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2023년 9월 9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9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여러분들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콜로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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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새서 1장 23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콜로새서 1,21-23)
하느님께서는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 없게 해 주셨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6,1-5)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복음
루카 6,1-5 장 절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2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5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9월 9일 (토)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병호 세바스티아노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5:57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9월 9일 (토)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 미사시작 07:39
📌 강론시작 13:42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9일 (토)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4:12
📌 강론시작 10:29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9일 (토)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3:10
📌 미사시작 1:03:30
📌 강론시작 1:09:29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화해
오늘 독서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멀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한때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원수들과 화해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길을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마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하느님과 우리를 화해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곧 그분께서는 하느님과 우리가 온전한 관계를 되찾도록 그 사이에서 중개자로서 사명을 다하셨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몸소 겪으신 수난과 죽음이 이 화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해의 중개자로 뽑히신 이유는 바로 그분께서 지니신 충만함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 말씀에 가까운 “그리스도 찬가”(콜로 1,15-20)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신(15절 참조)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그리고 그분을 향하여 창조된 만물은(16절 참조) 온갖 충만함이 머무는 그분 안에서(19절 참조), 그분을 통하여, 그리고 그분을 향하여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20절 참조).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덕분에 하느님과 원수로 지내던 시절을 청산하고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화해는 충만함 자체이신 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고귀한 피의 대가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전히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힌 채 살아간다면, 이는 화해 이전에 하느님의 원수로 지내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그리고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고 이미 화해를 이룬 우리는 언제나 그분 안에 머무르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앞에 거룩한 사람으로 나서며, 우리의 걸음은 계속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베네딕토 수도자들에게 금지한 한 가지
베네딕토 성인은 서방 수도 생활의 초석이 담긴 ‘규칙서’를 쓰셨습니다. 그는 수도원을 세웠고, 그 안의 수도자들에게 절대적으로 금지한 한 가지가 규칙서에 담겨 있습니다.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을 죽이는 것? 교회에서 도둑질하는 것? 여성과 함께하는 것? 기타 십계명에 어긋나는 것들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절대적으로 금지한 한 가지 규칙은 바로 ‘불평’입니다. 규칙서에는 그 내용이 이렇게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어떠한 이유로든지, 어떤 말이나 혹은 표시로라도 불평의 악을 드러내지 말 것이며, 만일 이런 자가 있거든 더욱 엄한 벌을 내릴 것이다.’(규칙서 제34장)
불평만큼 자신을 망가뜨리는 일이 있을까요? 불평 속에 있으면 제대로 행동하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이 역시 죄 안에 빠지게 만듭니다. 또 불평이 커질수록 이를 멈추게 할 방법도 없어집니다. 스스로 멈출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이 안에 하느님의 일이 정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평하면서 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으니, 그 일 자체가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저 역시 불평을 자주 했음을 반성합니다. 내 안에 주님의 자리가 아닌 악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불평보다 인내와 호의를 키울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불평 섞인 의견은 나 혼자만 알고 있다면 어떨까요?
바리사이 몇 사람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지르면서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는 제자들을 보고는 예수님께 불평 섞인 말을 합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겨우 밀 이삭 몇 개 뜯어 먹었다고 시비를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 불평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편에 서지 않고, 또 특별한 권위로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불평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철저하게 예수님 반대편에 서면서 하느님의 자리를 만들지 못하게 됩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이야기하지만, 행동으로 하느님과 함께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참으로 많은 불평 속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고 있습니다. 불평의 악을 통해 마귀의 자리만을 더 크고 화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평을 줄이고 대신 인내와 호의의 마음을 키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기둥이 약하면 집이 흔들리듯, 의지가 약하면 생활도 흔들린다.
- 에머슨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뻐꾸기를 키우는 새가 어떻게 쉴 수 있겠는가?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 먹는 것을 보고는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라고 묻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물음은 곧 ‘구원’에 관한 물음입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6일간의 일을 마치시고 7일째 쉬신 시간입니다.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이렛날 쉽니다. 우리도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나에게 영혼을 구원하라고 일을 시키신 분 안에서 쉬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 모든 영혼을 창조하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당신의 일을 하는 제자들을 보호하십니다. 그분의 집 안에 있으며 그분에게 자기 뜻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그분께 순종하는 새로운 아담들입니다.
영화 ‘비바리움’(2019)은 인간이 왜 고생은 하는데 안식이 있을 수 없는지를 고찰하는 내용입니다. 이야기는 함께 첫 집을 구입하려는 젊은 부부인 젬마와 톰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영화 초반부에 뻐꾸기 새끼와 그가 밀쳐내 떨어져 죽은 다른 새들의 새끼들이 나옵니다.
한 아이가 왜 뻐꾸기는 자기 집을 만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젬마는 그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대답해줍니다. 그리고 떨어진 두 마리의 새끼를 묻어줍니다. 어미는 자신보다 덩치가 큰 뻐꾸기 새끼에게 음식을 물어주며 지쳐갑니다. 이것은 인간이 어떤 법칙에 사로잡히면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인간의 비참함을 보여줍니다.
젬마와 톰은 부동산 중개소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조금 이상한 세일즈맨 마틴을 만납니다. 그는 욘더라는 새로운 개발 주택지를 보도록 초대합니다. 도착하자마자 마틴은 사라집니다. 그들은 욘더를 떠나려고 할 때 어느 방향으로 운전해도 탈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항상 같은 집인 9번으로 돌아옵니다. 결국 그들은 연료가 떨어져서 그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합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안에 아기가 들어 있는 상자와 “아이를 키우고 석방되라”라고 적힌 메모를 발견합니다. 그들은 이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운 곳에 갇혀 자기 아이가 아닌 아이를 키워야 하는 상황에 부닥칩니다. 아이는 부자연스러울 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합니다. 98일째가 되면 아이는 아이보다 어른처럼 행동하고 소름 끼치고 당황스러운 방식으로 톰과 젬마의 소리와 행동을 모방합니다.
톰은 땅이 가짜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탈출구를 찾기 위해 앞마당을 파기 시작합니다. 젬마는 차에 들어가 지난날의 향수에 빠져듭니다. 결국 소년은 이상한 부동산 중개업자 마틴의 복제품으로 성장합니다. 톰은 땅을 파다 지쳐 죽고 맙니다. 아이는 톰을 비닐에 싸서 톰이 파 놓은 땅에 던져버립니다.
분노한 젬마는 소년을 죽이려 하지만 도리어 압도당하고 결국 부상으로 사망합니다. 소년은 역시 젬마도 구덩이에 던져 묻습니다. 이후 그는 여행 가방을 싸고 부동산 사무실로 돌아와 늙어 죽은 마틴의 이름표를 달고 미래의 톰과 젬마처럼 될 순진한 커플들을 맞이합니다.
‘비바리움’은 인간이 동물을 사육하며 감시하고 실험하는 곳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살아간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무언가를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희생합니다. 여기에서 뻐꾸기 새끼, 혹은 마틴이라는 톰과 젬마가 키운 아기는 자기 안의 자아입니다. 탈출기에서는 파라오가 될 것입니다. 그 시스템 안에서는 안식이 없습니다. 그것들에게 이용당하고 죽게 됩니다.
누구나 어떤 시스템이나 법에 지배받습니다. 내가 있는 욘더라는 곳은 내가 지배받는 자아의 시스템입니다. 결국 나는 새로운 법의 시스템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 시스템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됩니다. 그 방법이란 무엇일까요? 뻐꾸기 새끼에게 지배받는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길은 뻐꾸기 시스템을 이길 수 있는 누군가에게 길러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 길러진다면 자기 새들을 죽이는 뻐꾸기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집에 머물려면 인간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제자들은 예수님의 법을 따르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뻐꾸기의 시스템을 벗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분 뜻에 따라서 그분 집에 머물지 않으면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여전히 그들은 자아의 시스템 안에서 안식을 찾으려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벌써 하느님의 집에 머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뜻을 주님께 강요하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이라야 안식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나의 뜻 자체가 나의 안식을 빼앗습니다. 마치 파라오처럼 나를 종살이시킵니다.
오직 주님의 뜻만이 그 뱀의 압제에서 나를 쉬게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안식을 누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떤 뜻을 따르느냐가 어느 집에 머무느냐를 결정합니다. 어느 집이건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뱀의 집에 살면서 안식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따르는 법, 곧 욕구가 내가 사는 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 안에 쉬고 사랑을 할 수 있게 하는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오늘 말씀에서 사람의 아들은 누구이고, 안식일의 주인이란 무슨 뜻일까요? 복음에서 사람의 아들이란 사람의 아들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심은 이 세상사는 동안 하느님의 아들로 행세치 않으시겠다는 의지의 표시인데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우리 인간과 똑같이 되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당신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악마가 깨려고 했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유혹받으실 때나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악령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렇게 해보라는 말로 깨려고 했지만 주님께서는 오히려 이 유혹을 깨고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지켜내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신 겁니까? 그것은 당신이 철저히 그리고 완전히 사람의 아들이 되심으로 사람의 아들인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이 사람의 아들이 되심으로 사람의 아들인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게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주님과 우리 모두를 일컫는 것이며 그러니 사람의 아들이 안식의 주인이라는 말씀도 주님과 우리 모두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다윗과 다윗의 일행이 사제들만 먹을 수 있는 빵을 먹음으로써 하늘의 양식, 천사들의 빵을 훔쳐 먹었던 것처럼 주님과 우리도 하늘의 음식을 훔쳐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이것은 마르코복음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거기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겨난 것이지 사람이 안식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란 뜻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뜻이며 사람과 모든 피조물이 쉬게 하고 그럼으로써 인간이 인간답게 하기 위함입니다. 실로 많은 사람이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일의 노예로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옛날에 시골에 가서 마늘 수확을 같이한 적이 있습니다. 해 뜨면 밭에 나가고 해 지면 돌아와 미사도 드리고 교리도 하곤 했는데 그때 같이 일하시던 할머니 한 분이 ‘나는 사람도 아냐. 소야 소! 그저 눈 뜨면 일만 하니.’라며 푸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안식일이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인간답게 하기 위한 것이고, 안식일 법도 이런 사람들을 인간답게 하기 위한 것인데 부자들은 이 법을 지킬 수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은 정작 지킬 수 없었기에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은 다른 차원에서 성찰할 것이 있습니다. 안식일이 일을 쉬는 것에 그치거나 심지어 노는 것뿐이라면 이것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비신앙인의 안식일일 것입니다.
신앙인의 진정한 안식은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래야 하느님 사랑 안에 잠기고 사랑으로 재충전되겠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을 지내고도 그리고 주일 마사를 봉헌하고도 사랑할 수 없고 일에 지친다면 하느님 사랑 안에서 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안식일이 사랑 안에 쉬는 안식일, 사랑을 할 수 있게 하는 안식일이 되어야겠습니다.
어제 성모님 생일이 왜 2,020회냐는 의문을 제기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2,023회째이니 성모님 생일은 2040회째쯤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우리자신을 알게 하는 안식일의 정신입니다. 안식일의 정신에 먼저 도달하는 사람은 언제나 사람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자라게 하는 안식일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키우는 것은 안식일의 사랑입니다. 안식일의 사랑은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시는 행복한 사랑입니다.
행복과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실천하게 하시는 안식일의 본질이시며 참된 주인이십니다. 사람이 아니라 물질을 섬기기에 안식일은 공허합니다. 결코 물질로 채워질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안식일도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마음을 열면 사람이 보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가치는 사람을 살리는 나눔과 배려입니다. 나눔이 사라진 안식일과 배려가 사라진 안식일은 함께 살아가는 공생(共生)의 정신을 잃어버린 안식일입니다. 완벽한 사람 완벽한 안식일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들끼리 서로 도우며 사는 사람의 안식일입니다.
소중한 안식일의 가치를 짓밟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매정한 마음 이기심입니다. 이기심이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변화되길 기도드립니다. 해야할 일을 실천하는 안식일의 고귀한 실천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사랑을 실천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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