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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10/29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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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2023년 10월 29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0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0주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시편 18,2)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시편 18,2)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시편 18장 2절

오늘성경구절이미지_23102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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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탈출기 22,20-26)
    너희가 과부와 고아를 억누른다면 나는 분노를 터뜨릴 것이다.

  • 제2독서
    (테살로니카1서 1,5ㄴ-10)
    여러분은 우상들을 버리고 돌아서서 하느님을 섬기며 하느님의 아드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22,34-40)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0월 29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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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마태오복음
22장 34-40절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0월 29일 (일)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태정 베드로 신부

 

📌 제주 한림성당 소개 00:24

📌 미사시작 01:04

📌 강론시작 16:07

 

 

 

팔로티회 실시간 미사

 

 

2023년 10월 29일 (일)
팔로티회 홍천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0:16

📌 강론시작 09:13

 

 

 

명서동성당 실시간 미사

 

 

2023년 10월 29일 (일)
명서동성당 미사 10시 30분
구성진 율리아노 신부

 

📌 미사시작 06:13

📌 강론시작 18:44

 

 

 

가톨릭스튜디오 실시간 미사

 

 

2023년 10월 29일 (일)
가톨릭스튜디오
원당동성당 미사 11시
이병근 대건 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1:27

📌 강론시작 21:17

 

 

 

성필립보생태마을 실시간 미사

 

 

2023년 10월 29일 (일)
성필립보생태마을
다볼사이버성당 미사 17시
박진호 베드로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10:34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주위의 이웃을 하느님처럼 섬기며 사랑하고 있습니까?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뒤에도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의 공격은 계속됩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21,23-22,14 참조), 바리사이들(22,15-22 참조), 사두가이들에(22,23-33 참조) 이어서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질문을 던집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그 율법 교사는 율법에서 어떤 계명이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지 구분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모든 율법 조항이 도출되는 하나의 원리를 찾고자 하였던 라삐들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조문을 인용하시면서 응답하십니다. 첫 번째 인용된 조문은 ‘쉐마’(‘너희는 들어라.’는 뜻)에 해당하는 신명기 6장 5절입니다. 이 구절은 모든 율법의 근원이자 믿음의 대상인 하느님의 유일성에 대한 신앙 고백을 포함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이 조문을 아침과 저녁, 곧 하루에 두 번 암송하면서 선택된 민족으로서 지녀야 할 정체성을 확인하였습니다. 이 계명은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므로, 하느님을 헌신적으로 사랑하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두 번째로 레위기 19장 18절이 인용됩니다. 

이 계명에 따르면 이웃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을 첫 번째 계명으로 말씀하셨지만, 이웃 사랑도 하느님 사랑 못지않게 중요한 계명으로서 이 두 계명은 뗄 수 없는 ‘하나’의 계명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제1독서에 따르면, 모세의 법은 이웃, 특별히 이방인, 과부와 고아, 가난한 이와 같은 약자에 대한 보호를 중요한 가르침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가 이웃을 대하는 자세를 돌아보게 합니다. 주위의 이웃을 하느님처럼 섬기며 사랑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 나라에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길

 

갑곶성지에 있을 때, 손을 자주 다쳤습니다. 성지 바깥일을 하다가 나무에 찔린 적도 있고, 요리하다가 칼에 베인 적도 있습니다. 강화도 시골길을 자전거 타고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손을 다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책을 읽다가 책에 베인 적도 있지요. 
 
올 초부터 인천 송도에 위치하고 있는 성 김대건 성당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에는 그렇게 손을 많이 다쳤었는데, 이곳에서는 다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갑곶성지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갑곶성지와 달리 이곳에서는 손 쓸 일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방 일도, 또 바깥일도 하지 않으며, 자전거 도로는 잘 되어 있어서 넘어질 일도 없었습니다. 
 
손을 많이 다치는 이유는 손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친다고 손 사용하는 것을 멈춰야 할까요? 아닙니다. 손 사용을 멈출 수 없으니 조심할 뿐입니다. 
 
마음을 다친 분을 종종 만납니다. 어쩌면 이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마음을 많이 쓰기 때문에 마음을 다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처받았다고 마음 쓰는 것을 멈추는 것이 옳을까요? 다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써야 합니다. 멈추는 것이 아니라 조심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을 써야 지혜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사랑 실천하는 데 써야 합니다. 그 과정 안에서 상처받는 것이 싫겠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마음을 써야 합니다. 당연히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랑하는 마음을 크게 보십니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음을 많이 쓸수록 그만큼 다칠 확률이 높아집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도 더 가깝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에는 365개의 금령과 248개의 규정이 있었습니다. 이를 모두 외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또 이를 지키기도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특히 이를 지켜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데, 알지도 못하고 또 지키기도 힘드니 구원의 길에서 제외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쉬운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바로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이 사랑을 마음에 담고, 이 사랑을 실천하면서 마음을 써야 합니다. 물론 아픔과 상처가 가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그만큼 가까워집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악마는 삶의 상처와 어떤 경우에는 실수를 이용하여, 예수님꼐서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 성 마더 데레사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인생 원씽 : 사랑뿐!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가 된 사람들은 무엇이 중요한지 한 가지만을 말해달라고 할 때 주저 없이 말해줄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주식으로 투자해서 엄청난 재산을 모은 워런 버핏은 주식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첫째는 원금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첫 번째 규칙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10년 이상 보유하지 않을 주식은 사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실 주식은 오르락내리락해서 단기투자를 한다면 원금을 손해 볼 일이 있으므로 10년 이상 보유해야 한다는 규칙은 원금을 잃지 않으려는 기본 법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첫 번째 도미노를 알면 나머지 것들은 저절로 쓰러지는 원리와 같습니다. 책 『원씽』의 저자 게리 켈러는 남다른 성과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이 도미노 원리에서 찾고 있습니다. 

“삶은 크고 작은 수많은 문제로 뒤덮여 있습니다. 하지만 우선순위를 세우고 줄을 맞춰 잘 세운다면 최초의 단 하나, 그것만을 움직임으로써 다른 문제들을 저절로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뭐든지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오늘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말합니다. 

사실 이는 쉬운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모세 오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한 구절을 뽑아달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계셨습니다. 율법의 제정자셨기 때문입니다. 

중국 영화 ‘먼지로 돌아가다’(2022)는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잘 보여줍니다. 시골의 가난한 한 노총각이 친척들의 성화에 못 이겨 돈을 얼마 주고 장애가 있는 여인과 혼인합니다. 여자를 한 번도 사귀어보지 못한 남자는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잘해 주려고만 합니다. 

비록 장애가 있지만, 무작정 잘해 주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아내도 무언가 하려고 노력합니다. 남편은 피까지 팔아가며 아내를 위해 일을 하기에 아내는 달걀을 부화시켜 병아리를 태어나게 합니다. 달걀을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둘은 열심히 일하며 집을 지어 동물을 키우며 살아갈 생각에 기쁘기만 합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깨끗하게 보이기 위해 물살이 빠른 수로에서 몸을 씻다가 불편한 다리 때문에 아내가 죽게 됩니다. 

남편은 삶의 의욕을 잃고 가진 모든 것들을 팔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그러고는 자신을 위해 아내가 키운 닭들이 낳은 달걀을 계속 먹으며 자신도 숨을 거둡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삶도 의미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그냥 살았으면 그냥저냥 살아졌을 인생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알고 나서는 사랑이 없는 인생은 살아있는 삶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75년간 연구한 끝에 행복은 사랑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당연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돈이 행복이라 믿습니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더라도 잘되지 않습니다. 

영화 ‘헝거’(2023)는 한 맛집 요리 잘하는 딸이 헝거라는 부자들을 위한 요리사 집단에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았습니다. 그 헝거 대표는 태국에서 가장 유명한 셰프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가난했고 그래서 천대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요리로 부자들을 자기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그는 최고가 되어야 했습니다. 또 그것 때문에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여자 주인공은 그 행패에 이기지 못하고 자기 이름을 딴 다른 식당을 만들어주겠다는 투자를 받아들입니다. 

결국 둘은 한 나라에서 가장 요리 잘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자 스폰서 편에서 남자 셰프가 부자들이 사냥한 천연기념물로 요리하는 사진을 몰래 찍어 그가 감옥에 가게 합니다. 그런데 여자 주인공은 자기도 그 남자 셰프처럼 결국엔 화내고 짜증 내며 남을 이용해 최고가 되고자 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먼저 무언가 되려고 합니다. 부자가 되거나 창조자가 되고, 혹은 심판자가 되려 합니다. 그러며 자신도 모르게 주위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려면 하느님을 부모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형제가 사랑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함입니다. 사랑은 노력이 아니라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면 이웃도 저절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형제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전문가가 되면 자녀들에게도 다 필요 없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만 사랑하면 된다고 가르치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자비하신 하느님의 무자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자비하신 분이시며, 그러므로 우리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웃에게 무자비하면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무자비한데도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우리에게 자비하시겠습니까? 

오늘 탈출기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 

그러므로 힘없는 이들에게 무자비한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무자비하십니다. 힘없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무시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편애가 아니고, 하느님의 사랑은 정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사랑은 편애가 아닙니다. 부자만 사랑하시고 가난한 사람은 사랑하지 않으시지 않고, 부자라고 더 사랑하시거나 가난하다고 덜 사랑치 않으시며, 반대로 가난한 사람만 사랑하시고 가난하다고 더 사랑치 않으십니다. 

지금도 그런 면이 있지만 전에 저는 부자를 좋지 않게 보고, 가난한 사람은 거의 무조건 편들고 도우려는 면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닮으려는 그런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는 고상한 자기 만족감의 차원이 있었고, 부자들에게는 제가 우위를 점하지 못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도움을 통해 우위를 점하는 교만 차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청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자비하시고 그 사랑은 똑같습니다. 다만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청하는 데 비해 부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은 편이지요. 

다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은 정의의 사랑입니다. 불의한데도 괜찮다고 하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말씀하신 대로 불의한 사람에게는 불의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자비이고, 불의에서 돌아서도록 불의에 대해서는 벌을 내리시는 것이 자비인데 그때는 자비하신 하느님도 무자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무자비입니다. 이것이 또한 무자비하신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이 자비를 제대로 알고 실천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듣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함께하는 사랑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단 한번도 우리 주 하느님을 제대로 사랑한 적이 없음을 가장 아프게 성찰합니다. 밥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피와 살을 나누시는 하느님을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중심을 헛짚으며 살았습니다. 삶의 중심이 하느님 사랑이며 하느님 사랑이 삶의 완성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삶이란 가장 중요한 하느님 중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랑의 힘은 더욱 강해집니다. 삶이란 하느님 사랑만을 붙잡고 살아내야 하는 사랑의 참된 여정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익어가게 합니다. 목숨을 거시는 하느님 사랑을 뜨겁게 만납니다. 그래서 사랑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생명의 시간은 사랑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소중한 사랑을 나누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입니다. 사랑을 잃으면 하느님도 잃게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아직도 삶이 신비로운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그 자체로 가장 좋은 은총입니다.

가장 좋은 사랑을 나누는 은총 가득한 사랑의 주일입니다. 온 마음을 다하고 온 목숨을 다하고 온 정신을 다하며 만나게 되는 사랑의 가장 좋은 기쁨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두 하나의 사랑으로 연결됩니다. 사랑으로 생명의 길을 여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삶을 따르는 주일 아침입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하느님을 알게 되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법이 아니라 밥이며 계명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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