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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9/11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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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은 의로우시고 당신 법규는 바르옵니다. 당신 종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2023년 9월 11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9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손을 뻗어라 (루카 6,10)

 

손을 뻗어라 (루카 6,10) 루카복음 말씀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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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복음 6장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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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콜로새서 1,24―2,3)
    과거의 모든 시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를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려고 나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6,6-11)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9월 11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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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루카복음
6장 6-11절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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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9월 11일 (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박원구 라파엘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07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9월 11일 (월)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7:39

📌 강론시작 16:01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11일 (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5:29

📌 강론시작 13:08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11일 (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3:16

📌 미사시작 1:02:22

📌 강론시작 1:10:16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손을 뻗어라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회당 한가운데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여기서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것’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는 행위를 가리키고, ‘남을 해치는 일’과 ‘죽이는 것’은 그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이라서 그를 고쳐 주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이는 법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해치고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들에도 좋은 일을 하는데, 거룩한 안식일에는 더더욱 그러한 일, 곧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사람의 안식, 휴식을 위한 날로 제정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지나친 노동에 시달릴 수 있는 이들의 딱한 처지를 고려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 쉬셨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휴식할 수 있는 날을 따로 마련하여 주신 것입니다(탈출 20,10-11 참조). 

엄격한 규정으로 사람들이 정말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게 하거나,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하는 것이 안식일 법의 본디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한 일이나 생명을 구할 기회가 생기면, 그것을 하는 것이 오히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몸소 행동으로 보여 주십니다. 

“손을 뻗어라.”

우리가 속한 크고 작은 공동체 안에도 그 나름의 규정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내규를 잘 지키려는 의지와 태도는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러한 규정의 취지나 목적을 이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그 규정을 올바로 지키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하였던 율법 학자들처럼, 단순히 규칙 지키기에만 몰두하는 모습, 또는 규칙이니 무조건 따르라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모습은 경계하여야 합니다. 혹시 맹목적인 ‘율법주의’가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생각과 감정은 몸에 영향을 준다.

 

마음과 몸은 통합되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생각과 감정은 몸에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는 반대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의 움직임은 마음가짐에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미소 짓거나 인상을 찌푸리면 또는 친절한 표정이나 화난 표정을 지을 때 감정이 이를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연구 대상자들이 화난 사람의 표정을 흉내 내자 심박수와 피부 온도가 올라갔고 기분이 나빠졌다고 밝혔습니다. 
 
얼굴뿐 아니라 우리 몸 전체가 기분을 바꾸는 데 쓸 수 있습니다. 플로리다 애틀랜틱 대학교 심리학자 세라 스노드그래스는 연구 참여자를 두 그룹으로 나눈 후, 각 그룹에 3분간 특정한 자세로 걸으라고 요청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 팔을 앞뒤로 흔들며 큰 보톡으로 걷게 했습니다. 자신감과 낙관적인 기분을 외부로 드러내는 걸음걸이였습니다. 두 번째 그룹에는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발을 끌며 작은 보폭으로 걸으라고 했습니다. 낙담한 채로 생각에 잠긴 상태일 때의 걸음걸입니다. 이 두 그룹 중에서 3분간 ‘행복한’ 산책을 한 그룹이 다른 그룹보다 더 기분이 좋아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음과 몸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생각만으로도 몸을 튼튼하게 할 수 있으며, 몸의 움직임만으로도 행복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몸도 마음도 다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강하게 비판합니다. 율법을 모독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고발할 생각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과연 튼튼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튼튼할 수 없었고, 행복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손이 오그라든 사람과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었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면 당연히 고발된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마음이 오그라든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온유한 마음을 갖고서 사랑 실천에 집중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야 마음을 활짝 펼 수 있고, 이에 따라 몸도 마음도 평화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랑이신 주님을 받아들여서 오그라든 마음을 쫙 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받아들이고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오그라든 그 모든 것을 활짝 펴주시기 때문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생은 끊임없이 배우고,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안주하지도, 안일하지도 않으면서 늘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정은 반드시 이 두 범주 안에 속한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면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회당 한 가운데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그를 일어나 가운데 서라고 명하십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그러나 그들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을 치유해주십니다. 

아이들도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해야 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쯤은 압니다. 그런데 왜 많이 배운 사람들이 그 쉬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할까요? 그들의 의도와 감정이 비뚤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옛날 제나라 때의 일입니다. 대낮에 어떤 사람이 금은방에 들어와서 금을 훔쳐 달아나다가 즉각 포졸에게 붙잡혔습니다. 포졸은 그를 끌고 가며 말했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많이 보고 있는데 금을 훔치다니 네가 제정신이냐?”

그는 대답했습니다. 

“금을 잡을 때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욕구는 우리 눈을 멀게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넘어뜨리려는 욕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니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들처럼 눈이 멀어 멸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모를 때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자신에게 질문하면 됩니다. 

“내가 지금 하려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인가, 죽이는 일인가?”

『삼국지』에서 유비는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한 왕국의 황제가 되기까지 엄청난 발전을 거듭한 인물입니다. 유비가 잘했던 것은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특별히 관우와 장비는 의형제를 맺은 사이입니다. 

위, 촉, 오, 이렇게 세 나라가 힘의 균형을 맞추며 서로 티격태격할 때였습니다. 이미 상당한 위치에 올라간 관우는 전쟁에서 패하고 손권에게 붙잡힙니다. 손권은 관우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으나 관우는 유비만을 섬기겠다면 죽음을 택합니다. 

그런데 복수를 하고 싶어도 힘의 우위 상 유비의 촉나라는 손권의 오나라를 칠 여력이 안 되었습니다. 남의 나라를 빼앗으려면 적어도 병력이 두 배는 되어야 하는데 촉나라는 오나라의 반밖에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의형제의 복수를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유비에게 장비가 찾아옵니다. 장비는 어떻게 의형제가 죽었는데 가만히 있느냐며 유비가 안 가면 자신 혼자서라도 오나라로 쳐들어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겁이 난 부하들에게 살해당합니다. 

유비도 더는 버틸 수 없습니다. 세상이 자신을 지켜보기 때문입니다. 의형제로 자신을 위해 죽은 관우와 장비를 그냥 모르는 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비는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직접 오나라로 쳐들어갑니다. 오나라 장수는 유비의 교만함을 더욱 자극하기 위해 계속 패전하는 척하며 뒤로 후퇴합니다. 

그러자 유비의 진영은 하나로 뭉친 것이 아니라 길게 늘어서는 꼴이 되었습니다. 오나라는 이때다 싶어 약하게 된 진영에 불화살을 퍼부어 전멸시켜버립니다. 나라의 거의 모든 군인을 데려가서 몰살당한 상태이기에 유비도 마음의 병이 들어 그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습니다. 

황창현 신부님에게 100억을 기부한 할머니의 사연은 놀랍습니다. 강도들이 할머니를 납치해 며칠 동안 차 트렁크에 싣고 다니며 돈을 빼서 썼는데 할머니를 죽이자, 혹은 살리자는 의견으로 갈렸다고 합니다. 

이때 그들이 차에 넣어져 있는 황 신부님의 CD를 듣고는 살려주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죽이든지, 살리든지 말도 안 되는 것으로 고민하다가 주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만나면 제대로 판단할 줄 알게 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 오로지 살리려는 마음밖에 없으셨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을 때 어떤 마음일까요? 살리려는 마음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온 세상을 지배하는 이치는 살리려는 마음입니다. 죽이려는 마음이 아니라 살리려는 마음만 있다면 하늘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비와 관우와 장비는 살리려는 마음이 아니라 명분 때문에 다 죽었습니다. 그나마 나라까지 세운 상황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는데, 관우는 자신과 아들의 목숨까지 명분을 위해 바쳤고 장비는 부하들의 마음을 무시하고 원수를 갚으려다 부하들 손에 죽었으며 유비도 그 명분 때문에 자신과 수많은 병사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과연 그 명분이 이렇게 많은 이들을 죽게 한다면 꼭 지켜야 할 필요한 명분이었을까요? 명분도 눈을 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살리려는 마음이 아니라 죽이려는 마음 때문에 눈이 먼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이것만을 물으셨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인지, 죽이는 일인지. 우리도 살면서 판단의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물어봅시다. 내가 내린 결정이 나를 죽이고 이웃을 살리려는 것인지, 내가 살려고 이웃을 죽이려는 것인지.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이 두 범주 안에 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모기 아니면 예수의 결정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고 사람을 살리려는 것이라면 하늘의 이치에 맞는 것이고 그만큼 하늘에 가까워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고통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고통은 인간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그러니만큼 인간은 누구나 이 문제를 풀어야 하고, 그래서 사람마다 또 종교마다 대처하는 법이 다릅니다. 

가장 흔한 태도랄까 대처는 고통을 무척 싫어하고 더 나아가 두려워하여 일단 도망치고 보는 회피형입니다. 사실 고통이란 것이 본래 내가 싫어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면 고통이 아니고 즐거움이 되겠지요. 

노래는 즐겁다고 하지만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나 즐거움이지 너무도 싫어하고 지겨워하는 사람에게 노래는 고통일 뿐이겠지요. 그런데 어린이나 어린이처럼 미성숙한 사람은 무조건 도망칩니다. 

두 번째 유형은 어쩌면 정반대인데 함몰형입니다. 고통을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 하고 고통에 빠진 다음엔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형입니다. 그래서 고통만 보고 고통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고통 밖에 그러니까 고통 말고 다른 것이 많아도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마라톤을 뛸 때 처음에는 제가 이러했습니다. 한 20km 구간까지는 비교적 마라톤을 즐기며 뛰고, 같이 뛰는 사람도 보고 주위 풍경도 보며 뛰는데 25km를 넘으면 서서히 고통에 사로잡히게 되고, 35km를 넘어 나머지까지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오로지 고통과 싸웁니다. 

그러다가 몇 차례 뛰고 난 뒤 ‘마라톤 성찰’을 합니다. 우리 인생이 마라톤과 같다고. 그러니 우리 인생을 이렇게 고통밖에 보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귀중한 인생 마치면 되겠는가 하는 성찰입니다. 

그래서 마라톤을 뛰며 고통만 보지 말고 다른 것들도 보고 의미를 보자고 생각이랄까 자세를 바꾸는데 그렇게 한 10여 차례 뛰고 난 뒤에는 그 고통을 주님의 고통이나 그때 큰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을 위해 봉헌하며 뜁니다. 

고통을 사랑으로 바꾸고, 고통을 봉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사랑이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이며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 주님의 고통에 동참합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제’라는 표현을 씁니다. 전에는 안 그랬었는데 이제 고통을 기쁘게 겪는다는 것이고, 이웃을 위해 주님처럼 고통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봉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어떤 단계인지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비추어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오그라든 사람들 한가운데에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누가 우리에게 오고 있는 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아픈 이야기를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오십니다. 삶의 이야기를 주님께 묻습니다. 

언제나 시간의 한가운데에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손을 뻗으시며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오그라들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그라든 영혼이 아닌 자유로운 영혼이길 바라십니다. 안식일에도 우리를 살리시는 주님께서 오그라든 아픔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예수님께로 마음을 뻗어나가는 것이 우리 마음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입니다. 

일어나 가운데에 서는 삶이 바로 깨어있는 삶입니다. 오그라들면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깨어있는 삶은 쥐고 있는 것을 우리가 놓는 것입니다. 놓아야 사랑할 날들이 펼쳐집니다. 쏟아지는 은총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그라든 손을 뻗어 사랑의 중심이 하느님이심을 가리킵니다. 손을 뻗는 우리의 영혼이며 일어나 가운데에 서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기쁜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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