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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9/06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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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2023년 9월 6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9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루카 4,42)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루카 4,42) 루카복음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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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복음 4장 4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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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9월 6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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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복음
4장 38-44절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38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39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41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2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4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9월 6일 (수)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병호 세바스티아노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6:40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9월 6일 (수)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 미사시작 03:37

📌 강론시작 11:23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6일 (수)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장화기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0:56

📌 강론시작 09:30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6일 (수)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 성체조배 0:01:00

📌 미사시작 1:01:11

📌 강론시작 1:09:2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예수님의 일과는 어떠하셨을까요?

 

루카 복음서는 그분께서 카파르나움에서 보내신 하루를 소개합니다(4,31-44 참조).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가시어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때마침 회당에는 더러운 마귀에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자 그분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주변으로 퍼집니다(어제 복음).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향하신 예수님께서는 심한 열에 시달리던 그의 장모를 고쳐 주십니다. 해 질 무렵이 되자,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병을 앓던 이들을 모두 그분께 데려갑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어 그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 들린 이들도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러고 나서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서야 고을 밖 외딴곳으로 향하시는데, 군중은 그곳까지 예수님을 찾아가 자기들을 떠나지 마시라고 애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고을에도 복음을 전하여야 할 사명을 밝히시며 그곳을 떠나십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등, 카파르나움에서 보내신 하루와 비슷한 일상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바쁜 일정을 보내셨던 예수님께서는 제대로 음식을 드실 겨를조차(마르 6,31 참조), 편안히 쉬실 겨를조차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당신의 처지를 두고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무엇을 위하여 그토록 열심히 사셨을까요? 복음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고,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고, 치유되며,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안식일에도, 곧 유다인이 일하여서는 안 되는 그날에도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신 예수님을 못마땅해하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하느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표현이 무척 감동적으로 들립니다. 오늘도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일하고 계실 아버지 하느님과 아드님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의 하루는 어떠한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날마다 좀 더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 특히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살아가면 어떨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남을 도우며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사랑을 실천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따르기 위한 것일까요? 함께 사는 세상 안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일까요? 언젠가 어느 신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다른 본당에서 어렵다고 모금을 나와도 절대 도와주지 않습니다. 몇 년 전, 어느 성당에서 성당 건축을 위해 모금을 와서 우리 본당도 어렵지만 훨씬 더 어려운 것 같아서 공동체가 함께 도와줬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그 본당에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본당은 낡은 오르간인데, 그 본당에는 파이프 오르간이 있더라고요.” 
 
어쩌면 자기보다 못한 사람만 돕겠다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 본당보다 더 멋진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도움을 꼭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만 주는 것일까요? 더군다나 도움받은 본당 사람들도 자기들이 받은 도움을 기억하면서, 다른 이에게 많은 나눔을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함께 사는 멋진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또 도움을 주는 것은 상대방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아일랜드 리머믹 대학교 크리벤 박사 연구팀이 봉사활동과 정신 건강의 관계를 살피기 위해 설문 조사를 시행했습니다. 2만 7천 301명을 대상으로 평소 봉사활동을 자주 하는지와 우울증을 겪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결과 봉사활동을 자주 하는 사람일수록 우울 증상이 적게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건강을 위해서라도 도움 주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봉사활동은 곧 나를 위한 영양제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 이유를 들어 영양제를 먹지 않는 어리석음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십니다. 시몬의 장모는 열이 가시자마자 즉시 일어나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시중을 들었다고 복음은 전해줍니다. 이 장면을 묵상해 봅니다. 사실 사위가 가정을 책임지지 않고 밖으로만 돌아다니는 모습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화병‘이 난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치유를 받게 되지요. 정신적인 치유인지, 육체적인 치유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던 상태에서 해방됩니다. 그 이후 장모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곧바로 일어나 시중을 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게 되거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처음에 감사했던 마음을 곧바로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께도 간절히 기도했다가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새하얗게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곧바로 행동했다는 것이지요. 
 
사랑의 실천은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나만 잘되면 그만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만 돕겠다는 생각도 아니고, 곧바로 일어나 주님을 섬기는 행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실패한 자가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한 자가 패배하는 것이다.

- 장 파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지도자는 새벽마다 삼고초려 하듯 기도해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파르나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느닷없이 다른 곳으로 떠나겠다고 당신을 찾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외딴곳으로 가신 이유를 압니다. 바로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새벽 기도 안에서 오늘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정이 된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만약 기도도 안 하고 떠나겠다고 하셨다면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변덕쟁이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정이 기도를 통해 듣게 된 하느님의 뜻임을 느끼면 그들도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한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는 자신보다 더 큰 힘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가 갈라지고 허물어집니다.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 공동체를 이끌려면 공동체가 분열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분열시켜 자기 자리를 유지하려 하기도 합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는 한겨울에 한 아파트만 빼고 모든 건물이 무너진다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그 유일한 아파트로 몰려와 몸을 녹이고 음식도 나누어 먹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파트 주민들은 결국 이병헌을 중심으로 그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려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병헌도 그 아파트 주민이 아니었습니다. 주민에게 꾼 돈을 받으러 왔다가 그 사람을 죽이고 자신이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파트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곧 굶어 죽고 얼어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병헌은 자신이 아파트 주인인 것처럼 보이려고 도를 넘으며 행동하다가 결국 대표에까지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아파트 주민이 아닌 사람들을 밖으로 내몰고 자신들만의 천국으로 만들어갈 때쯤 이병헌이 아파트 주민이 아님을 아는 한 여자아이가 들어옵니다. 그렇게 공동체는 의심으로 분열됩니다. 나중에 자신이 아파트 주민이 아닌 것이 들통나자 이병헌은 그 아이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며 그 아이가 모든 것을 망쳤다고 다시 일치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공동체는 와해하고 밖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빼앗겨버립니다. 

이 영화는 사람들에 의해 어떤 자신들보다 초월적인 능력이 있어야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신들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 그는 지도력을 잃게 되고 그러면 공동체가 분열되고 와해합니다. 이병헌은 자기 능력으로 공동체를 이끌려 하다가 결국 망하게 되는 지도자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왜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이 새해만 되면 용하다는 무당을 찾을까요? 왜 예전에 모든 왕이 자신들은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려 했을까요? 자기 힘만으로는 공동체를 이끌 자격이 없음을 스스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삼국지』에서 유비는 시골 흑수저 출신에서 초나라를 세운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관우와 장비, 조자룡 등과 같은 충신들이 있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과 함께 싸우며 50이 넘도록 도망 다닐 때는 그의 지도력이 오직 그의 덕에만 의존하였습니다. 그를 따르던 이들도 끊임없는 패배 속에 지쳐가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초자연적인 능력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인간의 한계를 넘는 능력을 지닌 자의 뜻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한 능력을 갖춘 이가 제갈공명이었습니다. 작지만 한 나라를 세우려는 이가 시골 선생인 공명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삼고초려’입니다. 

유비는 이렇게 천체의 신비까지 읽을 줄 안다는 제갈공명을 전략가로 삼아 그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모든 이가 힘을 낼 수 있었고 그 이전까지 두 번 싸워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던 것이 이젠 승률이 80%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공동체가 하나가 되려면 같은 지향과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기찻길의 두 선로가 목적지까지 함께 이어질 수 있는 이유는 목적지가 같기 때문입니다. 그 지향과 목표는 분명 한 사람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란 자신들과 같은 부족한 인간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얼마나 많은 결심을 하며 얼마나 많은 약속을 어깁니까? 

예수님께서 새벽마다 기도하시는 모습을 제자들도 보고 군중들도 보았습니다. 이것은 일부러라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한 인간으로 보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이 당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으로 여겨집니다. 이렇게 되어야만 공동체에 분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치의 중심이 나여서는 안 됩니다. 모두에게 나를 보내신 분의 뜻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그 경외심이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사제가 새벽에 기도하면 신자들은 어느 정도 경외감을 가지게 됩니다. 분명 주님의 뜻을 묻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제의 결정에 반감을 품는 사람이 줄어듭니다. 그렇게 본당에 일치가 이뤄집니다. 그러나 사제의 결정이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여겨지면 공동체가 분열됩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먼저 새벽에 기도하고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아내도 따르고 자녀도 따릅니다. 일치의 중심을 나로 삼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도 아버지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음을 아침부터 보여줘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완전한 믿음

 

"우리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때면 늘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합니다." 

사실 악마를 믿는다면 모를까 하느님을 믿는다면서,내게 믿음은 있지만 사랑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취지의 얘기를 지난주 테살로티카서를 묵상하며 한 바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이웃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믿음이 거짓이거나 불완전하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 신자들이 주님께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칭찬하고, 이 주님께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천국의 희망에 근거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신앙의 모범이라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과 저세상을 아우르는 참신앙이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신앙이 아예 없는 사람도 있고 사랑이 뭐냐며 사는 사람도 있으며, 신앙과 사랑이 있더라도 이 세상용 믿음과 사랑만 있거나 저세상용 믿음과 사랑만 있는 사람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있지만 이웃 사랑은 없으며 하느님을 믿는 것도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복을 주시기만을 바라며 믿기에 매우 이기적이고 현세 구복적인 신앙생활을 하다가 복은커녕 화가 미친다고 생각되면 그 신앙마저 그만두는 사람도 꽤 있지요. 

물론 천국의 행복만을 바라며 이 세상에서의 행복은 포기하고, 가족도 포기하고 재물도 사이비 교주에게 갖다 바치는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저세상에서도 불행한 신앙인도 꽤 많습니다. 신앙은 있는데 정신이 병이 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의 믿음은 희망에 터하고 사랑과 행복으로 증명되는 완전한 믿음을 살아야 하는데 이것을 콜로새 신자들에게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아무리 어렵고 아무리 힘들더라도 반드시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들 삶의 본질과 삶의 중심과 삶의 방향을 가르쳐주시는 예수님의 사명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삶의 변화를 불러 일으킵니다. 실천하시고 실현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만납니다. 

만남으로 만들어지는 기쁜 소식입니다. 기쁜 소식은 우리의 삶과 우리의 마음에 길이 되고 행복이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 순간을 기쁘게 살게 하는 행복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나눔과 배려로 마음의 상처를 보살펴 줍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를 몸소 실철하시며 보여주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함께 사랑하고 함께 실현하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몸소 실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는 생명력이 없고 말씀대로 실행하지 않는다면 기쁜 소식은 삶의 현장에서 가까운 소식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 (一擧手一投足)이 하느님 나라이며 기쁜 소식입니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더욱더 간절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인 예수님의 사랑과 지혜이며 실천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른 실천에 인색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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