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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9/17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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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소서. 당신 예언자들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시고,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하느님,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니 저희를 굽어보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2023년 9월 17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9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4주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지혜 3,9)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지혜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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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서 3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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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집회서 27,30―28,7)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 제2독서
    (로마서 14,7-9)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18,21-35)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9월 17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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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마태오복음
18장 21-35절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9월 17일 (일)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9/20 경축 이동 미사
이형전 루카 신부

 

📌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소개 00:23

📌 미사시작 01:19

📌 강론시작 18:49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9월 17일 (일)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9/20 경축 이동 미사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 미사시작 08:50

📌 강론시작 21:49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17일 (일)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9:5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용서해야 하는 이유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웃을 용서하는 일이 주님께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전제로 선언됩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다음과 같이 청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 

이처럼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여야 할 당위성을 주님께 우리 죄를 용서받으려는 데에서 찾게 됩니다. 그런데 이는 자칫하면 하느님의 용서가, 우리의 선행으로 얻게 되는 보상이나 대가라는 인식을 심어 줄 수도 있습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오늘 복음의 비유는 오히려 우리가 용서받은 사실이 먼저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만 탈렌트를 임금에게 빚진 사람이 있습니다. 한 탈렌트도 노동자 하루 품삯(데나리온)의 육천 배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인데, 무려 그 만 배에 해당하는 빚을 졌다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임금이 그 큰돈을 왜 빌려주었는지, 종은 그 돈으로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였는지, 비유는 우리에게 아무런 정보도 전하여 주지 않습니다. 다만 놀라운 사실 하나를 간결하게 말할 뿐입니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전에 우리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또 그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일일이 캐묻지 않으시고 그냥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용서는 어떠한 전제도 두지 않습니다. 오로지 그분의 자비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용서를 받은 뒤에 보이는 태도입니다.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의 빚을 탕감하여 줄지, 아니면 그 빚을 갚으라고 성을 내며 그를 감옥에 가둘지 말입니다.

이웃을 용서하여야 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먼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용서받은 체험과 그에 대한 감사에서 비롯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를 입은 사람의 행동에 따라, 베푸신 자비를 다시 거두어들이실 수도 있는 분이심을 기억하여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예수님은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을 자주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을 판단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냥 모든 사람의 말과 행동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일까요? 분명히 잘못되었고 또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판단하지 않기 위해 눈을 감으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명언이 하나 있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한 행동에 관해서는 제대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특정한 윤리적 행위를 분석하고 그 행위가 객관적인 윤리 규범과 부합하는지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 관한 판단은 멈추고, 그 사람의 행위에 관한 판단은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행위, 또는 저런 행위는 죄가 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는 사람 자체에 관한 판단은 우리에게 금지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행위를 판단하는 것이지 사람을 판단할 권한 자체가 아예 없습니다. 주님도 우리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며 사랑으로 함께해주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너무나 엄격한 잣대를 세우면서 행위가 아닌 사람 자체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자기 형제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해주십니다. 우리 자신도 늘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 안에서 용서의 끝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죄인에게도 언제가 공동체의 문을 열어 두고 끊임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행위 자체만을 바라보면서 용서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고 있으며 지적합니다.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만 탈렌트 빚진 사람이 우리의 모습인 것 같기도 합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일 탈렌트는 당시 노동자의 6,000일 일당에 해당한다고 하지요. 15년 이상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아야지만 손에 쥘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런데 그 만 배라면 어느 정도일까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빚을 임금이 탕감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고마울까요? 하지만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붙잡아 감옥에 가둡니다. 
 
과장된 금액인 만 탈렌트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무한한 용서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본받지 않는 매정한 종의 모습을 취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외치는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사람에 관한 판단 자체를 멈추고, 하느님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용서 안에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내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는 순간, 내가 가진 것을 절실히 부러워하는 ‘또 다른 사람’이 있음을 기억하라.

- 푸블릴리우스 시루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순교는 일상에서의 끊임없는 부활 체험의 결과

 

오늘은 한국 순교 성인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순교는 순종의 피로써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는 신앙 행위입니다. 따라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살아내야 할 십자가의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따르려거든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순교의 정신을 함양할 수 있을까요? 바로 더 확고한 ‘부활 신앙’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반드시 그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지혜 3,4)라고 말합니다. 

부활의 희망 없는 순교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도 당신 죽음을 말씀하실 때 반드시 부활도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순교의 열매를 위해 이 세상에서부터 부활의 확신을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투수 겸 타자로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오타니 쇼헤이 선수가 있습니다. 그 선수는 땅에 버려진 쓰레기가 남이 버린 운이라고 생각하여 경기 중에도 잠깐씩 쓰레기를 줍습니다. ‘나’는 더 가지려 하고 더 평하려 하고 더 높아지려 합니다. 

그런데 쓰레기를 줍는 일은 그러한 소유욕-육욕-지배욕과 반대의 행위입니다. 그러니 그가 쓰레기를 줍는 일을 하는 것은 하나의 작은 순교입니다. 이렇게 작은 순교를 하는 것은 그가 반드시 그렇게 해서 운이 온다는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너무나 큰 모험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우리를 그런 모험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자아의 종살이 할 존재가 아니라는 ‘자존감’입니다. 그랜트 카돈은 마약 중독자였다가 억만장자가 되었고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책을 쓰고 강연도 합니다. 

그가 이러한 사람이 된 계기는 누군가로부터 무시당한 일 때문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부유하게 자라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다시 가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 공허함은 마약으로 채우려 하였고 정신과 몸이 피폐해졌습니다. 아무리 마약을 끊으려 해도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죽을 고비도 몇 번을 넘기고 재활 센터에 들어가 한 달을 있었습니다. 그는 마약을 하지 않고도 한 달을 버틸 수 있다는 것에 자기도 놀랍니다. 더 놀란 것은 마지막 날 그에게 “당신은 절대로 마약을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는 인격적인 모욕을 들은 것이었습니다. 

카돈은 집에 돌아와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님을 증명해보겠다며 앞으로 가족을 돈 걱정시키지 않게 하겠고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는 누구나 다 아는 인물이 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결심이 집착이 되었고 그 집착이 그를 이전의 삶으로부터 구해 주었습니다. 부활의 영광에 대한 집착이 결국 이전의 자신을 죽이는 힘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집착을 하도록 살과 피로 들어오십니다. 우리가 자아의 종살이 할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자존감으로 이 세상에서 이미 부활, 곧 천국을 체험해야 하고 그 체험들이 쌓여 나중에는 목숨까지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복자 황일광 시몬은 당시 가장 낮은 계급인 백정 출신입니다. 그러던 그가 당대 위대한 가문의 사람들과 한자리에 앉아 식사하게 되니 천국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는 두 개의 하늘이 있다. 하나는 이미 이 세상에 또 하나는 후세에, 이렇게 해서 두 개다”라고 기뻐하였습니다. 

작은 순교를 통해 천국의 부활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그를 모진 고문을 이겨내게 하였고 순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는 모진 고문에 “만 번 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님을 배반하지 않겠으니 저를 마음대로 해 주십시오” 하면서 의연했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박해를 피해 도망치다가 신자들을 버릴 수 없어 되돌아왔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이 사제로 부활하게 되었는데 자신도 신자들을 부활의 믿음을 심어줄 필요를 느겼던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삼구(三仇)와 끝까지 싸우라는 당부를 하셨습니다. 이는 두 분 다 자신을 죽이는 것이 곧 부활로 이어짐을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한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주님 말씀으로 나를 죽일 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의 기쁨을 맛봅니다. 이것들이 쌓여 결국 기쁨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고 싶은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용서하지 않는 나를 용서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여라.” 

지난주 교정의 사랑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우리가 이번 주는 용서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웃을 용서하라는 가르침이지만 이웃을 용서하지 않으면 나를 용서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이번 주 가르침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이웃을 용서하면 하느님도 나를 용서하신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 인간의 용서를 굳이 하느님 용서와 연결하시는 겁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용서하라고 가르치고, 심리학에서도 용서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느님 용서와 상관없이 용서하라고, 사랑 때문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해서. 

용서하지 않는 것은 제거하지 않고 암 덩어리를 가진 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앙심과 복수심이라는 암 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앙심을 품고 있는 것은 또 날카로운 칼을 품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를 찌르기에 앞서 자기를 찌를 것이고, 그를 한 번 찌르기 위해 어쩌면 자기를 수천 번, 수만 번 먼저 찌를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린 사랑 없이 또 하느님 없이도 이기적인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행복을 위해 그를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나의 행복을 위해 그를 용서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앞서 봤듯이 우리 용서를 하느님 용서와 연결하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해 주지 않으신답니다. 

예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듯이 이웃의 죄를 용서하라 하지 않고 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듯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라고 주님께서 주님의 기도에서 가르치셨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그분의 날카로운 지적이 맞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음으로써 용서도 배우고 용서할 힘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주인이 먼저 종을 용서하는 비유를 드십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보다 조금 빚진 다른 종을 용서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노하여 줬던 용서를 회수하고 벌을 내린다는 비유를 드십니다. 

같은 용서의 문으로 하느님 용서가 우리에게 들어오고 우리의 용서가 나갑니다. 같은 용서의 됫박으로 하느님 용서를 우리가 받고 우리가 이웃을 용서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일관된 가르침으로서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판단하는 대로 판단 받고, 복수하는 대로 복수 받고 용서하는 대로 용서 받는다는 말씀인데 이것은 오늘 독서 집회서도 하는 말입니다. 

“복수하는 자는 주님의 복수를 만나게 되리라.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하려고 문을 열 때 그 용서가 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한 용서의 문을 열지 않을 때 우리를 위한 하느님 용서도 들어올 수 없다는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닮은 사람들이 여기 이곳에서 고민하고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여기 이곳에서 목숨을 바치는 순교로 신앙의 빛을 밝힌 이들이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소중한 것을 지켜나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하느님을 향한 우선적인 신뢰입니다. 

믿음은 생명의 참된 혁신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쾌락주의와 이기주의를 내려놓습니다. 믿음 안에 생활이 있고 순교가 있습니다. 믿음의 소중한 첫걸음이 이 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신앙의 실천적 자세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노력이 바로 이 시대의 참된 순교입니다. 우리 시대를 똑바로 볼 수 있는 눈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그래야 삶의 중심과 삶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목숨을 거는 정성이 삶을 바꿉니다.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삶이 정성어린 삶입니다. 우리의 모든 사랑을 아낌없이 다 주는 것이 오늘의 참된 순교입니다. 순교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역할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입니다. 

여기 이곳은 순교의 무한한 실천의 장(場)이 펼쳐지는 진리의 자리입니다. 이 땅의 빛과 소금의 진리는 우리 신앙인들의 진실한 뜻과 진실한 실천으로 가장 아름다운 진리로 세워집니다. 

순교는 가장 강력한 실천의 힘이며 가장 강력한 신앙고백입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순교를 선택한 이 땅의 순교자들은 간절하신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이 땅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모든 것을 바치신 순교자들과 함께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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