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3/09/10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9. 10.
반응형

 

주님, 당신은 의로우시고 당신 법규는 바르옵니다. 당신 종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2023년 9월 10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9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3주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로마 13,8)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로마 13,8)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로마서 13장 8절

오늘성경구절이미지_230910.jpg
0.32MB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에제키엘서 33,7-9)
    네가 악인에게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 제2독서
    (로마서 13,8-10)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18,15-20)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9월 10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마태오 복음
18장 15-20절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9월 10일 (일)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황재호 안토니오 신부

 

📌 은평성모병원 소개 00:23

📌 미사시작 00:47

📌 강론시작 15:35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9월 10일 (일)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8:18

📌 강론시작 18:44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10일 (일)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4:59

📌 강론시작 13:2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죄지은 형제를 올바른 길로 이끌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복음 말씀은 교정을 시도하는 절차를 세 단계로 구분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그의 죄가 불필요하게 알려지지 않도록 먼저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이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릇된 행동을 깨닫고 회개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설득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개인적인 노력이 그다지 효력을 가지지 못하면, 두 번째 단계로,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그를 다시 타일러 보는 것입니다. 주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그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마저도 효과가 없다면, 마지막 단계로, 교회가 나서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 단계에 걸쳐 충분히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그 사람의 완고함이 계속될 경우, 마침내 교회는 판단하게 됩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부분은 교회가 그런 완고한 자에게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기보다는, 그가 회개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 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수치심을 일으킬 목적으로 꾸짖거나 면박을 주는 것은 올바른 교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발심만 불러일으킵니다. 교정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는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미움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 때문에 타이르고 설득합니다. 레위기는 형제를 바로잡아 주는 일이 이웃 사랑의 계명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레위 19,17-18).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이 뉘우치는 데 충분한 기회를 주고 있습니까? 그 사람이 답이 없다며 너무 빨리 포기하여 버리는 것은 아닌지, 또는 그 사람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수치심을 주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놓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또 많은 죄를 덮어 줄 것입니다”(야고 5,20).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일의 무게가 달라진다.

 

한 관광객이 이탈리아 여행을 갔습니다. 길을 걷다가 건물을 짓는 공사판으로 들어서게 되었지요. 그는 한 노동자에게 다가가 “무엇을 하는 중입니까?”라고 묻자, “벽돌을 쌓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관광객은 계속 걸어가다가 먼저 만난 노동자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이번에도 똑같이 “무엇을 하는 중입니까?”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이 노동자는 “벽을 세우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관광객은 두 노동자와 똑같은 일을 하는 세 번째 사람을 만나서 역시 같은 질문인 “무엇을 하는 중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동자는 아주 특별한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성당을 짓는 중입니다.” 
 
똑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일의 무게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반복적인 일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즉, 자신의 시선에 따라 기쁨과 희망의 일상이 될 수도 있고, 무의미한 일상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다는, 그래서 일상의 삶을 특별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일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사는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만남도 의미있는 만남이 되어야 하지, 그저 그런 만남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만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일상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함께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을 사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그저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삶을 사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면서 나의 이웃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곳에 주님도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뒤를 충실하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 공동체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를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 안의 일치는 주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며 살아가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공동체 안의 일치보다는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너무나 큰 노력을 쏟아붓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함께 계신 주님을 떠올리면서,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본인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실천은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책임질 준비를 하는데서 나온다.

- 디트리히 본 회퍼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님께서 왜 당신이 직접 우리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시고 교회에 그 권한을 위임하셨을까?

 

오늘 복음은 매우 교회론적입니다. 왜 교회에 예수님께서 묶고 푸는 권한을 주셨는지 설명합니다. 누구의 죄든 먼저 혼자 가서 타이르고 안 되면 둘이나 셋이, 그것도 안 되면 교회에 알리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께서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하신 말씀처럼 교회에도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당신께 오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치 아드님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에 반기를 든 사람이 마르틴 루터였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죄 용서의 권한을 주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 권위를 부정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각자가 다 사제이기 때문에 직접 예수님께 죄를 용서받으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교회에 죄 용서 권한을 주시고 파견하셨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인간이 예수님께 죄를 용서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유용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만든 예수님을 상정해놓고 그냥 용서받을 것이라고 믿고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실제로는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며 예수님께 용서받았다고 믿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2003년 12월 19일, 당시 나이 24세였던 이 씨는 자신의 6살짜리 아들과 5살짜리 딸을 동작대교 위에서 한강으로 던져 죽게 하였습니다. 기자가 “왜 같이 안 죽었어요?”라고 물었을 때 그는 “기독교인이라서 자살은 못 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기자가 “기독교인인데 사람 죽이는 건 괜찮아요?”라고 묻자 그는 “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가톨릭 신자라면 그런 죄를 지을 수 있었을까요? 만약 자신이 한 행위를 직접 예수님이 아니라 사제에게 고백해야만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제보다 더 쉽게 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먼저 교회에서 죄를 용서받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 안에 흐르는 용서의 힘의 효과입니다. 인간에게 죄 용서의 힘을 주셨다면 나에게도 그 힘이 미치고 있음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용서는 먼저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할 수 있게 됩니다. 

토니 던지는 미국 프로 미식축구 리그 역사상 최악의 팀들을 최고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결승에서 번번이 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005년 성탄절에 끔찍한 비극이 닥쳤습니다. 던지의 큰아들, 제이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힘이 팀 전체를 감쌌습니다. 모두가 감독을 위로하기 위해 전적으로 감독을 믿고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다음 해에 콜츠는 역사에 남을 명경기로 역전승하며 우승을 차지합니다. 

피는 성령과 같습니다. 교회 안에도 용서의 힘인 그 피가 돌고 있습니다. 피는 모든 세포 안으로 스며듭니다. 그 피가 곧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누군가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뜻은 그 본성으로 모인다는 뜻입니다. 개는 인간이 죽었을 때 모이지 않습니다. 본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을 입었고 그 본성이 우리 심장에 피로서 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가더라도 그도 한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줄 힘이 있음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것으로는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걸으면 나도 할 수 있다고 믿게 합니다. 그 용서의 권한이 인간에게 주어졌음을 믿는 믿음은 각 개인이 누군가를 용서하게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게 고정원 씨처럼 용서가 불가능하게 보이는 사람까지도 용서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각 개인의 용서를 위한 힘은 용서의 권한이 주어진 교회의 일원이라는 믿음으로 강화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닌 교회에 와서 용서받고 용서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 사랑을 대신하는 우리 사랑

 

어리석은 얘기인지 모르지만, 용서해 주는 사랑과 교정해주는 사랑 가운데 어떤 것이 더 큰 사랑일까? 용서해 주는 사랑과 교정해주는 사랑 가운데 어떤 것이 하기 더 어려울까? 

교정해주는 것이 용서해 주는 것보다 더 어렵고, 그렇기에 교정해주는 것이 더 큰 사랑일 것입니다. 

용서해 주는 것은 용서받는 사람이 반기고 고마워하는 것이지만 충고해주는 것은 충고를 받는 사람이 싫어하는 것이고, 충고를 사랑이 아니라 미움으로 받아들이기에 하기 더 어렵지요. 

실로 충고를 교정을 위한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믑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척 성숙한 사람이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기 잘못을 고침으로써 자신도 행복해지고 충고해준 사람도 사랑의 보람을 느끼게 하겠지요. 

문제는 충고를 거부하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것입니다. 거부하는데도 충고를 계속해야 하겠습니까? 

사실 충고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예상될 경우만 충고한다면 앞서 봤듯이 거의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에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충고를 받아들이건 말건 우리는 나의 사랑으로 충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내 안에 없으면 아예 충고할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하고, 그럴 때 우리 안에 그를 위해서건 나를 위해서건 사랑부터 채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충고하려면 사랑이 내 안에 차오르도록 먼저 나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프란치스코의 권고대로 잘못한 그에 대한 연민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분노가 연민보다 크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충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를 마음 아파하지 않고 오히려 그 형제의 영혼에 자리를 잡게 된 죄를 마음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충고할 때 공동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나의 사랑만으로 안 되고 나의 충고만으로 안 될 때 그것으로 포기하지 말고 공동체 힘을 빌려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랑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다시 말해서 사랑의 의지로 간신히 충고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조금 있던 사랑마저 날아가 버리고 분노하거나 비난으로 바뀌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가 마음을 모아 청하면”이라고 하십니다. 내 사랑만으로 안 될 때 그것으로 포기하거나 뒤에서 비난하지 말고, 내 작은 사랑만으론 불가한 것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같이 기도하자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는 이런 청을 받아들여 같이 기도하고 같이 포용해 들여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충고할 때 하느님 대신 충고해야 합니다. 오늘 에제키엘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사실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대신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우리 사랑을 결코, 작게 여기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고, 그러니 충고 역시 함부로 하거나 즉흥적으로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대신하는 만큼 나의 사랑을 하느님 사랑으로 키워 충고해야겠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형제적인 삶의 길을 제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공동체는 형제적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그만큼 공동체를 위한 공동체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공동체적 사고는 화해와 수용 협력이라는 인간성 회복으로 전개됩니다. 

인간성 회복은 인간적 유대와 배려를 통한 신뢰와 믿음입니다. 형제적 관계로 우리가 다시 만나고 화해하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통하여 우리가 가야 할 성숙한 자유와 욕망의 절제를 배우게 됩니다. 

서로를 향한 이해와 나눔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공동체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은 형제에 대한 책임을 동시에 지니는 것입니다. 삶의 본질은 조화와 협력이며 공생과 상생입니다. 

협조와 수용 화해와 성찰이 공동체의 올바른 실천이 됩니다. 복음적 공동체는 파괴가 아닌 창조를 실천합니다. 창조적 삶은 다름 아닌 존중의 삶으로 드러납니다. 다양성을 소중히 여기고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의 애정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삶이 변화의 기쁜 삶입니다. 어려움과 고통은 나의 십자가로부터 발생합니다. 우리 자신의 십자가와 화해하는 방법을 안다면 우리는 누구와도 화해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형제를 다시 얻는 공동체의 힘에서 기쁘게 체험하는 편안하고 행복한 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친절과 경청 조화와 행복은 공동체에 주시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