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2023년 10월 26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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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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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시편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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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7장 8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로마서 6,19-23)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2,49-53)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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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머물려고 모든 것을 해로운 쓰레기로 여기노라.
루카복음
12장 49-53절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0월 26일 (목)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지성 임마누엘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6:44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26일 (목)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49
📌 강론시작 06:27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26일 (목)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2:33
📌 미사시작 1:01:19
📌 강론시작 1:07:34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예수님께서 세상에 파견되신 목적 두 가지
오늘 복음은 앞서 24일과 25일의 복음에서(12,35-48 참조) 준비되었습니다. 주인, 사람의 아들, 도둑과 같은 설정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파견 목적을 설명하시는 바탕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파견되신 목적을 두 가지로 설명하십니다. 첫 번째,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불은 구약 성경에서 정화(레위 13,52; 민수 31,23 참조), 구분이나 분별(예레 23,29; 이사 22,14 참조), 또는 심판의 수단을(창세 19,24; 탈출 9,24; 이사 43,2 참조)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 여기에서는 ‘심판’의 수단으로 쓰였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심판자의 역할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십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께 기대하였던 역할과 차이를 보입니다. 루카 복음의 탄생 이야기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태어나신 평화의 주님으로 묘사하고 있으며(1,79; 2,14 참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방문하는 집에 평화를 빌어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10,5-6 참조).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시는 분으로 당신을 소개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역할은 시메온 예언자의 예언으로 예고되었습니다(2,34-35 참조). 시메온의 예언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도 있지만 반대하는 자도 나오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그리고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 배웁니다. 예수님의 자기 소개는 우리를 향한 초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자세를 성찰하는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천천히 느리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
생각하지 말고 다음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해 보십시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천재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곡가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부자는?’ 저의 경우 이에 대한 대답으로 모나리자, 아인슈타인, 모차르트, 빌 게이츠를 말했습니다.
이렇게 생각 없이 답변하면 ‘뻔’한 결과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질문이든 처음에 나오는 자동적으로 나오는 대답은 썩 재미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대답이나 의미 있는 대답은 즉각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의식적이고 신중하게 그리고 천천히 나오는 생각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느린 사고를 해야 합니다.
주님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은 결코 즉흥적이지 않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자동으로 나오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철저히 느린 사고를 해야 합니다. 즉, 깊은 묵상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너무 섣부르게 생각합니다. 이 섣부름이 예수님을 자기와 상관없는 분으로 만들고, 예수님이 없어도 된다는 잘못된 판단으로 넘어가곤 합니다.
특히 어렵고 힘든 일이 주어지면,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천천히 떠올리려 하기보다 ‘나를 미워하신다, 불공평하신 하느님이다.’ 등의 불평불만이 즉각적이고 자동적으로 나왔던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그리고 이어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라는 말씀도 하시지요.
아무런 생각 없이 이 말만 들으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예수님은 폭군인가? 예수님은 세상에 불만이 많은 사회 부적응자인가? 등의 생각이 곧바로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천천히 느린 사고를 해보면 그렇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세상의 평화가 아닙니다. 단순히 힘 앞에서 굴복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이루어지는 평화가 아닌, 진정한 사랑으로 함께하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그런 평화를 추구하다 보면, 자기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과정 안에서 분열이 일어납니다.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분열이 일어납니다.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의 불을 심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는 지혜와 용기를 얻습니다.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평화보다 주님의 평화를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천천히 그리고 느린 사고를 받아들여 보십시오. 분명히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진실은 마음가짐이 바뀐다면 현실도 바뀐다는 것이다.
- 플라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령의 불은 새로운 시스템을 창조한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는 ‘불’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있다면 세 사람이 두 사람과 갈라지고 두 사람이 세 사람과 갈라지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불’은 성령님이고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세례를 받으실 때 내려주실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혼자 서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체제와 맞서는 새로운 체제를 갇춘 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란 뜻입니다.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는 사막의 교부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그리스도교 수도회의 창시자로 기억됩니다. 많은 은수자와 수도자들이 있었지만, 그가 수도회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이유는 자신의 카리스마를 실현할 수도회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젊은 안토니오는 약 251년에 이집트에서 태어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고 일찍 부모를 여의었습니다. 어느 날 성당에 들어갔을 때 부자 청년의 복음이 낭독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청년에게 당신을 따르려거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알아듣고는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친척들과 문제가 없었을까요?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다 팔고 사막으로 들어갔고 20여 년을 수련한 후에 거기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교 은둔 수도회의 초창기 형태가 형성된 것입니다.
안토니오에게 떨어졌던 것은 성령의 불입니다. 이는 혼자만 타라는 말이 아니라 많은 이들과 함께 불타도록 만들라는 명령과 같았습니다. 불은 붙어 있는 것들을 함께 태우는 본성이 있습니다. 성령도 그러하십니다. 혼자만 타게 만드는 불은 없는 것입니다.
동방의 수도회 시초가 성 안토니오라면 서방은 성 베네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분은 연대상으로 2백 년 정도 차이가 납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청년 때 로마에서 교육받다 도시의 부도덕한 생활에 실망하여 수비아코라는 곳의 바위 동굴에서 약 3년 동안 은둔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것을 전파하기 위해 수도회를 창설하고 “일하고 기도하라”라는 깨달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체제는 진실보다 강합니다. 공동체는 진리보다 강합니다. 전에도 설명했듯이 바보 마을에서 해시계는 박물관의 전시품으로 전락할 뿐입니다. 진리도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의 공동체에게 합당합니다. 성령은 진리이십니다. 성령의 불이 붙으면 그 불을 유지하기 위해 그 진리에 합당한 체계가 필요합니다. 체제를 변혁시키지 않고서는 성령의 감도가 숨을 쉴 수 없고 실현될 수 없습니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H. pylori)라는 박테리아가 소화성 궤양과 위염을 일으킬 수 있다는 발견은 의학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발견 중 하나였습니다. 이 발견은 궤양이 주로 스트레스, 매운 음식 또는 과도한 위산에 의해 발생한다는 오랜 믿음에 도전했습니다. 이 발견을 한 호주의 두 과학자인 배리 마샬과 로빈 워렌 박사는 수년 동안 의료계에서 거부당해왔습니다.
이에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마샬 박사는 헬리코박터균 배양액을 마셨습니다. 며칠 내에 그는 위염이 발생하여 박테리아가 위염을 유발할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 자체 실험은 위험했지만, 가설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제공했습니다.
그렇다고 경직화된 의학계가 바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연구하는 집단을 세우고 끊임없는 반복 실험과 결과를 제공하자 어쩔 수 없이 의학계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노력이 10년 뒤에 결실을 거둬 둘은 노벨 의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가난을 기본 정신으로 하는 수도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쫓겨났고 교회에서도 쫓겨났습니다. 나중에야 교황이 회개하여 탁발수도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자신만 타는 게 아니라 체제의 변화를 이끄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이전의 공동체와 분열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혼자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쇄신을 일으킬 생각을 해야 성령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나만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성령을 어떻게 나의 공동체에 시스템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성령을 받기에 더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불같이 타오르고 칼같이 끊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얼핏 보면 오늘 주님의 말씀은 의외입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의미가 있고 옳은 말씀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보면 이 분열은 틀림없이 좋은 분열이고 거룩한 분열일 것입니다.
그 분열은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그러나 타파해야 할 그런 분열이 아니고 분명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하느님의 뜻을 지향하는 분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분열은 자기중심적 분열이고 악마적이지요. 우리는 이해득실을 따져 이합집산하고, 좋으면 합치고 싫으면 갈라서는 그런 분열이잖습니까?
그리고 악마가 노리는 것은 늘 하느님 나라를 파괴하고 그 백성을 파괴하고 분열시키는 거잖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분열은 하느님 뜻을 이루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분열이고 그래서 거룩한 분열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평화롭지 못하면서도 평화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평화를 원하면서도 평화롭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일치를 살지 못하면서도 일치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일치를 원하면서도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평화와 일치를 살지 못하는데 거룩한 일치와 분열은 더더욱 살기 힘들겠지요.
그런데 거룩한 일치는 무엇이고 거룩한 분열은 무엇입니까? 거룩한 일치는 하느님 사랑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것이요, 하느님 사랑 때문에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룩한 일치는 알겠는데 거룩한 분열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분열의 두려움이 있지요. 그래서 신자들조차 하느님과의 분열보다 사람과의 분열을 더 두려워하곤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과 정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불의와 타협하며 같이 사는데 그렇지만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일치도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거룩한 분열은 악령들과는 결단코 맞서고 갈라서는 분열이고, 하느님의 뜻에 거역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칼같이 끊는 분열입니다.
어제도 얘기했지만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반대하는 육신의 아버지와 칼같이 갈라서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 아버지로 모시기로 하였지요.
그런데 불의를 칼같이 끊기 위해서는 사랑이 불같이 타올라야겠지요? 뒤집으면 하느님 사랑이 불같이 타올라야 불의를 칼같이 끊을 수 있겠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렇습니다. 함께 타올라야 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을 지르시고 우리는 기쁘게 타올라야 합니다. 더러움을 씻어주고 어둠을 밝히는 세례의 불이 있습니다. 타올라야 불입니다. 뜨거워야 불입니다. 타올라야 빛납니다. 삶도 세례도 하느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과 우리의 가장 좋은 관계의 세례입니다.
새롭게 태어나는 관계의 세례는 아프고 뜨겁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듯 타오르며 뜨거워야 합니다. 불은 불끼리 뭉치며 하느님 나라를 알리는 세례의 불길이 됩니다. 가장 좋은 것은 가장 아픈 것을 먼저 지나갑니다.
세례는 먼저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평화의 중심이신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뜨거운 결단이 필요한 영역입니다. 세상에는 세상의 불과 다른 불이 있고 세상에는 세상의 평화와 다른 평화가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삶인지를 하느님 안에서 새롭고 뜨겁게 만나는 기쁜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세례는 십자가로 평화를 나누고 평화는 세례의 본질을 드러내는 은총이 됩니다. 불을 지르시는 예수님과 함께 뜨거운 사랑을 만나는 빛과 소금의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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