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2023년 10월 25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0월 2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리라. (마태 24,4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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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24장 42.44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로마서 6,12-18)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 오늘 복음
(루카 12,39-48)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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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리라.
루카복음
12장 39-48절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41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42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43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5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46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48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0월 25일 (수)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지환 세례자 요한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6:34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25일 (수)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장화기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0:16
📌 강론시작 08:24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25일 (수)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2:35
📌 미사시작 1:01:22
📌 강론시작 1:07:55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깨어 준비하면서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서 ‘준비’와 ‘깨어 있음’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주제를 이어 가려고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도둑’의 비유와 함께 ‘집사’의 비유를 소개합니다.
어제 복음에서 오실 분은 주인이었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그 대상이 바뀝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상하지 못한 때 도둑이 들어오듯이, 사람의 아들도 이처럼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진술에서 미래의 사건을 예상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함이 강조됩니다. 이는 제자들이 깨어 준비하면서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질문에 응답하시는 방식으로 가르침을 이어 가십니다. 어제 복음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 예시되었다면, 오늘 복음에서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가 비유적으로 제시됩니다.
주인이 집사에게 맡긴 임무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인의 가정을 돌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집사에게 자신이 올 때를 기다리면서 맡겨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리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만일 집사가, 주인이 늦게 온다는 사실을 알고 방만한 생활을 한다면, 그는 주인에게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두 번째 비유, 곧 집사의 비유에서 집사의 불충실한 모습이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사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제자들을 향한 경고는 자칫 나태하고 방만한 생활에 빠져 있을 수 있는 우리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좋은 결과는 좋은 과정을 거쳐야 나올 수 있다
막스 플랑크 생물학적 인공 두뇌학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실험 참가자들을 울창한 숲으로 데리고 가서 ‘직선으로 걸어가라’라는 간단한 지시를 했습니다. 이 숲속에는 실험 참가자들을 안내하는 어떤 표지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방향 감각과 똑바로 걸을 수 있는 능력에만 의존해야 했습니다.
실험이 끝난 후 몇몇 참가자들은 자신이 직선 경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GPS 분석을 관찰하니, 그들은 지름 20미터 이내에서 원을 그리며 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험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의 걷는 방향에 대한 믿을만한 단서가 없으면, 실제로 원을 그리며 걷는다.’
걷는 것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도 이런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즉, 삶 안에서 명확한 이정표가 앞에 없으면, 인간은 말 그대로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원을 그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이정표가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큰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주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지금의 상황에만 계속 매여있을 뿐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있지 않으니 주님 뜻을 제대로 따를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삶 안에서 계속 무엇인가를 하고 있지만 원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준비는 사람의 아들을 맞이할 준비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 오실지 모를 주님이시기에 지금 당장 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러나 우리는 늘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주님을 보려고 하지 않고 그래서 주님의 뜻도 따르지 않으면서, 아직도 많은 시간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지금 나 좋을 대로 살다가 주님만 맞이하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입니다. 결과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좋은 결과는 좋은 과정을 거쳐야 나올 수 있습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좋은 결과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결과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과정 역시 모두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로 가장 빨리 직선으로 가는 방법이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또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는 내게 가장 먼 나라가 될 뿐입니다. 지금 자리에서 맴도는 삶이 아닌, 하느님 나라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당신의 삶은 기회가 아닌, 변화에 의해서 더 나아질 수 있다.
- 짐 론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는 몇 명의 영혼을 구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가?
샤를로트 퍼킨스 길먼의 『누런벽지』 (The Yellow Wallpaper)는 19세기 후반의 여성들이 겪는 정신적 및 사회적 억압에 관한 내용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주인공은 의사인 남편 존, 그리고 그들의 아기가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대형 저택을 임대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서술자는 최근에 아기를 출산한 후 임신성 우울증 또는 신경 쇠약과 같은 조건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존은 아내를 일시적인 신경성 장애로 진단합니다. 그는 그녀에게 휴식을 취하고, 글쓰기나 그림 그리기와 같은 활동을 피하도록 권장합니다.
이들은 저택의 최상층 침실에 머물게 되는데, 이 방에는 누런색의 이상한 벽지가 붙어 있습니다. 서술자는 처음에는 그 벽지를 싫어하지만, 점차 그에게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남편의 권장에 따라 아무 활동도 하지 않게 된 서술자는 점차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집니다.
그녀는 벽지 뒤에 여성이 갇혀 있다고 믿게 되며, 이 여성이 밤마다 벽지를 긁으려고 시도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는 서술자가 점점 더 광기에 빠져들면서, 그녀가 벽지를 완전히 찢어버리고, 그녀 자신이 그 벽지 뒤의 여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이 소설은 여성이 아픈 이유는 남성처럼 공부하고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고 여성은 본래 약한 존재라는 선입견에 맞서는 최초의 페미니즘적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길먼은 그렇게 벽지에 갇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길먼의 아버지는 독실한 종교인이었지만, 가족을 책임지지 않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홀어머니와 어려움 속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결혼한 남편도 결국 길먼의 신경 쇠약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치부하였습니다.
그녀는 휴양하며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금기를 깨고 소설을 씁니다. 여성도 무언가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보수적인 미국에 퍼져있던 무거운 분위기와 홀로 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휴양을 마치고 나와 남편과 이혼합니다. 그리고 여성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녀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의 미국 여성주의자, 소설가, 시인, 강사로, 여성의 권리, 사회 개혁, 그리고 여성의 정신 건강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깨는 많은 변화와 발전을 가져온 여인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더 쉬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만의 길을 간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산길을 간다고 생각해도 이미 나 있는 길과 내가 헤치고 가는 길은 상당한 어려움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무엇이 더 큰 보람으로 남을까요? 어려운 길로 나아가 길을 낸 사람일 것입니다. 의미 있는 일, 보람 있는 일, 결국 행복한 결과를 주는 일은 반드시 그렇지 않은 일보다 어렵고 힘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있음에 당신의 제자들과 일반 신자들의 차이를 말씀하십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더 큰 행복을 위해서는 더 큰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노예 해방을 위해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부와 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조금은 편한 수녀의 생활을 접고 더 힘든 길을 택하여 지금 우리가 아는 모습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태석 신부님도 마찬가지고 온 나라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평생 부담감으로 살아온 축구선수 메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많이 맡기신다는 말은 그만큼 인정해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인정받으면 그만큼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내가 누구이냐에 대한 나의 믿음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하느님이라 하더라도 그만한 능력과 일, 성과가 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의사가 되었는데 진료를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의사가 된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만한 일을 해야 그만한 보람이 옵니다. 그 보람은 바로 내가 믿는 그 사람이 되었다는 자존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로서의 행복을 얻으려면 그만큼 많이 일해야 합니다. 사람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영혼을 구하려는 꿈을 꾸고 있나요? ‘나는 가족도 구하지 못하는데 뭔 큰일을 하겠느냐?’라고 생각하나요? 그러면 나 자신을 벽 속에 가두는 것이 됩니다. 누런벽지의 길먼처럼 벽지를 뚫고 갇혀 있는 나를 꺼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내가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믿을 때 나에겐 더 많은 고난의 십자가가 마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갈 때는 그리스도께서 부활 때 느끼셨던 그 기쁨과 더 가까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그 행실대로 갚아주십니다. 마더 데레사는 천국의 문 앞에 있던 베드로 사도에게 “나는 이 천국을 가난한 사람들로 가득 채우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차이가 나의 자존감, 곧 행복의 수준을 만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정체성에 대하여
요즘 Identity란 말을 많이 씁니다. 정체성 또는 신원이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자기 정체를 잘 알아야 하고 자기 정체성이 뚜렷하고 확고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귀도 주교 앞에서 상속권을 아버지에게 돌려주며 이제부터 육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겠다고 선언한 다음 집을 떠나 어디론가 가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강도가 나타나 누구냐고 물었고 이에 망설임 없이 자기는 위대한 왕의 사신이라고 답합니다.
20대 젊은 나이에 프란치스코는 이미 주님과의 관계에서 이렇게 뚜렷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저는 같은 나이에 신학교에 들어가서도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지 못했었지요.
신학교 첫 수업에 강의실을 잘 찾지 못해 좀 늦게 들어갔더니 칠판에 ‘나는 누구인가?’라고 쓰여있었고 그래서 옆의 친구에게 물으니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10번에 걸쳐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하느님의 자녀다.’ ‘나는 신학생이다.’ ‘나는 누구의 아들이다.’ 이런 식으로 10번을 써야 하는데, 저는 10번을 다 김찬선이라고만 썼습니다.
그해 십여 명의 동기생들이 이 응답을 잘못하여 입학하자마자 퇴학당했는데 그 이유가 5번 이내에 나는 신학생이라는 답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퇴학당하지 않은 것은 제가 교구 신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는데 저는 이때 주님과의 관계에서 정체성은 물론 프란치스칸 정체성도 없었고, 정체성의 혼란이랄까, 아무튼,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상태로 살았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미성숙이고 어리석음입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님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명확히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이고 동시에 주님의 집사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데 개신교 신자들은 서로를 집사라고 부르지요. 형제라는 호칭도 좋지만 주님과의 관계에서 집사라 부르는 것도 상당히 의미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서로 그렇게 부르고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주님의 종이요 집사라는 것은 어떤 것도 내가 주인이 아니고, 하느님이 그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이지요.
재물도 나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고, 내 아내도 나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며, 내 아들도 나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고, 내 형제도 나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며, 심지어 나 자신도 나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니 누구도 그리고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나 자신도 내 좋을 대로 하려고 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싫어서 저는 30대 중반까지 주님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주님’ 하며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 하며 기도했습니다.
사제요 수도자인 제가 그렇게 주님의 종이 되고 집사가 되기 싫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자였습니까? 저라는 인간이! 그리고 그렇게 30년 더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내 좋을 대로 하고 있으니!
집사 노릇에 충실할 때 행복하다고 오늘 주님은 말씀하시는데 나는 행복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제가 이러면서도 그 행복이 참 행복일까요?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결실을 준비한 가을들판이 하나둘씩 비워져 갑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의 맞아들임과 받아들임은 서로를 아프고 힘들게 합니다. 준비하고 맞이하면서 우리는 우리자신을 보게됩니다.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는 것도 이루어지게 도와주시는 공동체의 주님이십니다. 시도조차 해 보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어떻게 태어나느냐 보다 어떠한 삶으로 살아가는 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시련과 고통을 견디고 참아내는 것같이 실패와 아픔도 받아들이는 것이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준비된 삶입니다. 시련이 거세어지면 질수록 맞이하는 은총도 큽니다. 감당해야 할 충실함의 사명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만큼 삶의 자세와 방향 전환이 중요합니다. 이렇듯 준비하는 삶이 최선의 길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을 한번 돌아볼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나쁜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로 깨끗하지 못한 믿음입니다. 준비하는 삶은 마음쓰는 법이며 서로를 밝게하는 지혜의 삶입니다. 게으름이 아닌 불충실이 아닌 새로운 마음과 각오가 참된 준비입니다. 준비하는 실천이 주님의 뜻이며 우리의 진정한 행복임을 깨닫는 오늘입니다. 오늘을 기도와 감사로 다시 시작하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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