은 그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보상을 바라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보상을 요구한다면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을 위해 사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닙니다. 제일 나쁜 일은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뱀을 위해 살면 나는 뱀의 소굴에 갇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내 안의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방법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만을 사랑한다면 그건 사랑일 수 없습니다. 반드시 보답을 바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호텔과 부동산 재벌 레오나 헬름슬리는 2007년 사망하면서 자신의 말티즈 강아지 ‘트러블’에게 1,200만 달러를 상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두 조카에게는 한 푼도 상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트러블에 대한 사랑은 진짜였을까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며 개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개가 자신에게 무언가 주었기에 자신도 사랑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랑이 많은 사람임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면 그것은 형제만을 바라봐서일까요? 부모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마음이 아플까 봐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형제를 사랑하면 그건 분명 형제를 이용하는 것이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도 있고 박수를 쳐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두고는 사랑이 증명되지 않습니다. 내가 부모를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기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개는 주인이 위험에 처하면 어떻게 할까요? 자기부터 살고 봅니다. 아무리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어도 이길 자신이 없다면 도망칩니다. 이것이 그것들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가 누구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화 아바타의 줄거리입니다. 22세기, 인류는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판도라라는 위성에서 희귀한 광물 ‘언옵테이니엄’을 채굴하고자 합니다. 판도라에는 나비족(Na'vi)이라는 키가 크고 푸른 피부를 가진 원주민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자연과 깊은 연결을 하고 살아갑니다.
인간들은 판도라의 대기가 자신들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에, 아바타 프로그램을 통해 나비족의 모습을 한 유전적으로 조작된 아바타 몸을 원격으로 조종합니다. 전직 해병대원인 주인공 제이크 설리는 하반신 마비 상태로, 죽은 쌍둥이 형의 대체 인원으로 아바타 운용자로 판도라에 도착합니다.
제이크는 아바타를 통해 나비족 사이에 잠입하여 그들의 신뢰를 얻고, 광산 개발을 위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이크는 나비족 사이에서 살면서 그들의 문화와 생활 방식, 그리고 자연에 대한 신성한 존중을 배워 갑니다. 특히, 나비족 여성 네티리와의 관계를 통해 그는 나비족의 삶과 가치에 깊이 매료됩니다.
나비족은 제이크가 자신들을 이용하기 위해 자신들 속으로 잠입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믿어줍니다. 결국, 그는 나비족을 돕기로 결심하고 인간과의 전투에 나서게 됩니다. 제이크의 이러한 행동은 인간의 육체를 넘어 나비족의 아바타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이크는 신적 존재인 나무 에이와와 나비족의 도움으로 불구의 인간 몸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진정한 나비족이 됩니다.
제이크는 왜 인간을 배신하고 나비족이 되었을까요? 인간 사회에서는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도 있었고 자기에게 보상을 주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믿는 어떤 신을 사랑해서 나비족만큼 자기를 위해주는 이들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이것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만이 진짜 사랑입니다.
나에게 칭찬하거나 감탄만 하는 존재는 위험합니다. 창조자를 먼저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저 나만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다가오는 이는 가짜입니다.
우리에겐 우리 발을 씻어주신 하느님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이 우리 존재 상승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 세상은 나를 칭찬하고 감탄할 수는 있어도 나에게 영광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나에게 영광을 주는 이는 아버지의 뜻 때문에 나의 발을 씻어주는 이고 그런 존재를 선택해서 사랑해야 이용당하다 버려지는 삶이 아닌 참 존재의 완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존재를 잘 분별해서 그를 위해 살며 그의 이름에 영광을 돌려 우리 존재를 완성해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 사랑을 보답으로 받는
줬다가 뺏는 것처럼 치사하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은 없을 것입니다. 어린이에게 돈을 줬다가 뺏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이는 울고불고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것은 숫제 주지 않은 것보다 나쁜 짓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과 같은 것이고, 미성숙한 아이들이나 가끔 하는 짓입니다. 아이들은 친할 때 줬다가 삐지면 도로 달라고 하지요.
연인 간에도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하지요. 좋아서 사랑할 때 패물을 선물했는데 싫어 헤어지면서 도로 달라고 한다지요. 아무튼 선물을 도로 달라고 하는 것은 사랑을 거둔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런 분이 아니라고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은 사랑을 포기할 줄 모르는 분이시라는 말과 같은 말이고, 실로 포기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나 성숙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지요. 그런데 보답을 바라는 사랑도 진정한 사랑이 아니고 성숙한 사랑이 아니지요.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보답할 수 없는 가난한 이를 잔치에 초대하라고 하시며 더 나아가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실로 성숙한 사랑은 엄마가 아이에게 무조건 사랑하듯 보답을 바라고 사랑하지 않고 그저 넘쳐서 사랑하지요. 사랑이 넘쳐서 사랑하기에 보답이 없어도 행복하고, 사랑이 넘치기에 보답이 없어도 결핍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답을 바라는 것은 결핍이 있기에 사랑하는 것이요, 결핍을 채우기 위해 사랑하기에 보답이 없을 때는 불행하고, 사랑은 미움으로 바뀌곤 하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보답을 바라지 않는 참된 사랑에 관하여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가 건강하여 보답해 줄 수 있을 때 그 형제를 사랑하는 만큼, 형제가 앓고 있어 보답을 받을 수 없을 때도 그만큼 형제를 사랑하는 종은 복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보답을 바라지 말아야 할 다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보답을 받지 않고 저세상에서 받을 것이고, 인간의 보답을 받지 않고 하느님의 보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저는 저를 반성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나의 사랑으로 자족하는 차원에서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느님의 보답을 그리 바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앞서 봤듯이, 보답을 기대했다가 보답이 없으면 미워하게 되고, 불행해지는, 그런 내가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어떻게 보면 고차원적인 이기주의이고, 사랑의 인격적 측면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무릇 신앙인이라면 이웃사랑을 사다리 삼아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고, 다른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만을 보답으로 바라는 사랑을 할 때 성숙한 신앙인이요 행복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런 사랑을 가르침 받고 꿈도 꾸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히려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예수님의 마음을 맘껏 받는 오늘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가장 좋은 행복으로 오늘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반기는 이들은 오히려 가난한 이들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고 떠나는 단풍의 아름다운 뒷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고 모든 것을 맞아들이시는 예수님의 초대는 그 어떤 답례도 바라지 않으시는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나오신 길은 초대의 길이며 오늘을 선물로 주시는 은총의 길입니다. 오히려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시며 사랑의 본분에 충실하신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십니다.
사랑은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들 가까이 있습니다. 버려진 이들의 아픔을 모르던 우리들에게 당신 사랑으로 가난한 이들을 가장 밝게 가장 아름답게 바꾸어 놓으십니다. 아낌없는 사랑의 초대가 잔치가 되고 삶의 새로운 희망이 됩니다.
버려진 것은 부서진 것이 아니라 불러 모아야 할 예수님의 소중한 것이 됩니다. 보이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우리들 안에 있음을 일깨워 주시듯 버려진 이들을 초대하십니다. 아낌없는 초대 아낌없는 사랑에 응해야 할 우리들의 가난한 삶입니다. 그 초대에 함께하는 우리들입니다. 고정관념을 내려놓는 오늘의 잔치 오늘의 만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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