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2023년 10월 27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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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로마 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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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7장 24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로마서 7,18-25ㄱ)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 오늘 복음
(루카 12,54-59)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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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루카복음
12장 54-59절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5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6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57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58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59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0월 27일 (금)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기호배 맛세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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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
예수님의 시선은 제자들에서 군중에게로 옮겨 갑니다. 오늘 복음은 경고하는 내용의 두 개 본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본문(12,54-56)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비판하십니다. 팔레스티나 지역의 기후를 보면, 서풍이 지중해에서 내륙으로 습기를 끌어오고 남풍이 네겝 사막에서 열기를 가지고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두고 이러한 팔레스티나 지역의 자연 현상은 이해하면서 이 시대의 표징은 알아보지 못하는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군중은 예수님에게서 ‘위선자’라고 비판받는데, 이는 군중이 하느님의 뜻을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후 현상을 예시하시며 구체적 실천을 요청하십니다. 이에 따라 군중은 그들 앞에 나타난 시대의 표징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본문(12,57-59)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반대자와 화해할 것을 권고하십니다. 그러지 않으면 감옥에 넘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하면 재산을 모두 팔아서 채무를 해결할 때까지 감옥에 있어야 하는 당시의 규정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12장 59절에서 언급된 ‘한 닢’은 1세기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통용된 화폐 가운데 가장 가치가 낮은 동전입니다(21,2 참조).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엄격한 법 규정과 재빠른 실천을 강조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군중 속에 들어가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도록 초대받습니다. 복음에서 군중에게 건네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날카롭습니다. 그 날카로움은 우리의 아픈 곳을 찌르지만, 또한 상처도 치유하여 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종교의 힘은 과학의 힘보다 훨씬 강하다.
현대 심리학에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는 칼 융을 잘 아실 것입니다. 1920년대에 칼 융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를 치료하고 있었는데, 일 년 동안 계속 치료했음에도 전혀 치료 효과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칼 융은 두 손 두 발 모두 들고 포기하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들으세요. 환자분은 제게 돈을 낭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솔직히 당신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겠어요. 더 이상 도와 줄 수가 없습니다. 딱 한 가지 희망은 당신이 종교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종교에 귀의해서 술을 끊는 사람이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이 환자는 종교를 가지게 되었고 실제로 술도 끊었습니다. 얼마 후, 자기처럼 엄청나게 알코올 의존증에 빠진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친구에게 자기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친구도 종교를 가지면서 술을 끊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종교의 중요성을 전하면서 술을 끊게 했고, 이 모임으로 ‘알코올의존증환자협회’의 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종교의 힘은 과학의 힘보다 훨씬 강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면서, 대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만을 믿겠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잘 알면서도, 자기 기준으로만 바라보니 부족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보다 분명 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안에서 놀라운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변화는 예측하여 대비하면서, 절박하게 닥친 시대의 변화는 왜 올바로 읽지 못하냐고 말씀하십니다. 즉, 자연의 징조를 보고 날씨를 미리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활동과 교회 안에서 구원의 표징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재판관이신 하느님 앞에서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유일한 방법은 원수와 서둘러 화해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재판관이신 하느님을 아예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재판관이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루카 12,59)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결코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것을 행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뜻에 맞춰서 화해와 용서에 집중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앞에 자신 있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참 기쁨과 행복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산을 움직이려 하는 이는 작은 돌을 들어내는 일로 시작한다.
- 공자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나를 고소하는 자는 누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연의 법칙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자연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것을 잘도 이용합니다.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비가 오겠다고 생각하고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됩니다.
자연에 법칙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만들어지지 않으면 법칙을 가질 수 없습니다. 모든 법칙은 무언가를 만들 때 만들려는 사람에 의해 미리 계산된 설계도와 같은 것입니다.
하다못해 작은 의자를 만들려고 하더라도 설계도가 필요합니다. 설계도가 있다는 말은 그 법칙대로 만들지 않으면 쓸모가 없어진다는 말과 같습니다. 의자에서 한 다리만 짧아도 그 의자는 쓸모없어집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연도 만들어졌고 법칙이 있고 그 법칙대로 살아야 온전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도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법칙은 왜 이해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며 멀씀하시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러며 이런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고소하는 자에 의해 고소당해 재판관에게 가고 있습니다. 당연히 피고로서 그 고발한 자와 합의하고 화해하지 않으면 재판관은 빌린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그를 가둘 것입니다. 그러니 미리 화해하고 재판관 앞에 나아와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심판관이신 주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세포 하나하나에도 우리 설계도가 들어있으니 분명 우리를 만든 분이 계실 것이고 그 설계도대로 살았는지 심판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살지 못했을 때 우리를 고소하는 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영화 ‘할로우 맨’(Hollow Man)은 ‘인간에게 투명하게 되는 능력이 주어지면 어떻게 될까?’라는 물음을 제기합니다. 케인 박사는 미국 정부를 위해 투명 혈청 개발을 위한 일급비밀 프로젝트에 참여해 고릴라 실험까지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다고 보고합니다. 자기가 직접 투명해졌다가 돌아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투명해지자 그는 조금씩 욕망에 집착하게 됩니다. 투명하지 못했기에 하지 못하던 것들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점점 투명한 것만으로는 자신이 얻지 못하는 것이 있게 되자 그 보이지 않는 힘을 통해 사람들을 제거해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되돌아오고 싶은 마음을 버립니다.
케인은 자신이 투명하다는 비밀을 아는 사람들을 제거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에 그들로부터 당하고 맙니다. 불속으로 떨어집니다. 이것이 우리 마지막 심판 때도 일어날 일입니다. 케인은 왜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없었을까요? 본인이 투명하다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자기 행동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 때 우리를 고발할 대상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고발하는 자는 바로 ‘양심’입니다. 양심은 우리가 설계도대로 살아가는지 심판하는 측정기구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병이 들어도 아프지 않은 상태와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나병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몸이 허물어지고 죽게 됩니다. 양심은 우리 영혼이 나병을 입지 않도록 마련해놓으신 측정 도구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면 누구나 부끄러워 자기가 한 일을 숨기려 합니다. 그 와중에 다른 사람을 더 비판하게 되기도 하고 심지어 미워하기까지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그 가책을 잊기 위해 더 술에 취하거나 쾌락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아예 힘으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을 제거하려 하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 부끄러운 부분을 나뭇잎으로 가리고 서로 상대의 탓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양심의 가책은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게 합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망가져 하늘나라에 살 수 있는 자격을 잃게 만듭니다.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양심의 가책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 솔직히 죄를 고백하고 그분이 마련하신 가죽옷을 입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만큼 깨끗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우리 안에 넣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며 우리 안에 계신 그분 덕택으로 우리를 받아주십사 주님께 청할 수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없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숨기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 힘들다면 적어도 고해성사 때 사제에게는 진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죽옷을 입습니다.
먼저 양심과 화해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죄를 짓게 됩니다. 고해성사라는 양심과 화해하는 축복의 성사를 받지 못하는 이들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마지막 때에 나무가 자기에게 쓸모가 없는 썩은 나뭇가지들처럼 주님께서 떨어내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비참함을 아는 내가 오히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수도원에 들어와 프란치스코를 안 다음 저는 프란치스코 때문에 늘 괴로웠습니다. 제게 프란치스코는 정말 너무나 위대하고 완벽한 인간이었고 그래서 저는 어떻게든지 그를 닮으려고 했습니다.
먹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단식을 밥 먹듯이 했을 뿐 아니라 먹을 때도 맛을 없애려고 물을 타서 먹든지 재를 타서 먹었으며, 갈증이 날 때도 물조차 다 마시지 않고 갈증을 해소치 않았습니다.
그러니 저는 배불리 먹으면 배불리 먹어서 괴로웠고, 배를 채우지 않고 조금 먹으면 배고파서 괴로웠지요. 맛있는 것이 나올 때는 더 괴로웠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맛을 없앴는데 맛이 있으니 맛있어서 괴롭고, 그 맛있는 것을 먹지 않을 때는 먹지 못해서 괴로웠습니다.
욕구/본능의 나와 이성/의지의 나 사이에서 늘 갈등이었고 늘 괴로웠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현실의 나 사이에서 늘 괴로웠습니다. 이상은 하늘을 향하고 집착하는데 현실은 땅바닥에서 기었습니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하려는 마음도 있는데 미움이 늘 옆에 있고, 좋아하는 것 옆에는 늘 악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가 한탄하듯 그런 제가 비참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한탄하지요.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누가 비참한 인간입니까? 바오로 사도입니까? 아니면?
갈등이 없고 비참함을 모르는 사람이 비참합니다. 욕망과 본능에 따라 살면서도 아무 갈등이 없고 괴로움이 없는 사람, 그리고 그런 자기가 비참한지도 모르는 사람이 실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그의 말로가 비참하고, 하늘에서 비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비참함을 아는 사람은 구원을 청하지요. 나로서는 안 되니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고 구원받게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비참함을 아는 나, 은총을 청하는 나, 그래서 구원을 받을 줄 아는 내가 오히려 복됨을 알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영원한 가치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반성합니다. 가치를 지키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갑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어리석은 우리자신들입니다.
올바른 방향을 위한 변화의 방향을 예수님에게서 다시 찾아야 합니다. 보다 바른 삶을 위해 필요한 예수님의 도움입니다. 스스로를 꾸짖어 스스로를 맑게하는 정신이 중요한 가치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있는 이 시대는 더더욱 올바른 가치와 올바른 정신이 필요합니다.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악순환을 멈추는 것이 이 시대에 필요한 지혜입니다. 하늘의 뜻은 땅의 뜻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맑아지면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습니다. 마음이 맑고 깨끗해지면 모든 가치는 스스로를 밝히고 서로를 올바름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모든 시작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고집스럽고 어리석은 마음에서 벗어나 생명의 가장 소중한 가치인 나눔과 감사 회개와 사랑을 되찾는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혼탁한 정신이 아닌 바른 가치와 질서를 되찾는 예수님의 가치에 순명하는 정신입니다.
아무리 좋으신 하느님의 계획도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올바라야 읽을 수 있고 따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징조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맑아지고 깨끗하여 지는 것임을 압니다.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는 회개로 주님을 따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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