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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9/04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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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2023년 9월 4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9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루카 4,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루카 4,18) 루카복음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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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4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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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테살로니카1서 .4,13-18)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4,16-30)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9월 4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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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루카복음
4장 16-30절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그때에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9월 4일 (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정한 베르나르도 신부

 

📌 교황님 9월 기도지향 00:24

📌 미사시작 00:37

📌 강론시작 07:20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9월 4일 (월)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10시)
전두병 요아킴 신부

 

📌 미사시작 10:12

📌 강론시작 18:59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4일 (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4:57

📌 강론시작 12:52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4일 (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8:16

📌 미사시작 1:07:02

📌 강론시작 1:15:3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연중 제22주간부터 우리는 평일 복음에서 루카 복음서를 읽게 됩니다. 그 첫날인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 나자렛으로 향하십니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여러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신 뒤에 고향을 방문하시는데(마태 13,54-58; 마르 6,1-6 참조), 루카 복음서에서는 고향 방문이 그분 공생활의 시작에 나타납니다. 

루카 복음서의 나자렛 이야기는 예수님 활동의 서막을 올리며 앞으로 전개될 그분의 행적과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요약하여 미리 제시하는 기능을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전체는 구약의 예언, 특히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름부음으로 주님의 영이 내리셨다는 말씀은 세례를 받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머리 위로 성령께서 오시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3,21-22 참조). 

그는 앞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는”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루카 복음서에서 전개되는 예수님의 활동들은 이 예언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메시아의 앞길은 성공과 승리가 보장되는 듯 보였으나, 예수님께서는 이와 전혀 다른 수난과 패배의 길을 걷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겪을 그 비극적인 운명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공생활의 장엄한 시작을 알리는 단락임에도 그 시작부터 위기에 놓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함께 그리고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을 밖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시는 모습은 뒤에 당신의 백성에게 배척당하실 모습을 암시합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 전체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공생활의 시작(나자렛 설교)에서 마침(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을 그려보며, 그 여정이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구원하시는 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천 년 전 사람들에게 구원의 실현을 알리시던 이 말씀은 같은 복음을 듣고 있는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함께하는 노력이 필요해

 

국제선 비행기를 타면 좌석 앞에 비행경로를 볼 수 있는 모니터가 있습니다. 이 지도를 계속 보고 있으면, 비행기가 도무지 이동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옆에 나와 있는 거리와 비행시간 등의 숫자의 변동을 통해 어떻게든 가고 있구나 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런데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다가 깜빡 잠들 때가 있습니다. 곤히 자고 난 뒤, 몇 시간 만에 눈을 뜨면 깜짝 놀랍니다. 글쎄 모니터의 지도에 표시된 비행기의 위치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 지켜보고 있을 때는 전혀 이동하지 않는 것 같은데, 몇 시간 만에 바라본 지도의 비행기는 목적지에 상당히 가까워졌음을 깨닫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이제 막 주님을 알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분이 과연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을까요? 또 주님과 함께함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꾸준히 주님과 함께하는 노력, 즉 미사, 기도와 묵상, 사랑 실천 등을 통해 어느 순간 주님의 현존을 깨닫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사랑도 삶 안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과 함께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함께하면서 때로는 삐딱하게 나아가기도 합니다(비행기 안에서 잠드는 것처럼).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주님께로 돌아간다면, 어느 순간 주님의 현존을 뜨겁게 느낄 것입니다. 감사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에 가시어, 안식일 날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당신 자신의 신원을 소개하십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기쁜 소식을 전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그분과 같은 출신, 같은 혈통이라는 것이 구원을 보증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구원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입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면서 놀라기만 할 뿐,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이것만으로 구원이 보장될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함께하지 않는다면 구원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굳은 믿음도 생기지 않고 각종 고정관념으로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이유가 늘어날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과 함께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자신과 너무나도 가까운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생에서 가장 슬픈 세 가지
할 수도 있었는데, 했어야 했는데, 해야만 했는데.

- 루이스 E. 분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면 마음이 가난하단 증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당신 소명을 밝히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 이사야의 당신께 대한 예언을 읽으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영이 내리면 분명 눈먼 이들을 보게 하고 잡힌 이들을 해방시키며 은혜로운 해가 선포됩니다. 그런데 그 기쁜 소식은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이란 재물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아가 죽어 겸손하게 된 이들이란 뜻입니다. 

2011년 제가 유학을 다녀와 오산 성당에서 처음으로 본당신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이 마흔이 되어 처음으로 본당신부를 하게 되었으니 그 열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레지오 훈화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한 커다란 교리실에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신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것을 창문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레지오 회합치고는 인원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구성원을 보니 연령회장님도 있고 사목회 위원들도 있어서 그야말로 짬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다 성당에서 굵직한 봉사를 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모두 놀라는 분위기였습니다. 뭐 하는 집단이냐고 물으니 ‘울뜨레야’를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디선가 들어보긴 했는데 그것이 무슨 단체인지는 잘 몰랐습니다. 열심히 하시라고 하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사조직 같았습니다. 

얼마 있다가 저도 꾸르실료를 다녀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꾸르실료 이후를 울뜨레야라고 합니다. 저는 그 단체 분위기가 왠지 내가 다녀오지 않으면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어차피 본당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분들이 다 받았다는 꾸르실료 교육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3박 4일의 일정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 내용은 비밀이라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갓 박사학위를 따고 들어온 저로서는 그 가르침이란 것이 매우 유치해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빡빡한 일정 안에서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저를 위해 많은 기도를 해 주셨던 분들에게 죄송하기는 하였습니다. 

어쨌거나 그 교육을 받으니 사목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꾸르실리스따들도 저를 인정해주는 분위기였습니다. 그거면 된 것입니다. 그 교육에 보니 신자들은 사제에게 순종해야 하는 내용도 있어서 사목하기 좋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 교육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며 예수님을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는 배울 게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자신들을 무시하는 처사에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리려 합니다. 이 교만이 부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이끌어줄 사람을 찾고 그런 사람을 찾기 위해 더 알려고 노력합니다. 교만한 사람에겐 그래서 복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가난한 사람에게 전해집니다. 

그런데 5년 뒤 제가 꾸르실료 회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영성관으로 발령을 받게 됩니다. 그 이후 6년간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교육을 보며 많은 분들이 그 짧은 시간에 회개하고 변화하고 새로운 봉사자로 태어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 번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때는 그렇게 부정적이었는지 모릅니다. 복음은 진정 와서 봐야 합니다. 그래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한 번 체험하는 것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꾸르실료 교육만큼 우리 신앙을 빠르게 성장시키는 교육은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조금은 겸손해졌습니다. 지도신부를 맡았으니 모르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꾸르실료에 관한 모든 책을 읽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저를 변하게 만들었던 것은 신학교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성체는 은총이고 말씀은 진리입니다. 이 은총과 진리가 한 데 버무려지면 사람이 새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꾸르실료 교육안에 그 은총과 진리가 가득함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게 됩니다. 이 교육이 복음이고 새로운 자녀를 탄생시키는 매우 좋은 교회의 모델이 될 수 있음을. 

그 이후 저는 꾸르실료 재교육도 만들고 교육 내용도 나름대로 수정하며 더 나은 꾸르실료 교육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조금은 새로워진 교육으로 많은 분들이 새로 태어나고 있습니다. 더 많은 분이 교육받으면 좋겠지만, 사정상 선택된 몇 분들만 받게 되는 것이 마음 아플 뿐입니다. 이 교육이 분명 기름 부어진 교육이었는데 마음이 가난하지 못할 때는 저에게 복음이 되지 못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겸손이 지혜입니다. 지혜를 많이 쌓아서 어린이처럼 겸손해지면 복음이 나를 새로 태어나게 할 믿음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다른 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전하는 사람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인 가난한 이들의 삶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영적 개안의 기쁨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오늘부터 우리 전례는 루카 복음을 읽는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신 곳이 당신의 고향, 나자렛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카파르나움에서 시작하여 나자렛으로 가신 것으로 복음은 얘기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고향에는 왜 가셨을까? 그리워서 가셨을까, 부모를 만나러 가셨을까, 아니면 가파르나움에서의 성공을 고향에서도 거두고, 그래서 고향 사람들로부터도 인정을 받기 위해서 가셨을까? 

만약 인정을 받기 위해서라면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아시는 분이 왜 가셨을까? 

그런데 묵상을 하다 보니 이런 의문을 가지는 것 자체가 제가 얼마나 세속적이고 인간적인지를 보여주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설마 그런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이유로 고향을 방문하셨겠습니까? 주님께서 저와 같이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분이셨다면 예언자는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함을 잘 아시면서 굳이 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타향과 고향을 가리지 않고 가야 할 당신의 행보를 계속하시는 겁니다. 당신이 오심으로 하늘나라가 누구에게나 가까이 왔음을,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오셨음을, 당신은 누구보다도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까이 오셨음을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하시지만 사람들은 다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거나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고향 사람들은 요셉의 아들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고향 사람들의 첫 반응은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을 좋게 말하면서도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입니다. 요셉의 아들이 고향을 떠나 큰 인물이 되어 온 것까지는 좋지만 큰 인물 이상의 존재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인성 안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너무도 어려운 것이고, 특히 고향 사람들, 어렸을 때부터의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것이니 너무 나무랄 수도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고향 사람들을 보면서 나를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뿐 아니라 모든 사람 안에 신성이 숨어 있는데 나도 고향 사람들처럼 그것을 보지 못하는 눈먼 사람은 아닌지. 

주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눈먼 이를 다시 보게 하는 분이신데 그 주님을 믿는다면서 아직도 나는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고 있고, 그래서 영적으로 보는 것은 실패하는 사람은 아닌지. 

그러니 모든 사람 안에 그리고 모든 것 안에 숨어 있는 신성을 발견한다면 우리도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 안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눈먼 사람에게는 당신 안에 계신 하느님을 나처럼 발견하라고 외칠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기쁘게 전하고, 영적 개안의 기쁨을 소리 높여 외치는 행복에로 초대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말씀과 주님이 한 몸이 되는 오늘이라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말씀으로 오늘이라는 하루가 활짝 열립니다. 말씀으로 하느님을 만납니다. 

비극과 희극 사이에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힘겹게 들어올립니다. 말씀으로 위로받고 말씀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말씀으로 오늘의 마음을 뜨겁게 만납니다. 서로의 만남이 애틋한 것은 주님 말씀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길은 서로를 살리는 말씀의 길입니다. 매일매일 받아 먹어야 할 말씀이라는 양식입니다. 가장 좋은 말씀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갑니다. 말씀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오늘을 듣게 하고 오늘을 사랑으로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 삶에서 말씀이라는 인격을 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을 우리에게 빌려주신 하느님께 말씀을 봉헌합니다. 

말씀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오늘입니다. 말씀으로 잃어버린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격을 되찾습니다. 말씀의 거울에 비친 소중한 우리자신을 만나는 은총 가득한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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