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3/09/15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9. 15.
반응형

 

시메온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네. 보라,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리니, 당신의 영혼이 칼에 찔리리라.

하느님,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아드님 곁에 서서 성모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하소서.

 

2023년 9월 15일 (금)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9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부속가 슬픔의 성모 11절)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부속가 슬픔의 성모 11절)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부속가 슬픔의 성모 11절

오늘성경구절이미지_230915.jpg
0.45MB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히브리서 5,7-9)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9,25-27)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9월 15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동정 성모 마리아님, 복되시나이다. 당신은 주님의 십자가 아래서 죽음 없이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셨나이다.

 

 

요한복음
19장 25-27절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부속가)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9월 15일 (금)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규성 요셉 신부

 

📌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소개 00:05

📌 미사시작 01:26

📌 강론시작 11:07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9월 15일 (금)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전두병 요아킴 신부

 

📌 미사시작 05:30

📌 강론시작 14:14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15일 (금)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장화기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0:27

📌 강론시작 10:23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15일 (금)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2:48

📌 미사시작 1:01:05

📌 강론시작 1:11: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그 누구보다 깊이 동참하셨던 성모님을 기억합니다.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러 성전에 오신 성모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이 예언에 성모님께서는 어리둥절하셨을 것입니다. 

‘분명 가브리엘 천사는 이 아기가 큰 인물이 되고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릴 분이자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불리리라 말하였는데(1,31-35 참조), 이 사람은 어째서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운명을 말하는 것일까?’ 

시메온의 예언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맙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셨고, 그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아들을 바라보셔야 하였던 성모님께서는 마치 ‘칼에 꿰찔리는’ 듯한 아픔을 겪으셔야 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아드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시며 그 고통에 깊이 동참하셨습니다. 그분께서 길에서 넘어지실 때마다 비통하게 우셨고, 그분의 손과 발에 못이 박힐 때는 마치 자신의 몸에 못이 박히듯 아파하셨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하염없이 울고 계시는 성모님, 애간장이 다 녹아내린 그 어머니에게 아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곁에 있던 제자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성모님께서 제자들의 어머니, 곧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는 순간입니다. 아드님의 수난 여정에 동참하신 성모님께서 이제 그분과 같은 길을 걸어야 할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힘을 북돋아 주시는 그들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여정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스승을 따르는 여정입니다(9,23 참조).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그 여정에 늘 함께하십니다.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오늘, 당신께서 직접 보고 느끼신 아드님의 상처를 우리 제자들 마음속에도 깊이 새겨 주십사 성모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부속가, 11절).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영화 촬영지에서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한 이유

 

휴가 때, 경상도의 군위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여기가 너무 멋있다는 평을 인터넷에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군위 지역 여행의 첫 번째 장소가 영화 촬영지였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아무런 감응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주변 경관도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고, 촬영했던 집 역시 별 볼 일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다른 관광객들은 “너무 좋다”를 외쳤습니다. 여기가 주인공이 앉아 있던 곳이라면서 마루에 앉아 사진을 열심히 찍고, 마당에 놓인 자전거를 타면서 주인공이 타던 자전거라면서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까요?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찍부터(83년) 컴퓨터 모니터를 봐서 시력이 안 좋아진 후로 영상을 잘 보지 않습니다. 극장에 가 본 지도 거의 10년이 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영화 촬영지라고 해서 기억나는 것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주님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을 만납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자기가 너무 종교에만 빠져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주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해외 성지순례를 가서도 그렇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으셨던 분은 계속해서 감탄사를 외치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읽지 않고, 신앙생활도 소홀히 하셨던 분은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십니다. “왜 이렇게 성당만 가는 것입니까?”라는 불평만 하십니다. 
 
주님을 알아야 미사나 기도를 통해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그 안에서 큰 기쁨도 얻을 수 있습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날에 맞게 복음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남기신 유언을 들려줍니다. 그 자리에서 이 유언을 들었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했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십자가 곁에 있었던 성모님과 몇 명의 여인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특히 성모님께서 아들과 함께하면서 더욱 하느님의 뜻을 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 시메온 예언자에게 들었던 “이 아기는 이스라엘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의 말이 다시금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커다란 고통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함께할 것을 더 분명히 아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알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큰 희망을 발견하면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조금도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진정한 즐거움도 주지 못한다.

- 미셸 몽테뉴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배우자의 아픔을 공감할 때 나타나는 표징.

 

오늘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 마리아의 고통에 대해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고통은 예수님의 아픔과 그 결을 같이 합니다. 오늘은 두 복음이 나오는데 하나는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실 때 나중에 예수님께서 당하실 고통 때문에 성모님의 영혼이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고 한 시메온의 예언이고 그다음은 골고타에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아드님을 보아야 하는 고통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모 마리아의 고통은 마치 아내가 아이를 낳기 위해 당하는 고통과 같습니다. 좋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 당하는 고통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울 수는 있어도 교회는 예수님을 새 아담, 성모님을 새 하와라고 부르는 교부들의 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과 성모님으로부터 교회가 탄생하였다는 것입니다. 골고타에서 예수님께서 성모님께 요한을 아들로 맡기시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이 남편이 아내에게 자녀를 맡기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아픔을 함께 느낀다는 데 있습니다. 아내의 자격은 남편이 아내와 자녀를 살리기 위해 밖에서 고생하는 남편의 힘듦을 얼마나 이해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만큼 구원자로 받아야 할 그리스도의 고통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분은 없으셨습니다. 

영혼이 칼에 찔리는 고통을 누가 느껴보았을까요? 그만큼 성모님께서 우리 어머니가 되기에 합당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만약 배우자가 나에게 해주는 고통에 대해 잘 안다면 어떤 표징들이 나타날까요? 남편은 분명 자신이 번 모든 돈을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내어놓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어놓는다는 것을 믿으면 아내도 그 돈을 피같이 아껴 쓸 것입니다. 

TV 고민 상담 프로그램에 보면 아내의 과소비 때문에 힘들어하는 남편이 나옵니다. 오은영 리포트 결혼 지옥 ‘금전적 신뢰 깨진 폭탄 부부’를 보니 남편도 분노를 참지 못하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아내도 귀걸이 사는데 300만 원 쓰고 피부 관리받는 데 900만 원을 쓰는 내용이 나옵니다. 

남편은 월 400씩 꼬박꼬박 가져다주며 자신은 한 달에 10만 원 이상 써 본 적이 없다는데 아내가 그렇게 과소비하고 빚만 늘어나니 신뢰가 깨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도 비싸게 술을 마시고 다니고 한 것은 아니기에 대부분은 남편이 아는 것들이었지만, 카드 지출 내역과 통장 지출 내역은 남편에게 보여주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신뢰가 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치미에서 배우 주우와 김선희 부부도 비슷한 이유로 출연하였습니다. 김선희 씨가 지나치게 과소비한다고 남편이 고발하듯이 아내를 데리고 나왔지만, 사실 그렇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자녀를 키우며 자신만을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쓰는 엄마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남편은 자신이 매달 500씩 주는데 생활비는 700씩 들어가는 것에 신뢰를 잃어갔던 것입니다. 

저는 남편이 아내를 위해 모든 돈을 다 주는데 아내가 그 돈을 어떻게 쓰는지, 혹은 아내가 돈을 얼마나 저축해 놓았는지의 재정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다는 말은 남편이 돈 벌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느끼지 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돈 쓰는 것을 일일이 남편이 안다면 답답해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하겠지만,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둘은 서로 신뢰를 잃게 되고 결국 그 피해는 아이들이 보게 됩니다. 서로 신뢰하지 못해 부부싸움을 많이 하게 되면 자녀는 생존 욕구가 강해지고 그러면 나쁜 아이로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신자들이 내는 돈에 대해 불투명하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신자들은 본당 사제를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제와 신자들이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가운데 좋은 자녀들이 탄생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솔직하게 공개하고 혼날 게 있으면 혼이 나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본당에 내는 돈이 그들의 살과 피와 같은 아픔을 공감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레위기에도 신자들이 낸 봉헌은 거룩한 것이니 사제들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아픔을 아신다는 것과 솔직해야 한다는 것이 잘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서로의 아픔보다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더 중요하게 여겨 두렁이로 몸을 가린 것을 보면 연결이 쉬워집니다. 진실하지 않으면 자기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그러면 관계는 끝난 것입니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관계에서는 숨기는 게 없어야 합니다. 남편이 모든 것을 다 가져다주었다면 아내도 모든 지출 내역과 통장 잔고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합니다. 영화 ‘허삼관’에서 하정우는 아내가 이전 애인의 아이를 배어 자신에게 시집왔었다는 것을 10년 뒤에나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남의 아이를 키웠다는 생각에 분노하였지만, 키운 정이 작지 않아 아이를 살리기 위해 계속 피를 팔며 자신은 죽어가다시피 합니다. 하지원은 남편이 아들을 살리기 위해 계속 피를 판다는 것을 알고는 자기 신장을 아들에게 줍니다. 

서로 상대의 고통을 알고 그 고통 때문에 나도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일이 사랑일 것입니다. 신뢰를 잃으면 내어줄 수 없습니다. 상대가 나와 가정을 위해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 알면 솔직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상대가 나를 위해 흘리는 피의 고통을 함께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께 요한으로 상징되는 교회를 맡기실 수 있으셨던 것은 당신의 피를 결코 헛되이 쓰지 않는 마음을 가지셨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도 배우자의 아픔을 공감할 때 나타나는 표징은 아마도 먼저 재정의 투명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고통도 구원도 함께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어제 주님의 십자가 현양 축일에는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나눔을 했습니다만 오늘 주님의 어머니 통고 축일에는 긴 병에 성인 난다는 나눔을 하려고 합니다. 성인이라면 긴 병에도 환자를 버리고 떠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싶은 거지요.


우리의 현실을 보면 아들은 어머니가 오래 앓게 되면 엄마를 버려 불효자가 되지만 엄마는 아들이 아무리 오래 앓아도 그 아들을 버리지 않는데 이 면에서 성인과 어머니는 같습니다. 

그런데 성인과 어머니의 공통점이 또 있습니다. 어머니나 성인 모두 내리사랑을 한다는 점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어머니의 사랑은 인간적인 내리사랑이라면 성인의 사랑은 성스러운 내리사랑이겠지요. 

그런데 성스러운 내리사랑이란 무엇입니까?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사랑을 내리받아서 하는 사랑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충만해져야지만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과 성모님 사랑에는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아들의 고통에 버리고 떠나지 않고 함께한다는 면에서는 같지만 인류 구원과 사랑에 함께한다는 면에서 성모의 사랑은 다릅니다. 

보통의 엄마는 자기의 아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면 함께하지만 자기 아들이 고통당하는 것은 싫어하고 자기 아들이 인류 구원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저의 어머니도 제가 신부 되는 것을 처음에는 그리 좋아하지 않으셨고 나중에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게 되셨지만 그런 다음에도 북한 일과 같이 너무 힘들고 위험한 일은 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모 마리아의 경우는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 아들이 자신을 바치실 때 그것을 말리지 않으시고 다만 십자가 밑에서 함께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아들을 성전에서 봉헌하실 때 가슴이 꿰 찔리는 고통을 당하실 것이라는 얘기를 시므온에게 들으셨을 때부터,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들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모르셨냐는 매정한 핀잔을 아들에게 들으셨을 때부터 이미 예견하고 각오한 것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들이 죽은 다음에도 이어졌을 겁니다. 얼마 전 읽은 콜로새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하지요.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남은 생애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아들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모자란 부분이 혹 있다면 당신이 채우시겠다는 마음으로 여생을 사셨을 겁니다. 

아들의 고통을 함께하신 마리아는 아들의 구원도 함께하신 우리에게는 너무도 고마운 분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사랑을 지켜내시는 어머니십니다. 고통의 중심에 계시는 우리의 예수님과 우리의 어머니십니다. 십자가가 만들어가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십자가에서 사랑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십자가의 세월이 십자가에서 다시 아들을 만납니다. 간절한 기도 간절한 사랑이 십자가입니다. 지켜온 세월이 십자가의 사랑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고통은 사랑을 이해하는 가장 가까운 방식입니다. 

십자가의 안쪽과 바깥에도 어머니가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새로운 시작을 불어넣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구원을 위한 고통은 분명 선물입니다. 고통을 푸는 것도 십자가입니다. 

만남과 헤어짐도 십자가이며 사랑도 구원도 십자가임을 깨닫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십자가로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을 뜨겁게 다시 만납니다.

고통으로 단단해지는 구원입니다. 고통을 거치며 우리의 삶은 어머니가 되고 아들이 됩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마지막이 아닌 새로운 첫시작을 보여줍니다.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모두의 어머니가 되게하시는 사랑을 만납니다.

 십자가의 고통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결합되면 하늘의 열매가 됩니다. 어머니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