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빛나고,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믿는 이들에게 힘을 주시는 하느님, 복된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에게 뛰어난 설교의 은사를 주시고 박해를 꿋꿋이 견디어 내게 하셨으니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굽히지 않는 인내심을 본받아 저희의 믿음도 굳세어지게 하소서.
2023년 9월 13일 (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9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너희는 행복하다. (루카 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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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복음 6장 22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콜로새서 3,1-1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여러분 안에 있는 것들을 죽이십시오. - 오늘 복음
(루카 6,20-26)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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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루카복음
6장 20-26절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그때에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9월 13일 (수)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장승필 안드레아 신부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소개 00:05
📌 미사시작 01:38
📌 강론시작 0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9월 13일 (수)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 미사시작 07:38
📌 강론시작 16:01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13일 (수)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01
📌 강론시작 10:32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13일 (수)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 성체조배 0:02:20
📌 미사시작 1:01:57
📌 강론시작 1:13:48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차이
오늘 예수님께서는 행복과 불행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서가 아홉 가지 행복 선언을 전하는데(5,3-12 참조), 루카 복음서는 네 가지 행복 선언에 이어서 네 가지 불행 선언을 함께 나열합니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 선언들 각각은 서로 대칭을 이룹니다.
곧 가난한 이들과 부유한 이들(첫째 선언), 지금 굶주리는 이들과 지금 배부른 이들(둘째 선언), 지금 우는 이들과 지금 웃는 이들(셋째 선언), 그리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이들과 환대를 받는 이들(넷째 선언)이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자의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겪고 있는 암울한 상황과는 정반대로 밝은 미래를 맞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며 울지만 하느님 나라가 올 때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고 배부르게 되며 웃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후자의 사람들을 두고는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현재 누리는 것과 정반대의 암울한 상황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부유하고 배부르며 웃는 사람들은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은 것이며, 하느님 나라가 오면 오히려 굶주리고 슬퍼하며 울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여 모은 재산으로 여유롭게 사는 것, 먹고 싶은 것을 사 먹고 좋아하는 취미나 여가 활동을 즐기면서 그 나름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소소한 행복도 느끼면서 살아야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달콤함에 점점 익숙해지는 것, 곧 지금의 삶에 만족하려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이 말씀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나’에게 경고합니다. 이와 비슷한 경고의 말씀도 귀담아들읍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2.5.16).
현실이 주는 위로가 크면 클수록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위로가 설 자리는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추구하여야 할 참행복은 바로 하느님 나라에 있습니다. 그것을 차지하려면 현세에서 누리는 달콤함과 적당히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네가지 행복과 네가지 불행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아이가 조금이라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가 있습니다. 이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기에 절대 넘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하고는 이를 위해 온 힘을 기울입니다. 아이가 일어나 앞으로 한 발짝 가려고 할 때마다 부모는 바로 아이를 안아 올렸습니다. 혹시 넘어져서 다치거나 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이는 걷는 법을 배울 수 없었습니다.
아이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실패를 겪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래서 넘어져도 바로 일어나고, 아무렇게나 낙서하면서 글을 배우고, 바닥을 엉망으로 만들면서 식사 도구를 잘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패는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합니다. 이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몸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실패를 두려워하며 실패를 통한 성장보다 제자리 지키기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편하고 쉬운 것만을 추구하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무조건 기쁨과 행복의 삶일까요? 주님께서는 무조건 좋은 것만을 주셨을까요? 우리를 위해 실패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왜 잊어버릴까요? 실패를 주셨다고 해서, 고통과 시련을 주셨다고 해서 주님을 떠나겠다고 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 될 수밖에 없으며 행복이 아닌 불행을 선택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어떤 실패에도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행복과 네 가지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우선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을 향해 “행복하여라.”라고 선언하십니다. 솔직히 그리 행복해 보이질 않을 것입니다.
그에 반해 우리 눈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향해서는 “불행하여라.”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들은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기를 향해 좋게 말하는 것을 듣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정반대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을 통해, 또 실패를 통해서 성장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왜 우리의 시선과 다른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행복 선언의 주인공들은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불행 선언의 주인공들은 무엇이든 채워져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굳이 없어도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사람만이 행복한 사람이며, 그 반대는 불행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과 함께하는 삶입니까? 주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고통과 시련,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행복 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성공이란 세월이 흐를수록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나를 점점 더 좋아하는 것이다.
- 짐 콜린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행복의 법칙은 유일하고 예외가 없음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의 비결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행복하여지려면 가난해야 하고 배고파야 하며 박해받아 울게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완전 자기학대 수준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이 법칙이 예외 없는 유일한 행복의 길임이 확실하다면 누구든 그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 법칙을 믿을까요? 누가 행복해지기 위해 가난해지며 행복해지기 위해 단식하며 행복해지기 위해 멸시와 박해를 찾습니까? 우리는 먼저 이 행복의 법칙이 유일하고 예외 없는 법칙인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왜 더 가지고 배부르고 인정받기를 원하면 행복하지 못한지부터 이해해봅시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세속-육신-교만, 곧 삼구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세속인데 이를 청빈으로 육욕을 단식으로 교만을 겸손함으로 이겨야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단계를 받아들이는 일이 제일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왜 자살과 마약중독과 같은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나라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고 미국 사망 원인 1위는 마약중독이라고 합니다. 사실 자살이나 마약중독이나 원인은 다 같은 데서 출발합니다. 생존 욕구가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더 가지고 더 먹고 더 강해지면 행복하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추구하지만, 욕망에 비해 채워지는 것은 미흡합니다. 이 고통이 너무 커서 자살이나 마약으로 그 고통에서 빠져나오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행복을 위한 호르몬 조절 시스템이 존재합니다. 아기를 낳는다면 그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엔도르핀이 솟구칩니다. 이러한 자연 진통제가 없다면 우리는 고통을 감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마약과 같은 것으로 고통을 줄여주면 어떻게 될까요? 몸은 더는 엔도르핀을 내보내지 않게 됩니다. 지나치게 환각에 빠진다면 현실감각을 잃고 그 쾌락에만 집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망가집니다.
문제는 마약과 같은 쾌락을 주입하지 않을 때 벌어집니다. 이미 망가진 시스템 때문에 평소에 호르몬 때문에 잘 견뎌냈던 것들이 참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더 가지려 하고 더 먹고 더 강해지려 합니다. 이것도 안 되면 자살로 도피하거나 약물 과다복용으로 마지막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이러한 생존 욕구에 집착하게 되는 것일까요? 창조자를 만나지 못해서입니다. 부모에게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이 부모의 부재보다는 돈이 없어서, 먹지 못해서, 강하지 못해서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과 보호를 받지 못한 아이들은 커서 그런 것들에 더 집착하게 되고 그래서 더 큰 욕망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에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세속과 육신과 마귀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일부러라도 그러한 욕망과 싸우면 우리 행복 조절 시스템은 우리가 느끼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행복 호르몬을 더 많이 분비하게 됩니다. 운동으로 몸을 괴롭혀주면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만들려고 마치 마약과 같은 쾌락 호르몬을 분비합니다. 그러면 잠깐 고통을 주는 것으로 오랜 만족감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어쨌건 우리가 느끼는 행복과 고통은 호르몬의 작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행복해지려면 마약과 같은 것으로 고통을 줄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고통을 주어 행복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게 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이것이 지나치면 얀세니즘처럼 쾌락을 위한 고통 추구만을 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더 가난하고 더 배고프고 더 멸시와 박해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진정 행복 호르몬을 증가시키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몸에 고통을 주어 생겨나는 행복 호르몬의 양은 우리가 그 고통을 감내하기 위한 최소한만 분비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호르몬 중독에 빠져서 운동하는 사람은 하루 종일 운동만 하게 될 것이고 단식하는 사람은 계속 굶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간당간당하는 수준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시 이전의 빠른 보상을 찾게 되고 그러면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싸우기 위해서는 그것을 통한 행복 추구보다 더 큰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 동기가 바로 자존감입니다.
그랜트 카돈은 마약 중독자 무일푼에서 순자산 8천억에 이르는 성공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자신들을 부유하게 해주었던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집안이 가난해지자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돈은 생각처럼 벌려지지 않았고 그 고통을 마약으로 치유하려 하였습니다. 차츰 마약의 양이 많아지고 응급실에 실려 가는 일도 생겼습니다. 그리고 마약 치유 센터에서 치료받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적인 공허감은 채워지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매번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그를 치유해 준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가 중독치료를 마치고 나오는 날 그의 담당자는 그에게 인격모독과 같은 발언을 합니다. 바로 “당신은 어차피 또 들어올 겁니다. 당신은 절대 마약을 끊지 못해요!”라고 단언한 것입니다. 그러자 오기가 생겼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라는 오기가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성공에 집착하게 됩니다. 반드시 성공해서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공에 집착하다 보니 마약은 손도 안 대게 되고 건전한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집착의 법칙』이라는 책을 써서 자신을 건전한 사람이 되게 만들어준 것은 성공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성공에 대한 집착의 근저에는 자신이 루저가 아니라는 자존감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도 삼구의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새로운 집착, 곧 내가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으면 더 가지려 하고 더 먹으려 하고 더 강해지려 하는 마음은 매우 어색해서 더는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저절로 예수님처럼 가난해지게 되고 덜 먹게 되고 멸시와 박해를 즐겨 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반작용으로 오는 행복의 쾌감으로 언제나 기쁘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행복의 법칙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예외를 두지 않으십니다. 무엇을 따르려면 그것이 하나의 법칙이고 예외가 있을 수 없음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이제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 수 없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을 고쳐줄 수 있는 행복의 엔지니어, 혹은 행복의 의사나 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처럼 되려는 집착을 가져봅시다. 어차피 하나에는 집착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탐욕이든 사랑이든.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한 저 세상에서 완전한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오늘 루카 복음의 행복 선언은 마음의 가난이 아니라 그저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면에서 그리고 불행 선언과 병행된다는 면에서 마태오복음의 행복 선언과 다릅니다.
그럼으로써 가난과 부를 마음이나 정신에 국한하지 않고, 마태오복음에 비해 물질적 가난과 부를 강조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돈이 많고 적음인지, 돈이 많고 적음이라면 얼마가 그 기준인지.
그런데 주님께서는 한 번도 그런 기준을 제시하신 적이 없습니다. 아니, 제시하시긴 하셨습니다. 그러나 돈은 아니고 하느님 나라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명예나 이런 것들이 많음을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은 부자이고, 이런 것들이 많아서 하느님 나라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은 그 반대지요.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기에 저세상에서 부자 되기를 바라고, 저세상에서 부자 되고 싶기에 이 세상에서 가난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가난한 사람들은 오늘 콜로새서가 권유하는 대로 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 콜로새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추구한다는 것,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에 대해 좀 생각해봄이 좋을 것입니다. 추구한다는 것은 집착하는 것과 비교하여 좋은 의미입니다. 이상과 현실의 문제에서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좋습니다.
반면에 집착한다는 것은 미움과 불행의 뿌리이니 나쁩니다. 그런데 이상에 집착하는 것이 왜 나쁩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나 우리 공동체가 이상적이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이며, 그래서 이상에 비추어 현실을 거부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추구는 현실을 인정하고 현실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인정하는 것을 넘어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요, 지금도 좋지만 그렇게 되면 더 좋겠다는 매우 긍정적인 태도입니다.
우리가 저 위에 있는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늘 주장하듯 땅에서 하늘을 살자는 것이요, 땅에서부터 하늘을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이 아니고, 이 세상을 미워하고 저세상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시작하여 저세상에서 완성하자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행복이 궁극적 목적이기에 이 세상 행복에 안주하지도 않지만 이 세상 행복을 포기하지도 않으며 저세상에서의 완성을 꿈꾸며 한걸음 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발은 늘 현실에 있어서 한발은 현실을 딛고 한발은 앞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행복은 남들의 인색한 평가나 과장된 칭찬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본질을 꿰뚫는 믿음에 우리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믿음의 길에 행복이 있습니다. 행복은 믿음과 함께 우리가 믿는 것을 실행하는 살아있는 가치입니다.
불행에서 벗어나는 법과 행복을 얻는 방법은 같습니다. 외부에서 행복을 찾는 행위를 멈추고 우리의 내면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로잡혀 있는 인정과 칭찬 비판과 평가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계십니다. 매 순간을 가장 소중한 순간이 되게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행복은 과거도 미래의 맹목적인 집착도 아닌 가장 좋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지금입니다. 이렇듯 올바른 지혜가 올바른 행복입니다. 행복의 출발점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에 있습니다.
오늘의 감사가 더 없는 행복입니다. 행복은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행복은 하느님을 향한 참된 감사입니다. 살아있는 오늘이 하느님과 우리자신의 가장 좋은 감사의 날이며 가장 좋은 행복한 날입니다.
칭찬과 인정 비판과 평가라는 선물을 내려놓으니 가장 좋은 하느님의 날이 됩니다. 가장 좋은 행복한 오늘 되십시오. 행복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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