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은 의로우시고 당신 법규는 바르옵니다. 당신 종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2023년 9월 12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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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콜로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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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새서 2장 6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콜로새서 2,6-15)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6,12-19)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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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루카복음
6장 12-19절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9월 12일 (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규성 요셉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30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9월 12일 (화)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이철규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7:20
📌 강론시작 16:38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12일 (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장화기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0:29
📌 강론시작 08:46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12일 (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 성체조배 0:03:19
📌 미사시작 1:03:40
📌 강론시작 1:11:24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 가운데 열두 사도를 따로 뽑으시는 장면을 전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을 뽑으시기 전에 그분께서 보여 주신 행동은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당신의 최측근이 될 사람들을 뽑으시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것도 밤을 꼬박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자주 조명합니다.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고 계셨고, 그때 성령께서 내리시고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3,21-22 참조). 예수님께서는 바쁜 일정 중에도 따로 시간을 내어 기도하셨습니다(5,16; 11,1 참조).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장면의 배경에도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9,18 참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실 때도 그분께서는 기도하고 계셨습니다(9,28-29 참조). 수난을 앞두고 올리브산에 가셔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22,42).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는 중에도(“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23,34]), 심지어 숨을 거두시는 그 순간에도(“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 아버지께 기도드리며 그분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늘 기도하셨습니다. 따로 기도하실 필요가 없어 보이는 그 전능하신 분께서 그토록 많은 기도를 올리신 것입니다. 특히 중대한 일을 앞두시고서는 늘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습니다.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도, 거룩한 변모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때도, 붙잡히시기 전에도, 그리고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도, 아드님께서는 아버지와 끊임없이 대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기도하셨는데, 나약한 우리는 얼마나 더 기도하여야 하겠습니까?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중요한 결정을 하여야 할 때,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아버지 하느님을 찾고, 그분의 뜻을 구하고, 그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기도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스트레스가 모든 병의 원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꼭 그런 것은 아님을 깨닫습니다. 헬스장에서 덤벨을 드는 상황을 떠올려 보십시오. 근력 운동을 할 때 근육은 스트레스를 받고 근육 섬유는 끊어집니다. 이를 나쁜 상황이라고 할까요?
아마 헬스장에서 근육 운동을 하는 사람은 잘 알 것입니다. 근육 섬유가 끊어졌다가 회복할 때 예전보다 더 강해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일주일 후에는 약간 더 무거운 덤벨을 들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신중하게 무게를 늘려가며 1년 동안 열심히 운동하면, 힘이 세지고 몸은 더 튼튼해집니다. 그 이유가 바로 스트레스 때문입니다.
결국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스트레스라면서 무조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 역시 나를 튼튼하게 한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스트레스 자체에 집착하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또 이 고통과 시련으로 이어지는 스트레스를 왜 나에게 생기냐면서 불평불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스트레스 안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힘을 주십니다. 이 기도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도 이 기도를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순히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이 기도라고 한다면, 주님께서 굳이 이 기도를 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신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상황을 떠올려 보면 특별히 중요한 순간에 앞서서 하셨습니다. 세례받으신 뒤 공생활을 앞두고 기도하셨고,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 때에도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도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준비하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열두 제자들을 뽑으시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밤을 새우며 기도하신 것입니다.
왜 기도하신 것일까요? 기도해야 한다는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으신 것이고, 그 뜻에 함께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우리도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단순히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는 식의 청원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고 또 함께할 수 있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안에 머물면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스트레스와 같은 상황에서도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소중하게 있는 것을 아는 일이다.
- 공지영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를 반대하는 사람 한 명 정도는 품을 줄 알아야 그릇이 좀 크다고 볼 수 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를 계획하실 때는 아침 일찍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기둥이 될 사도들을 뽑으실 때는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인재 등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을 배신하게 될 유다를 뽑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느님이신 분이 밤새워 기도하셔서 그러한 인물을 뽑을 수 있으셨을까요? 우리는 이것 역시 그분의 실수가 아닌 그분의 위대함의 일부로 보아야만 합니다.
역사에 보면 위대한 인물 중에 인재 등용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 혼자 힘으로는 성장하는 게 한계가 있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 같이 다 사람들을 잘 뽑고 함께 일할 줄 알았습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라고 다 쳐내는 사람은 큰 그릇이 못 됩니다.
삼국지에서 오나라 임금 손권이 젊은 장교를 장군 자리에 앉히려고 할 때 그 사람을 비난했던 사람을 품을 줄 아는 것을 보고는 안심하고 최고 장군 지위에 앉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가시 같은 사람도 품을 줄 아는 사람이 대인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인재 등용의 신이라 불리는 세종대왕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본인의 능력이 출중했을 뿐 아니라, 아예 능력에 맞는 인재 등용을 목적으로 한 집현전까지 설치한 분입니다. 이곳에서는 분야별 전문가가 양성되었습니다. 능력 중의 능력은 인재를 등용하여 자기 사람으로 삼는 능력입니다. 신숙주가 집현전에서 늦게까지 연구하다 잠이 들었을 때 세종대왕이 자기 옷을 덮어줬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또한 모든 인재를 잘 등용하는 인물들은 자신에게 쓴소리하는 적을 등용하려 하였습니다. 조조는 관우를 그렇게 탐냈습니다. 관우에게 여포가 타던 천리마를 선물로 주었을 때 관우는 이제 정처 없이 도망을 다니는 신세인 유비가 어디 있는 줄 알면 한걸음에 달려갈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적인데도 자신이 잘해 주었음에도 자기를 버리고 가는 관우를 죽이지 않고 보내줍니다.
이 일로 조조는 엄청난 피해를 봅니다. 관우는 조조의 위나라를 많이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약간 소설화된 것도 있겠지만, 조조가 위태로워졌을 때 관우도 조조를 살려주는 내용도 있습니다. 자기를 살려준 은인을 죽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조조는 성격이 포악했을지언정 사람은 잘 볼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위협이 될 적도 품을 줄 알았던 것입니다.
세종대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을 좋아하는 인재만 등용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극도로 반대한 인물이 황희정승입니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은 화가 나서 황희정승을 유배시켰습니다. 세종이 왕이 되자 황희정승은 죽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황희정승의 능력을 보고 그를 등용하고 자기 오른팔처럼 많은 일을 합니다. 너무 일을 시켜서 은퇴도 안 시키고 죽기 직전까지 부립니다. 이것이 세종대왕의 그릇입니다. 감정이 아닌 목표를 위해서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 품을 줄 아는 사람이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리옷 유다를 품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사.시.』를 보자면 두 가지 이유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유다가 사도단 밖에 있었어도 구원이 어려웠습니다. 그가 들어오기를 원하니 예수님께서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죽을 운명을 지닌 그를 곁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뜨거운 용암 속에 떨어지면 그 돌도 용암이 되듯이 당신과 제자들 안에서 유다도 구원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마치 우리 몸의 세균이나 바이러스와 같은 역할 때문이기도 합니다. 온실에서 자란 화초는 비바람이 불면 금방 죽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성덕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유다와 같은 인물이 없었다면 그만큼 강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유다를 통해 더 자기 자신들 안의 죄를 발견하고 그만큼 더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습니다. 유다가 한 번 배신할 때 베드로는 세 번 배신합니다. 그렇게 제자들이 더 겸손해지고 강해지게 하신 이유입니다. 제자들은 그런 유다를 품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나중에는 한없이 묵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게 하신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악이 없다면 우리가 분별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싸움 안에서 강해지고 하느님의 자녀임이 증명됩니다. 그래서 악을 없애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에도 분명 가장 꺼려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를 이익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가 그 사람을 녹일 수 있고 또 그렇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더 강해지는데 도움이 되기에 주님께서 그 사람과 함께 하라고 맺어주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큰 그릇을 가진 신앙인들의 공동체입니다.
큰 포부를 가지고 가시와 같은 사람도 곁에 둘 줄 아는 사람이 됩시다. 세상에 필요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빛이 되기 위해서는 어둠까지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작은 빛으로 둘러싸 어둠을 없애고 그도 빛이 되게 합시다. 이것이 우리를 공동체로 엮어주시는 이유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방전과 충전
어제는 어떤 분의 편지에 답하면서 잘 지내시라는 뜻으로 ‘방전하지 마시고 충전하시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저에게 하는 말이었고 오늘 여러분께도 하고 싶은 말입니다,
지난 주말 몇 가지 일정을 동시에 소화하느라 무척 바빴고 힘이 들었습니다. 젊은이들이 습관적으로 힘들다고 말하며 힘든 일을 도무지 하지 않으려고 하면 힘이 들어야 힘이 들어 오지 힘들지 않고 힘 들어오지 않는다고 충고하곤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힘들게 일하고 나면 힘이 빠져나가기만 하고, 재충전이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제 제가 그런 말을 제게 하듯 그분에게 한 것일 겁니다.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치유하실 때 힘이 빠져나가셨다는 표현이 있는데 혈루증을 오래 앓은 여인이 주님 옷자락에 손을 댔을 때 주님에게서 힘이 빠져나가 치유해주신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고 오늘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주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힘을 쓰지 않고 어떤 일을 이룰 수 없고, 주님께서 그 많은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서도 엄청난 힘이 소모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밀려드는 모든 사람에게 주님께서 계속 치유하실 수 있었던 것은 저와 달리 방전하신 다음에는 즉시즉시 충전을 잘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마트 폰 충전기를 늘 가지고 다니는 것은 요즘 풍속도이고, 여기저기 충전 서비스가 있고 버스에도 충전기능이 있어서, 즉시즉시 충전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스마트 폰 충전은 즉시즉시 잘하는데 정작 우리 자신은 그러지 못하고 그래서 방전되고 맙니다. 그래서 요즘 흔한 말 중의 하나가 ‘Burn Out’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국제 질병 기구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번아웃 증후군 곧 무기력증을 일컫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힘든 일로 힘이 완전하게 소진되고 재충전이 안 되면 더 이상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 되는 증상인데 충전기로 치면 완전 방전이 되고 나면 더 이상 충전이 안 되는 다시 말해서 충전기가 완전히 고장 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사랑 충전과 힘의 충전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자주 하지만 의무 기도를 많이 하거나 청원 기도만 많이 한다면 사랑 충전이나 힘의 충전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전만 하고 충전은 하지 않는 나는 아닌지, 즉시즉시 충전하는 것을 놓치며 사는 나는 아닌지, 우리의 기도 생활을 돌아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는 밤을 세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이미 기도가 되어 계시는 기도의 주님이십니다. 삶을 적시고 영혼을 흐르는 기도를 멈추게 할 순 없습니다. 기도를 닮아 있는 우리를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럴 때는 기도하십니다. 기도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를 향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기도는 가장 좋은 지혜이며 가장 좋은 선택입니다.
기도는 사랑으로 이어지는 가장 좋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먹으며 하느님의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공동체 또한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일치를 이룹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하느님께서 계시듯 사람과 사람 사이 또한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는 구원의 시작입니다. 맡겨드림의 시작을 축하드립니다.
걸어가야 할 길이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기도에 응답하는 기도의 삶입니다. 이미 우리 삶에 너무 깊이 들어오신 간절히 기도의 주님이십니다. 오늘도 기도의 힘을 주십니다. 가장 선한 사람의 모습은 바로 기도의 모습입니다. 생명은 기도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기도란 우리의 모든 삶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기도는 신앙이며 신앙은 부르심이며 부르심은 감사이며 감사는 뜨거운 기도입니다. 기도로 새 날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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