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3/11/03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1. 3.
반응형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2023년 11월 3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1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루카 14,3)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루카복음 14장 3절

오늘성경구절이미지_231103.jpg
0.36MB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로마서 9,1-5)
    내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았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4,1-6)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1월 3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루카복음
루카 14장 1-6절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마침 그분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1월 3일 (금)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준혁 바오로 신부

 

📌 교황님 11월 기도지향 00:22

📌 미사시작 00:37

📌 강론시작 06:29

 

 

 

팔로티회 실시간 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1월 3일 (금)
팔로티회 홍천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0:09

📌 강론시작 06:28

 

 

 

명서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1월 3일 (금)
명서동성당 미사 10시
구성진 율리아노

 

📌 미사시작 05:07

📌 강론시작 12:59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상우 바오로 신부

 

어떤 마음으로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까?

 

안식일 규정은 구약 성경의 오경에 소개된 모세의 율법에 속합니다. 하느님께서 히브리인들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탈출기 이야기는 유다인들에게 하느님의 구원 체험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과 맺은 계약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십니다. 십계명을 포함하는 모세의 율법은 당신 백성을 향한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은 하느님 사랑에 무감각해지고 바빌론 유배의 아픔까지 겪습니다. 그 과정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에 세부 규정을 더합니다. 안식일에 관한 규정들도 이에 해당합니다.

본디 안식일은 창세기에 나오듯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를 마치시고 마지막 날 쉬신 것을 기념하는 날로,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거룩하게 지내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의 근본정신인 하느님 사랑의 마음은 어느새 잊히고 법 규정만 남게 됩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잊어버린 채 세부 규정에만 집착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과 나눈 대화인 복음 속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미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누셨던 최후의 만찬에서 비롯합니다. 미사는 인류를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재현하며 현재화하는 공적인 전례입니다. 미사의 근본정신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 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마음으로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감사 안에서 축복의 통로는 훨씬 더 넓어진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한 청년이 노인에게 삶의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청년에게 양동이 3개를 준비한 뒤 물을 넣고 끓이라고 시켰습니다. 
 
물일 끓기 시작하자 노인은 청년에게 한 양동이에는 당근을, 다른 양동이에는 달걀을, 마지막 양동이에는 찻잎을 넣으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 노인은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이 끓는 시간은 곧 삶에서 겪는 고난의 순간들이라네. 세 가지 대상에게 고난이 주어졌더니, 어떤 결과가 펼쳐졌는지 보게나.” 
 
물이 끓을수록 당근은 부드러워졌습니다. 달걀은 속이 단단해졌습니다. 찻잎은 물 전체를 향기로운 차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당근에게, 달걀에게, 찻잎에게 뜨거운 물은 분명히 고통이고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사실은 축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부드러워질 수도 또 단단해질 수도 그 결과 향기로움을 전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을 떠올리면 고통과 시련이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렵고 힘든 것은 무조건 피하려고만 하지요. 그 결과 고통과 시련은 무조건 나쁜 것이 되고 맙니다. 
 
이 고통과 시련 속에서 축복의 통로를 발견할 수 있으려면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 안에서 축복의 통로는 훨씬 더 넓어집니다. 
 
예수님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병으로 인해 그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예수님을 통해 은총이라는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남에서 방해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율법교사와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병을 앓고 있음을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죄인을 위해 안식일 계명을 어긴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병은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만나서 큰 은총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막는 사람이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자기는 맞고 너는 틀렸다고 규정을 짓습니다. 그런 섣부른 판단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자리는 없어지고 맙니다. 예수님의 자리를 없애고, 그곳에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은 결코 죄의 결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보다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주님을 방해하는 사람이 아닌,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과거로 돌아가서 시작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부터 시작해 미래의 결과를 바꿀 수는 있다.

- 클라이브 루이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왜 옆집 아저씨가 돌아가셔도 슬프지 않은데 내 강아지가 죽으면 슬플까?

 

주교님들이 오셔서 집전해 주신 교구 위령 미사 중 한 분이 쓰러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각자 대응하는 방식이 조금씩은 달랐습니다. 성찬례 때 그랬기 때문에 심폐소생술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신 신자분들 중에 의사나 간호사를 찾아야 했습니다. 성체를 영하는 시간에 마이크로 공지를 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부님들은 미사 분위기를 망치더라도 한 사람을 살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마침 방송을 듣고 지나가시던 어떤 분에 뛰어 올라왔습니다. 의사셨습니다. 그래서 응급처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미사에 참례하신 분은 그 쓰러진 모르는 분을 형제처럼 대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 아들이나 가축이 우물에 빠지면 안타깝게 느끼지만, 이웃이 그러한 처지에 처했는데도 자비심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개를 키웠을 때 개가 사라졌을 때는 매우 가슴이 아팠지만, 이웃의 누군가가 돌아가셨다고 해도 그만큼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사고로 피 흘리는 사람을 보았지만, 신고를 하면 할 만큼 했다는 이유로 그냥 지나쳐버렸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사람이 형제로 보이지 않았을까요? 

언젠가 어떤 남자 청년이 자기 강아지가 자전거 바퀴에 걸려 죽은 것을 보고는 피 흘리는 강아지를 안고 오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길옆에 있던 우리는 혀를 쯧쯧 차기는 하였지만, 그만큼 슬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도 그 강아지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청년은 사랑이 아주 많은 사람일까요? 강아지가 죽은 것을 보고 슬퍼한다고 그 사람에게 사랑이 많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강아지에게 그만큼 사랑을 많이 주었겠지만, 불쌍한 이웃에게는 어떻게 하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체를 연결해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강아지에게는 주인이 준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또 주인 마음에는 강아지가 받은 사랑에 보답한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사랑이 상대의 감정을 내가 느낄 수 있게 이어줍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내가 꼭 사랑을 주고받은 대상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요?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면 모든 존재를 창조하신 분께 사랑을 받고 그분을 사랑하면 됩니다. 

영화 아바타에는 마더 트리가 나옵니다. 마더 트리는 그 생명력으로 모든 나비족에게 생명을 주고 또 그들로부터 생명을 받기도 합니다. 나비족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죽은 한 인간을 살리기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마더 트리에 주고 마더 트리는 그 인간에게 새 생명을 주며 살려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창조하신 분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먼저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와의 통교가 이루어지면 형제도 사랑합니다. 내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부모의 마음이 아픈 것을 사랑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형제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부모의 마음을 느끼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마더 트리와 같습니다. 생명나무이고 성체로 우리를 살리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체를 영하지 않더라도 하느님으로부터 존재와 사랑을 받지 않은 생명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창조자의 마음을 그대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분 덕분으로 많은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왜 예수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분과 통교하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지의 이유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 마더 트리인 그리스도를 사랑합시다. 그러면 모든 이들, 모든 존재가 우리 형제처럼 보이게 될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은 언제나 정당하다

 

오늘 복음은 지난 월요일 복음, 그러니까 루카복음 13장 10-17절의 내용과 거의 같습니다. 다르다면 13장에서는 회당에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시고 오늘 14장에서는 바리사이 집에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신 겁니다. 

오늘은 바리사이가 주님을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한 것인데 저는 여기서 왜 바리사이가 주님을 초대하였고 식사대접까지 한 것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더욱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준 뒤 그에 대해 비판적인 회당장을 주님께서 묵사발 만든 얘기를 틀림없이 들었을 텐데 그럼에도 다시 수종 병자를 주님 앞에 있게 한 것은 무슨 의도인지 생각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서술만 보면 바리사이에게 나쁜 의도가 있는 것 같지 않고 주님의 말씀도 그를 크게 나무라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리사이는 주님께 호의를 가지고 있고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바리사이는 주님께 식사 대접을 하고 있고 오늘 복음을 보면 아무런 불만의 표시가 없습니다. 식사는 싫어하는 사람하고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고 특별한 호의나 사랑이 있을 경우 식사에 초대하잖아요? 

그렇다면 주님도 호의를 가지고 초대에 응하신 것이고 하신 말씀도 나무람이라기보다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는 실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만나시고 누구에게나 그에게 맞게 적절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주님은 바리사이에 대해 무조건 적대감을 가지시고 당신의 복음 선포와 사랑에서 이들을 포기하거나 배제했을 것 같지만 결코 피하거나 포기치 않고 기회가 될 때마다 마주치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자기 동족 이스라엘에 대해 간절한 사랑을 드러냅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한때의 자기처럼 죽어라 하고 주님을 거부하는 그들을 위해 자기가 저주받고 그리스도에게서 배척될지라도 뭔가를 하고 싶어 합니다. 

아무도 포기치 않고 한두 번의 노력으로 포기치 않는 바오로의 사랑은 바로 오늘 주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얼마 안 되는 사랑은 한두 번 애써서 효과가 없으면 포기해 버리지만 진정한 사랑과 큰 사랑은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지요. 

부모 특히 어머니가 끊임없이 잔소리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지치지 않는 엄마의 사랑이 지치지 않고 잔소리를 하는 거지요. 사실 잔소리하지 않는 엄마는 엄마가 아니고 그래서 돌아가시고 나면 그 잔소리가 그립잖아요?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나무람이 아니고 사랑이고 가르침인데 그렇다면 어떤 가르침입니까? 

안식일의 본질에 대한 가르침이요 본질적인 가르침입니다. 안식일이 본래 사람을 살리는 날이라는 가르침이고, 무엇을 하든 본질적으로 판단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미워죽겠다고 제게 고백할 때 저는 종종 그러면 그가 정말 죽었으면 좋겠냐고 본질적으로 대처합니다. 그러면 밉기는 해도 죽기는 바라지 않는다고 펄쩍 뛰지요. 

복음의 다른 곳에서 말씀하셨듯이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마땅한지 죽이는 것이 마땅한지 이렇게 근본적으로 보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것이 마땅하지요. 사랑이 사랑이기만 하면 사랑은 언제고 정당하고 언제나 필요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길을 잃어본 사람은 길의 소중함을 압니다. 서로를 향한 연민의 마음은 우리모두가 걸어가야 할 소중하고 소중한 생명의 길입니다. 풀려야 할 것이 풀리지 않는 것은 마음을 제대로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는 열매 하나를 맺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보살핌이 필요했습니다. 

연민의 빛은 은총을 숨기지 않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은총 속에서 살고있는 사람은 은총을 받고 있는 사람을 시기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이 아픈 것은 우리들 마음이 하느님께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철들지 않는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소중한 생명 앞에 망설임은 불필요한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중심이 되시는 안식일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신뢰의 마음이 없어지면 안식일은 늘 우리를 가두는 족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안식일에 갇혀있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삶이란 안식일을 위하고 안식일을 향하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하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임을 마음에 다시 새깁니다. 

사소한 것들이 결코 사소하지 않는 소중한 것들로 다가옵니다. 끊어진 안식일의 길은 연민으로 다시 이어집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우리의 무분별한 욕망을 이겨내기 위해 안식일이 있습니다. 사람을 위하는 것이 하느님을 위하는 것이며 결국 우리모두를 위하고 살리는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의 마음은 연민의 마음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