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2023년 10월 31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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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3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루카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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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복음 13장 19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로마서 8,18-25)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3,18-21)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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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루카복음
13장 18-21절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그때에
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21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0월 31일 (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준혁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6:29
팔로티회 실시간 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31일 (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 15시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31일 (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 15시 / 매일미사 : 16시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여러분은 하느님의 신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소개합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비유는 각각 겨자씨와 누룩을 은유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두 비유는 동일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한 쌍의 비유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 대한 전반부 이야기(9,51―13,21)가 마무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팔레스티나 지방에 사는 주민들에게 친숙한 식물인 겨자씨를 가지고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첫 번째 비유는 작은 씨앗이 자라서 새들이 둥지를 만들 수 있는 나무로 성장하는 현상을 예시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당신께서 갈릴래아에서 보여 주신 ‘현재’의 모습이 하느님 나라에서 보게 될 ‘미래’의 모습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이어서 누룩의 비유가 소개됩니다. 이 비유는 누룩이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서 덩어리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을 설명합니다. 세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는 감추어져 있지만, 하느님 나라가 지닌 생명의 힘은 세상 전체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합니다.
빵을 만드는 데 밀가루는 꼭 필요한 재료이지만 누룩이 없다면 빵을 만들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의 비유로 하느님 나라의 필연적 성장과 그 역동적 현상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비밀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인간이 지성을 초월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하려면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겨자씨의 성장은 신비로운 신적 권능의 결과입니다.
하느님의 통치가 가져올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이는 신비를 이해할 수 있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비유로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마르 4,11-12 참조). 여러분은 하느님의 신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 조건
“우리는 장애물을 만나 목표에서 멀어지는 게 아니다. 눈앞에 보이는 덜 중요한 목표를 추구하다가 진정한 목표에서 멀어진다.”
미국의 작가 로버트 브롤트의 말로, 크게 공감되는 글입니다. 어떤 사람이 산 정상을 향해 힘차게 걸어가는데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정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얼른 지도를 펼쳐 보니, 예상처럼 산 정상과 전혀 다른 쪽으로 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어떤 마음이 필요할까요?
첫 번째, ‘어차피 길은 하나로 통한다고 하잖아? 가다 보면 다시 정상으로 가겠지.’
두 번째, ‘그냥 산에 가기만 하면 되잖아? 굳이 정상에 가지 못했어도, 이 산은 간 거지.’
이런 마음으로는 산 정상에 오를 수 없습니다. 산 정상이라는 목표를 결정했다면 산 정상만을 바라보고, 그곳을 향해 걸어야 합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목표만을 봐야 합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아들이 다쳤습니다. 다친 아이를 데리고 어디에 가겠습니까? 당연히 병원이고 병원만을 바라보고 바쁘게 뛰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저는 목요일마다 신학교에 가서 강의합니다. 어느 날 강의하러 가기가 너무 싫은 것입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싫다고 가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당연히 강의하러 갔습니다. 반드시 해야 할 중요한 일이기에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인 ‘사랑 실천’이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도 해야 합니다. 나의 구원이 결정되는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목표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 순간에는 작고 중요하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목표를 바라보고 실천해 나갈 때, 목표에 가까워지면서 엄청난 결과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하십니다. 처음에는 작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겨자씨가 나무가 되고 누룩은 반죽을 부풀리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도 점점 성장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라는 목표를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 목표에 가까워지면 어떨까요? 엄청나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나라인 하느님 나라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중요한 것을 과연 소홀히 해야 할까요?
하느님 나라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은 사랑 실천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서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랑의 삶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간은 자신의 모습이 완성됐다고 착각하지만, 누구나 미완성의 존재다. 지금까지 당신이 경험한 대로 현재의 당신 모습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며 금방 바뀐다.
- 대니얼 길버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시계는 태엽만 감을 줄 알면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행복입니다. 행복한 사람이 영원히 삽니다.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면 이 세상에서부터 지옥을 체험하고 결국 그곳으로 갑니다. 우리는 행복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리 안에 겨자씨와 누룩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겨자씨와 누룩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영화 ‘먼지로 돌아가다’(2022)에서 한 중국 시골 노총각은 단돈 4만 원에 장애가 있는 여자를 아내로 사옵니다. 이런 관계가 잘 될 수 있을까요?
결국 잘 됩니다. 노총각은 사랑을 해 보지는 못했지만, 사랑은 주는 것임을 압니다. 아내도 남편의 진심을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내가 사고로 죽습니다. 남편은 더는 살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아내를 따라갑니다.
이 영화에서 남자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사랑을 몰랐을 것이고 그러면 더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을 알고 나서 사랑하지 않는 삶은 사는 게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우리 안에 받아들여야 하는 한 가지는 ‘사랑’입니다. 그것뿐입니다.
시계는 태엽을 감거나 건전지만 갈아주면 저절로 갑니다. 우리는 겨자씨가 어떻게 싹이 터서 어떻게 자라는지 알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겨자씨가 심겨지면 자라서 새들을 쉬게 할 수 있음만 알면 됩니다. 새들은 힘든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사랑이 심겨지면 사람들을 쉬게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도가에서는 이것을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합니다.
누룩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떨어지면 나를 정화시킵니다. 밀가루 서 말은 곧 우리 안의 삼구, 곧 탐욕-성욕-교만을 꺾어 정화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청빈과 정결과 순명의 덕이 생겨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기로 남습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가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는 나 자신이 정화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 붙어있기만 하려니까 저절로 성령의 열매들이 맺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도만 하면 됩니다. 기도란 은총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시간입니다. 성찬의 전례, 말씀의 전례와 같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은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은 후였습니다. 그것을 읽으니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결혼 안 하고 혼자 살 수 있는 에너지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신학교에 들어가서는 성체에서 울려 나오는 다 주셨다는 그분의 목소리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죽을 때까지 사제로 살아갈 힘을 줄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저 사랑을 받아들이면 인간은 마치 다시 태엽기 감긴 시계처럼 째깍째깍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유튜브 동영상에서 한 아빠가 코로나로 식당이 잘되지 않자 새 메뉴 개발을 한다고 힘들어 식당 의자에 앉아 엎드려 자고 있었습니다.
작은 딸아이가 아빠를 찾다가 피곤해서 자는 모습을 보더니 자기 조끼를 벗어 아빠를 덮어드립니다. 아빠는 자고 일어나 자기 등에 아이의 조끼가 있는 것을 알고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은 것입니다.
삶에 힘이 빠진다면 사랑받지 못해서입니다. 그것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기 위해 열심히 진리를 받아들입시다.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고 저 같으면 하.사.시.를 추천합니다. 그리고 기도합시다.
그분께서 성체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느끼기만 해도 그분께서 우리를 감싸주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살 힘을 얻습니다. 연료를 넣지 않고 혼자 움직일 수 있는 자동차는 없듯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는 인간도 없습니다. 우리에겐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래 관조하고 오래 관상하면
누가 더 내세의 희망을 지니고 있을까? 누가 더 내세의 희망을 간절히 바랄까? 이 세상에서 고통이 없고 행복한 사람일까? 그 반대의 사람일까?
틀림없이 이 세상에서 고통이 없고 행복한 사람은 이 세상 행복이 지속되기를 바라지 내세의 희망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 삶이 고통뿐이고 행복이 도대체 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이 빨리 끝나길 바랄 것입니다.
이는 이번 시합에서 패색이 짙은 사람이 이번 시합은 빨리 포기하고 다음 시합이나 이길 것을 희망하며 준비하는 것과 같은 것일 겁니다.
그런데 고통뿐인 사람이 이 세상이 빨리 끝나길 바라는 것은 틀림없지만 이들 모두가 내세 희망을 바라고 더 간절히 바랄지, 이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 바라고 더 바라는 것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 사랑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 사랑은커녕 하느님 존재에 대한 믿음도 없는 사람은, 하느님으로 인한 내세의 희망을 도저히 가질 수가 없겠지요?
사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도 고통이 너무 오래가면 하느님 사랑을 의심하다가 아예 불신케 되고 희망도 꺾이곤 하는데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느님 없는 내세가 있겠습니까? 있다고 한들 그런 내세를 우리가 희망하겠습니까? 하느님 없는 내세를 우리가 살아낼 수 있을 것이며 그리고 살아낼 수 있다고 한들 왜 삽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믿음의 근거이고, 믿음은 우리 희망의 근거입니다. 아니, 이렇게 얘기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믿음의 근거이고,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희망의 근거입니다.
비록 하느님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특히나 고통 속에서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지속되는 고통 속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고 당황하거나 희망을 빨리 포기하지 않고, 지속되는 고통과 고통의 어둠을 관조하고 오래 관상하면, 마치 어둠이 오래되면 어둠 속에서도 보게 되듯 하느님 사랑이 차츰 보일 것이고,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그렇게 희망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내세를 기다릴 겁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겨자씨가 자라나 겨자 나무가 됩니다. 자라나는 모든 순간이 축복의 순간입니다. 지금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오늘도 변화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습니다. 자라나는 기쁨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변화를 살려내시는 변화의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오늘이 자라나는 변화의 오늘입니다. 하느님 자녀들을 위한 변화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모든 것은 한순간입니다. 우리를 위한 구원은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변화가 벗어놓은 옛것들을 주님께 맡깁니다. 변화를 통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씨앗은 변화를 따라 구원의 길을 만듭니다.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시는 하느님 나라의 지극한 사랑의 방식입니다.
지극한 하느님의 나라는 변화의 기쁨 변화를 위한 기다림을 위한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사랑은 자라나는 변화를 믿고 자라나는 변화를 기다려주는 행복입니다. 깨어나는 씨앗과 누룩의 행복입니다.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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