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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10/30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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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2023년 10월 30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0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루카 13,17)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루카 13,17)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루카 13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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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로마서 8,12-17)
    여러분은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3,10-17)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0월 30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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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

 

 

루카복음
13장 10-17절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0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12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15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16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7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0월 30일 (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05시)
김연수 스테파노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6:22

 

 

 

팔로티회 실시간 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30일 (월)
팔로티회 홍천 (15시)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30일 (월)
팔로티회 분당 (16시)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안식일의 참다운 의미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여정을 이어 가는 예수님과 회당장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열여덟 해 동안 병마로 고생하는 여인을 고쳐 주셨는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위반하였다고 문제 삼고 있습니다. 율법은 안식일에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신명 5,12-15 참조).

회당장의 비판에 대한 예수님의 논거는 매우 명확하고 논리적이며, 논증의 방법은 점증적입니다. 율법에서 길 잃은 동물을 다시 돌아오게 하며 넘어진 소나 나귀를 다시 일으켜 주는 것이 허용되듯이(신명 22,1-4 참조), 안식일에 소나 나귀에게 물을 먹이러 물가로 데리고 가는 것은 허용됩니다. 

이와 같은 논리에서 볼 때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을 고쳐 주는 행위가 율법을 위반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규정 준수와 같은 종교적 의무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시며(루카 6,9 참조) 안식일의 참다운 의미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해방’과 ‘휴식’은 안식일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의 눈에 회당장은 “위선자”입니다. 그는 안식일에 관련된 규정을 알고 있었지만 그 율법 조문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였습니다. 안식일 규정에 담긴 정신, 곧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마르 2,27 참조).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회당장은 비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회당장을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랑은 나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제관을 나와사 엘리베이터의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습니다. 평상시에는 주로 계단으로 오르내리지만, 이날은 양손 가득히 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렸음에도 엘리베이터는 오지 않는 것입니다. 짐의 무게를 점점 느끼게 되면서 누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이렇게 오래 누르고 있냐면서 불평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너무 짐이 무거워서 짐을 바닥에 잠시 내려놓은 뒤, 엘리베이터가 오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않은 것입니다. 눌렀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눌러지지 않아서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있던 것입니다. 이렇게 버튼도 제대로 누르지 않고는 엘리베이터를 누가 잡고 있을 것이라면서 남 탓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사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남 탓을 하곤 합니다. 나의 역할보다 남의 역할이 더 크지 않을 텐데, 늘 ‘누구 때문에’를 외치곤 했습니다.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어떤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 실천도 남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나’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남을 보지 않고 온전히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 됩니다. 남 탓으로 불편한 마음을 만들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으로 우리 모두 편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먼저 완벽한 사랑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어떤 것보다도 우선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율법보다 사랑의 계명이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를 만나게 되십니다. 이 여자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큰 고통 속에 있는 분으로,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일분일초라도 빨리 고통 속에서 자유롭게 해 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마침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회당장은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지요.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사랑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나부터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남 탓을 하면서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어떤 경우에도 곧바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5,2)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간을 치유하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인간을 전제로 보아야 하고, 궁극적인 치유는 하느님 사랑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 베네딕토 16세 교황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그건 설득이 아니라 설교다.

 

누군가 “신부님 강론은 설득이 아니라 설교입니다”라고 하면 기분이 어떨까요? 어쩌면 오늘 복음은 강론이 단순한 설교가 아닌 설득이 되려면 어떤 것이 필요한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려 허리를 조금도 펼 수 없었던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그러자 회당장이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는 것을 보고는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합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이것은 회당장의 설교입니다. 예수님은 더욱 설득력 있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자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당하고 군중은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습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회당에서 회당장과 설교로 대결을 벌이는 구도이고 결국 예수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설교는 설득적이었고 회당장의 설교는 말 그대로 설교에 그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무엇이 다를까요? 바로 구체적인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다는 게 다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구절을 너무도 쉽게 간과합니다. 그러나 비유가 없으면 그 설교는 설득력을 잃습니다. 

제러드 포글은 대학교 3학년 당시 몸무게가 192킬로그램에 달했고 ‘커다란 사람들을 위한 옷가게’에서만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사이즈인 XXXXXXL의 셔츠를 입었습니다. 바지의 허리 치수는 60인치나 되었습니다. 

재러드의 아버지는 인디애나폴리스의 의사였는데, 벌써 몇 년째 아들에게 몸무게에 관해 경고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 부종을 앓고 있다는 진단을 받고는 몸무게를 줄이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서브웨이 샌드위치는 “서브웨이 샌드위치 일곱 개에 함유된 지방은 도합 6그램도 안 됩니다”라고 홍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러드는 선브웨이 샌드위치를 먹으며 다이어트를 해 보기로 합니다. 점심으로는 야채 서브 샌드위치를 먹고, 저녁으로는 6인치짜리 터키 샌드위치를 먹었습니다. 

이렇게 ‘서브웨이 다이어트’를 시작한 지 3개월 후, 그는 처음으로 저울 위에 올라섰고 무려 50킬로그램이 빠진 150킬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80킬로그램까지 빠집니다. 

이 사실을 알아낸 광고 회사는 ‘지금 우리 손 안에 엄청난 스토리가 굴러들어왔어!’라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광고 회사 사장의 제안에 본사 마케팅부장은 시큰둥하였습니다. 마케팅부장은 샌드위치는 맛으로 경쟁해야지 몸에 좋다고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견해이었습니다. 

그러나 광고 회사는 공짜로 이 광고를 만들어주겠다는 제안과 샌드위치를 먹는 것이 전부가 아닌 운동과 의사의 지도가 있어야 한다는 문구를 넣는다는 끈질긴 설득으로 재러드의 사연을 광고로 내기로 합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초대박이었습니다. 『스틱』이라는 책에 소개된 사연입니다. 

스토리는 정말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책 『스틱』에는 설득력 있는 표현을 하는 여섯 가지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단순해야 하고 의외성이 있어야 하며 구체적이어야 하고 믿을 수 있어야 하며 감정을 건드려야 하고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여섯 가지 조건을 다 채우는 것이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비유 말씀을 통해 이 여섯 가지 딱 달라붙는 메시지를 전달할 줄 아셨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통하지 않고는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이 누군가와 싸우고 미워하고 한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저는 용서하라기보다는 비유를 통해 말씀드렸습니다. 

“바다의 수심에 따라 물고기가 사는 종류가 다른 것을 아시죠? 만약 내가 어떤 물고기와 문제가 있다면 나는 그 수심에 있는 것입니다. 같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부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입니다. 그러면 더는 바다의 물고기들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싸우면 같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쉽게 이해하였습니다.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비유를 들어주는 것은 내가 그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비유를 들 수 있다는 말은 다른 수준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셨기에 그것에 대한 설명은 이 지상의 비유로만 표현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말이 단순한 설교가 아닌 설득이 되기 위해 우리도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정신은 차리고 영의 불은 끄지 않는 

 

우리말에서 정신과 관련한 말들을 한번 생각나는 대로 모아봤습니다.


ㆍ정신 나간 놈

ㆍ요즘 정신이 없어! 

ㆍ정신을 쏙 빼놓네

ㆍ그런 썩어빠진 정신을 가지고 뭘 할 수 있냐!


이것이 정신과 관련한 부정적인 표현이라면 좋은 의미의 표현과 사용도 있습니다.


ㆍ제정신이 들다

ㆍ정신을 차리다

ㆍ정신 차려! 

ㆍ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 : 정신을 한곳에 모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우리가 잘못 사는 것은 정신없이 사는 경우와 정신이 있긴 있는데 그 정신이 썩어빠진 정신이거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사는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없이 살거나 썩어빠진 정신으로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썩어빠진 정신은 몰아내고 정신을 차리거나 제정신이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우리는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작 정신 차리고 제정신 드는 것으로 만족 말고,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는 주님의 영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사실 제정신 차리는 것은 온전한 인간이 되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주님의 영을 모셔 들이면 우리는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한다는 뜻으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라틴말 Spiritus나 영어 Spirit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얼’이 되고, 한자어로 번역하면 ‘정신’ 또는 ‘영’으로 번역이 됩니다. 

그러니까 한자어에서는 인간 안에 있는 Spirit은 정신이라고 하고, 인간 밖에 있는 Spirit은 악령이든 더러운 영이든 영이라고 쓰며,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은 이런 잡령들과 구분하여 Holy Spirit 그러니까 거룩한 영 또는 성령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당연히 하느님에게서 오는 성령만이 우리를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하고, 부모와 자식의 끈으로 단단히 묶어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준다고 바오로 사도는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거듭 얘기하면 나간 정신을 차리는 것이나 잃었던 정신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나 썩어빠진 정신 대신 제정신이 들게 하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바이지만 우리가 진정 신앙인이라면 우리를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는 성령, 하느님을 우리 아빠 아버지가 되게 하는 성령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도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일하는 은총을 주신 형제들은 충실하고 헌신적으로 일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영혼의 원수인 한가함을 쫓아내는 동시에 거룩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현세의 다른 모든 것들은 이 영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대로 성령을 모셔 들이고,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 성령의 불을 끄지 않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하느님의 빛이 가을 꽃길을 더욱 환하게 비춥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배우는 시간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모른다면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 말씀을 우리가 모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에도 우리모두를 돌보십니다. 우리가 서로 도우며 살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거나 앞지르는 안식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인 속박에서 풀어주는 안식일입니다. 

우리 자신을 만난다는 것은 안식일의 정신을 만나는 시작입니다. 사랑의 힘이 사람을 더 사람이게 합니다. 목숨을 거시는 예수님을 앞에 두고 안식일의 규정만을 들먹입니다. 사랑을 위해 사람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반성합니다. 

참된 사랑이 서로를 살리는 참된 자유입니다. 아무 조건 없는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속박에서 먼저 풀려나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자신입니다. 우리자신을 부디 알게 하기위한 안식일의 갈등과 충돌입니다. 나로부터의 자유이며 변화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참된 안식일도 있습니다. 안식일은 그래서 숨지 않고 이제 그만 하느님께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사랑과 더불어 성장하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 누구도 속박하지 않는 사랑과 자유를 예수님을 통해 만납니다. 서로를 풀어주는 따뜻한 사람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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