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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9/05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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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2023년 9월 5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9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1테살 5,11)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1테살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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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살로니카1서 5장 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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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테살로니카1서 5,1-6.9-1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4,31-37)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9월 5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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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루카복음
4장 31-37절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때에 

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34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36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3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9월 5일 (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문희 아우구스티노 신부

 

📌 교황님 8월 기도지향 00:22

📌 미사시작 00:37

📌 강론시작 07:11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9월 5일 (화)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진슬기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미사시작 08:40

📌 강론시작 16:35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5일 (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11

📌 강론시작 06:44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5일 (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0:38

📌 미사시작 1:00:20

📌 강론시작 1:07:26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설교에서(어제 복음) 앞으로 펼치실 구원 사업의 성격을 미리 드러내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본격적으로 공생활 여정을 시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서에 나타나는 첫 번째 기적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기적으로 구마(驅魔)를 하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의 직무를 더 넓은 차원에서 바라보도록, 다시 말해 초자연적이고 종말론적인 배경에서 그분의 활동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세상의 권세를 휘어잡던 사탄의 세력은 큰 위기에 부딪습니다. 더러운 마귀에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소리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귀는 예수님과 자신이 적대적인 관계에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당신’(예수님)과 ‘저희’(마귀들) 사이에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거룩함’과 마귀의 ‘더러움’입니다. 

성경에서 거룩함은 하느님의 고유한 특성으로 이해됩니다. 이야기 속 마귀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특성을 공유하시는 분(‘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시자 자기들을 멸망시키러 오신 분이심을 알고 극도로 경계하며 그분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무엇보다 더러운 악의 속박에서 인류를 해방하시고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분의 구마 행위는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리라.’(4,18 참조)는 나자렛 설교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얼룩진 더러움의 세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어 거룩한 나라, 곧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게 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거룩하신 예수님과 더러운 악령들 사이에 어떠한 접점도 찾을 수 없듯이,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도 악의 세계와 어떠한 것도 공유하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이 하여, 하느님을 경외하며 온전히 거룩하게 됩시다”(2코린 7,1)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기본에 충실할 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사람이 아무런 도구 없이도 할 수 있는 순수 맨몸 운동으로, 상체와 가슴 근육 더불어 전신의 핵심 근육들을 균형감 있게 단련시켜 주는 운동은 무엇일까요? 아마 딱 생각나실 것입니다. 팔굽혀펴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팔굽혀펴기의 숫자를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꾸준히 팔굽혀펴기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숫자가 늘어났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팔굽혀펴기를 정상적으로 하기에 힘이 부족하다면서 무릎을 땅에 대고 팔굽혀펴기를 해도 되냐고 묻습니다. 이 역시 효과가 있으며, 힘들다고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편하게 하다 보면 잘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도 가질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렵고 힘들어도 또 지루하더라도 정상적으로 팔굽혀펴기를 하는 것이 제일 효과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운동도, 공부도, 기도도…. 어쩌면 기본에 충실할 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쉽고 편한 방법만을 생각하지요.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 주님과 함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멈추지 않고 기도, 묵상을 하면서,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 있습니다. 
 
카파르나움에서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이 소리는 사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베드로가 말했던 고백과 거의 일치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베드로에게 했던 칭찬이 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권위와 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권위는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까지도 고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참된 권위를 배워서 세상의 모든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단 한 번의 기도로 가능할까요? 또 주님과 함께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도 단 한 번의 선행과 자선만으로도 충분할까요? 

아닙니다. 단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편법이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우직하게 주님의 뜻을 따르는 성실함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어떻게 나아가고 있을까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주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은 나중에 하는 게 아니라 지금 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에.

- 위지안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절대 가까이하면 안 되는 사람 1호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악령을 쫓아내십니다. 악령은 예수님을 보자 이렇게 소리칩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틀린 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보고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왜 쫓아내시는 것일까요? 사실 마귀의 신앙고백과 베드로의 신앙고백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악령의 신앙고백을 봅시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말을 해버립니다. 그리고 이 말이 악령들이 하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고백한다고 그분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분에게 영향을 받아야 그분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악령은 그분에게 영향을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신앙을 잘 고백하고 나서 예수님께서 죽으시면 안 된다고 말했다가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분을 자신의 틀 안에서 규정하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규정한다는 말은 교만해졌다는 뜻입니다. 내가 그 사람보다 크기 때문에 그 사람을 규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를 규정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조종하게 됩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비행기를 운전할 때 그것들을 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건드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우리가 자동차는 일일이 규정할 수 있겠지만, 비행사가 아니라면 비행기는 규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조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화 ‘레베카’(2020)의 줄거리입니다. 여기서 여자 주인공은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레베카는 영화 제목이지만 사람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레베카란 이미 죽은 인물이 여자 주인공을 규정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젊은 여자 주인공은 몬테카를로의 부유한 반 호퍼 부인의 동반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최근에 상처한 영국 부자 가문의 막심 드 윈터를 만나고 그들은 서로에게 반하게 됩니다. 짧은 친분에도 맥심은 청혼하고 주인공은 수락하여 영국에 있는 맥심의 조상 집인 맨덜리로 향합니다.

맨덜리는 맥심의 고인이 된 아내 레베카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새로운 드 윈터 부인은 이 거대한 재산을 관리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녀는 특히 레베카에게 여전히 헌신하고 있는 수석 가정부인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를 어렸을 때부터 키운 당사자로 새 주인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댄버스 부인은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새 신부를 폄훼하고 레베카의 우아함과 능력을 끊임없이 상기시킵니다. 

특히 소름 끼치는 장면 중 하나는 댄버스 부인이 주인공이 레베카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것뿐임을 말하는 장면입니다. 새로운 드 윈터 부인은 자신이 레베카를 대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남편 맥심도 레베카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혀 그녀를 냉소합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사실 레베카는 타살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인 사람은 남편 맥심이었습니다. 레베카는 다른 남자들을 집에 불러들여 불륜을 저질렀고 아기까지 임신했다며 자신과 이혼할 수 없는 착한 남편을 가스라이팅하였습니다. 

새 아내가 자신을 떠나려 하자 맥심은 이 모든 사실을 고백합니다. 드 윈터 부인은 이제 남편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해 그를 무죄로 풀려나게 합니다. 그러자 그들을 막다른 길로 이끌었던 레베카의 불륜남과 댄버스 부인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비록 댄버스에 의해 맨덜리 저택은 불타버렸지만, 둘은 세계를 여행하며 사랑을 이어갑니다. 

이 영화에서 이름 없는 새 신부 드 윈터 부인과 맥심 드 윈터는 각자 댄버스 부인과 레베카에 의해 심리적 지배를 당했습니다. 누군가 심리적 지배를 하려 할 때는 그 상대를 작게 만들어야 합니다.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란 이미 죽은 인물로 드 윈터 부인을 작게 만들었고 레베카는 자기 남편을 다른 남자들과 비교하며 기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랑과 믿음으로 그 심리적 지배를 이겨냈습니다. 우리를 규정하고 작게 만들려는 이들이 우리가 멀리해야 할 가장 안 좋은 사람들입니다. 사실 영화 ‘사도’에서 보면 영조가 사도 세자에게 그러한 가스라이팅을 했습니다.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면 자기가 죽습니다. 

오늘 악령은 예수님을 규정해서 자신들의 뜻대로 이용하려 하였습니다. 이것이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당신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규정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마칠 때까지 그분은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세례자 요한을 보며 사람들이 그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지 궁금해한 것과 같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규정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규정한 범위를 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면 보복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악령을 쫓아내시거나 그들을 뚫고 나가십니다. 

우리도 조심합시다. 당신을 규정하는 사람을 예수님도 가까이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멀리 해야 할 사람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도,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돈을 꾸어서 갚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나를 규정하여 가두고 자신 맘대로 조종하려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빛의 자녀로 살기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빛이나 낮의 자녀는 어떤 사람이고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리고 밤이나 어둠에 속했다는데 밤이나 어둠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절망의 상태 그러니까 희망이 전혀 없어 앞이 캄캄한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만약 이런 뜻이라면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은 절망에 빠진 사람이 되겠습니다. 

옛날에 ‘어둠의 자식들’이란 소설이 인기를 끌었고 그래서 영화화되기도 했지요. 여기서 어둠의 자식들이란 윤락과 온갖 범죄가 들끓는 뒷골목사람들을 일컫는데,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어둠도 이렇듯 죄의 세계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런 뜻이 없지 않지만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 어둠의 자식이란 빛 속에 있지 않은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고, 빛이란 빛이신 그리스도를 일컫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과 연결하면 주님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악령과 같은 존재입니다. 어제도 봤듯이 주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분인데 악령은 주님을 구원자가 아니라 멸망시키러 오신 분으로 여기고 그래서 자기와 아무 상관하지 말고 떠나가달라고 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진짜 어둠은 빛이신 주님 안에 있지 않음입니다. 절망이나 죄의 어둠도 실은 빛이신 주님 안에 있지 않은 결과입니다. 주님 안에 있지 않을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되고, 주님 안에서 살지 않을 때 우리는 죄의 자식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거부하는 어둠의 자식이 아니라, 그리고 어둠에 털버덕 주저앉아있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빛의 자녀로 살아가고픈 뜨거운 열망이 있어야겠지요. 

그런 열망에서 저는 오늘 화답송의 시편을 사랑하고 이 시편 가사에 곡을 붙이기도 했는데 저나 여러분 모두 시편이 노래하는 그런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홀로 고요와 침묵의 사랑을 지키고 실천하시는 예수님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언제나 말씀의 권위가 있습니다. 말씀의 권위는 우리모두를 위한 사랑의 권위입니다. 

도움을 청해야 할 예수님을 아직도 우리는 모른 채 살아갑니다. 예수님 이름을 알고 있었으나 이제는 이름조차 잃어버린 우리들 믿음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믿음 때문에 갈등이 있고 분열이 있습니다. 

믿음은 알고있다는 교만마저 내려놓고 믿음의 길을 따릅니다. 믿음은 흥정을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고요로부터 옵니다. 고요와 침묵으로부터 오기에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씨끄러움에 마비된 우리의 생활이 고요와 침묵을 찾게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사람과 사람 공동체와 공동체를 이어주는 것은 시끄러움이 아니라 오히려 고요와 침묵이라는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어둠과 거짓을 타고 들어오는 모든 것은 공동체를 씨끄럽게 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녹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번잡한 시간 번잡한 고백이 아니라 먼저 삶을 가리키는 말씀을 우리가 듣는 것입니다 시끄러움은 이제 나가고 예의를 아는 고요와 침묵이 공동체의 중심이길 기도드립니다.

 침묵의 여정을 거치지 않는 시끄러움은 어느 누가 치는 것이 아니라 시끄러움이 시끄러움을 쳐내는 어리석움과 비웃음이 됩니다. 조용하고 기쁜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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