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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9/19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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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소서. 당신 예언자들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시고,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하느님,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니 저희를 굽어보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2023년 9월 19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9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울지마라. (루카복음 7,13)

 

울지마라 (루카복음 7,13) 성경말씀 루카복음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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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복음 7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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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티모테오1서 .3,1-13)
    감독은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합니다. 봉사자들도 마찬가지로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 오늘 복음
    (루카 7,11-17)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9월 19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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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루카복음
7장 11-17절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 무렵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9월 19일 (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현철 베드로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8:08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9월 19일 (화)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 미사시작 07:46

📌 강론시작 15:57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19일 (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10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19일 (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3:17

📌 미사시작 1:02:52

📌 강론시작 1:11:0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지금 우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이유

 

오늘 복음 이야기는 엘리야 이야기(1열왕 17,8-24 참조)와 많이 유사합니다. 엘리야가 사렙타라는 성읍에 들어서며 과부 한 사람을 만났듯이(1열왕17,10 참조), 예수님께서도 나인이라는 고을의 성문에서 어떤 과부를 만나십니다.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내었듯이(1열왕 17,22 참조), 예수님께서도 당신께서 만나신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내십니다. 특히 다시 살아난 아이를 그의 어머니에게 돌려주는 공통된 장면에서, 두 이야기의 표현이 꽤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사함에서 예수님을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예언자로 묘사하려는 루카 복음서 저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본 사람들은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을 엘리야처럼 묘사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분께서 엘리야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이심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엘리야는 아이를 살리려고 먼저 주님께 부르짖고, 세 번에 걸쳐 자기 몸을 아이 몸 위에 펼친 다음, 다시 주님께 부르짖는 등 조금은 복잡한 치유 과정을 거치는데(1열왕 17,20-22 참조), 예수님께서는 단 한마디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아이를 일으키십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과부의 요청(1열왕 17,18 참조)으로 기적을 일으키지만,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움직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여겨볼 점은, 과부도, 고을 사람도, 그 누구도 예수님께 기적을 요청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지닌 이들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 곧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애처로이 울고 있는 과부에게 느끼신 그 연민의 정이 죽었던 이를 살아나게 한 유일한 동기였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어떤 슬픔에 잠겨 울고 있습니까? 이미 그 딱한 사정을 굽어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로하십니다. “울지 마라.” 주님의 위로 속에 깊은 울림이 느껴집니다. 

우리의 믿음이 한참 부족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오로지 당신의 연민으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앞으로 누리게 될 행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우는 이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1).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울지마라 일어나라

 

사제가 된 후, 다른 나라에 참 많이 다녔습니다. 해외 성지순례도 꽤 많이 다녔고, 한인교회에 강의를 위해 다녀온 적도 많습니다. 또 친구와 가족과 여행했던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많이 다닌 것을 아는 어떤 분이 제게 가장 기억나는 나라는 어디였냐고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도 좋았고, 성모 발현지 순례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곳보다도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1등은 안식년 때 신부들과 함께했던 유럽 여행인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에 허리가 너무 아파서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여행 중에 허리를 삐끗했는데, 함께하는 열흘 동안 허리가 아파서 제대로 걷기도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같이 간 신부들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고 진통제 먹으면서 버텼습니다. 당시에는 너무나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지나고 나니 잊지 못할 여행이 되었습니다. 허리가 아파도 꾹 참으면서 계획했던 곳을 빠지지 않고 다 다녔고, 그래서인지 그 장소들도 더 기억에 선명하게 남습니다. 
 
사실 우리는 쉽고 편한 것만을 찾습니다. 또 별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지내길 원합니다. 하지만 기억에 남을까요? 오히려 강한 인상이 남았던 때는 어렵고 힘들 때였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날을 바라보며 미소 지으며 지금 더 힘을 내며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편하고 쉬운 것만을 주시지 않습니다. 너무나 힘든 고통과 시련도 자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때 주님께 불평불만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지금 내게 잊지 못할 시간을 또 주시는 구나.’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 어려움 속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굳은 믿음을 갖는다면, 포기와 좌절이 아닌 희망을 좇을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가 장례 일행을 만나게 됩니다. 특히 아들을 잃고 슬피 우는 어머니를 보시게 되지요. 이때 “울지 마라.”면서 직접 위로해주십니다. 그리고 이미 죽어서 관 속에 있는 이에게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명령하시자, 죽은 이가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과부라고 표현된 것을 보면, 이미 남편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으니 그 슬픔이 얼마나 대단했을까요? 그러나 주님은 이 슬픔과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고통과 시련은 우리를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이 상태에 계속 머무르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당신의 손길을 느끼면서 희망을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사랑에 감사하면서 잊지 못할 순간을 마음 깊이 간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생을 사는 데는 딱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기적인 듯 사는 것’, 또는 ‘아무 것도 기적이 아닌 듯 사는 것’.

- 알버트 아인슈타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쁜 재료를 주며 좋은 물건으로 돌려받기를 바란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인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복음만 읽어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과부와 그 죽은 아들이 불쌍해서 과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를 살려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왜 불쌍하게 죽는 이들은 모두 살려주시지 않으실까요?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도 보신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어디에서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받을 마음이 없는데 선물을 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어머니의 믿음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 같지만 예수님의 이 말에 어머니의 큰 믿음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돌려주셨다”라는 말 안에는 어머니가 예수님께 먼저 “맡겨드렸다”, 혹은 “봉헌하였다”라는 말이 전제됩니다. 맡겨드렸다는 말은 어머니의 능력으로는 안 되기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나인의 과부는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맡길 줄 압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어서 하느님께 맡기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맡긴다는 말은 ‘죽여서 봉헌한다’라는 뜻과 같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이유는 자기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를 죽여서 맡기지 않고 살려서 맡기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 상태로 어떻게 교육이 이루어지고 변화될 수 있을까요? 

요즘 선생님 신자들에게 엄마들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학교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사연도 있습니다. 어떤 엄마가 선생님에게 보낸 문자입니다. 

“선생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만, 제가 곰곰이 생각 좀 하다가 말씀드리는 건데요. ‘도덕책을 안 가져온 사람은 수업 시간 내내 서 있게 한다’라고 아이가 말하더라고요. ‘엄마 근데 나 도덕책을 잃어버렸어.’ 그날 밤 아이는 경기를 일으켰는데, 경찰서에 문의해보니 아동학대라고 하는데, 편법으로 아이들을 조지시면 편법으로 선생님을 조질 수 있다는 것만 기억해 주시겠어요 ^^”

선생님은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어머님 제가 오늘 아이들에게 확인해 보았는데요. 제가 도덕책을 안 가져온 사람은 수업 시간에 서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이런 엄마들은 아이들이 이상해지는 것을 선생님 탓을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맡기지 않는데 어떻게 좋은 교육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20대 교사가 안타까운 선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구타당해도 선생님은 저항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 편이 없어? 교사가 죽었는데!”라고 울부짖는 동료 교사의 말은 ‘이게 제대로 된 교육일까?’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심지어 동료 교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프로필 사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학부모도 있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른 아침에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고 선생님의 프로필 사진이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이들 어린데 선생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다 큰 영향을 준다는 거 아시죠? 아직 사실관계도 판명 나지 않은 일로 이렇게 추모한다는 걸 드러내는 건 아닌 것 같아 연락드립니다. 아이들이 상처받을 수 있으니 언급 자제 부탁드려요.”

이 댓글 때문에 파문이 일자 또 이러한 댓글이 달렸습니다. 

“선생님 제 문자를 여기서 볼 줄 몰랐어요. 너무 당황스럽네요. 개인적인 문자 내용을 유포하셨으니 각오는 되신 거죠? 학부모 회의안건으로 올릴게요. 너무 치욕스럽네요.”

어머니들이 이렇게 교육을 잘할 줄 안다면 왜 학교에 보내는 걸까요? 본인이 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애 아빠가 지금 참고 있어요. 내가 말렸어요!”라는 등으로 협박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어머니들이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 선생님들보다 더 잘 안다고 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여러 교육 프로그램을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이들에 대한 어머니와 선생님들을 위한 솔루션에서 “실제의 실천적인 변화가 오는 데에는 어떤 방법이 좋을까요?”라는 질문에 어느 유명 교육 전문가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주세요.”

예를 들어 놀이터에서 줄을 서지 않고 먼저 타려다가 다치면 엄마는 왜 자기 아이가 줄을 서지 않게 키웠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들은 선생님들에게 이런 말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우리 애 마음 얼마나 읽어주셨어요?”

교육은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변화시키게 만들려면 맡겨야 합니다. 맡긴다는 말은 봉헌한다는 말입니다. 봉헌한다는 말은 죽인다는 뜻입니다. 

요즘에는 다시 스마트폰도 빼앗을 수 있고 아이를 돌려보낼 수도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주 정상적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을 믿지 못하면서 자녀를 맡긴다는 말은 학교 교육으로 내 자녀가 변화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변화시키고 싶다면 맡겨야 합니다. 

『하.사.시.』 5권 25장 ‘코라진의 몸이 굽은 여인’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해 주신 예화를 그대로 옮겨볼까 합니다. 

어리석은 어떤 부자가 한 장인(匠人)에게 아주 질이 좋은 꿀과 같은 황금색 재료의 큰 덩어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을 가공해서 장식된 작은 병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재료는 가공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고 장인이 부자에게 말했습니다. ‘보세요. 이 재료는 무르고 잘 늘어납니다. 제가 어떻게 이것을 조각해서 모양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뭐라고요? 이 재료가 좋지 않다고요? 이것은 값진 수지(樹脂)이고, 내 친구 한 사람은 이것으로 만든 작은 항아리를 하나 가졌는데, 그 항아리에 넣은 포도주는 얻기 어려운 맛을 얻게 되오. 나는 더 큰 항아리 만들어 가져서, 그의 항아리를 자랑하는 내 친구의 자존심을 꺾어 주려고 이 재료를 아주 비싼 값을 주고 샀소. 항아리를 만들어주시오. 그것도 즉시.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능력 없는 장인이라는 말을 하겠소.”

“그러나 손님 친구의 항아리는 황금빛 설화석고(雪花石膏)로 만든 것이 아닐까요?”

“아니오, 이 재료로 만든 거요.”

“질이 좋은 호박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요?”

“아니오, 이 재료로 만든 거요.”

“혹 같은 재료로 만든 것이라고 해둡시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결과로나 단단하게 만든 다른 재료들과 섞어서 치밀해지고 단단해졌을 것입니다. 그 친구분에게 가서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오셔서 그분의 항아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오. 이 재료는 그 친구 자신이 내게 판 것이고, 그렇게 써야 한다고 확실히 말해 준 거요.”

“그러면 그 친구분이 자신의 아름다운 항아리에 대해 손님이 가지시는 욕망을 벌하려고 손님을 속인 것입니다.”

“말조심하시오! 일을 하오. 그렇지 않으면, 이 희귀한 수지(樹脂)의 가치와 비교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이 작업장을 빼앗아서 당신을 벌하겠소.”
“장인은 슬퍼하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반죽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반죽이 그의 손에 달라붙었습니다. 그는 유향(乳香)과 가루를 써서 한 덩어리를 굳게 하려고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수지는 황금빛의 투명성을 잃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열로 단단하게 하기를 바라면서 도가니 가까이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용해(溶解)되기 때문에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서 그것을 꺼내야 했습니다. 그는 사람을 헤르몬산 꼭대기에 보내서 얼어붙은 눈을 가져오게 해서 그 물질을 눈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 물질은 단단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형(成形)이 되지 않았습니다. ‘끌로 모양을 만들어야지’ 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끌을 대자마자 수지가 산산조각이 낮습니다.

장인은 완전히 실망하고, 벌써 그 재료를 가공할 수 있게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고 마지막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그는 조각들을 주워서 화덕의 열기로 다시 액체가 되게 한 다음, 그것을 다시 눈으로 가볍게 얼렸습니다. 

그리고 가까스로 말랑말랑해진 재료를 끌과 칼 모양의 주걱으로 가공해 보았습니다. 그 재료가 성형되기는 했습니다. 암! 성형됐지요! 그러나 끌과 혀 모양의 주걱을 떼자마자, 마치 반죽 통에서 부풀어 오른 빵 반죽인 것처럼 처음 형태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쳤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부자의 보복을 피하고 파산을 면하기 위해서 밤사이에 아내와 아이들을 마차에 태우고, 물건들과 일하는 연장들을 싣고, 빈 채로 남겨둔 작업장 한가운데에 수지의 황금 빛나는 재료를 놓아두고, 그 위에는 ‘가공할 수 없음’이라는 쪽지를 남기고, 국경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살아 있는 것을 주면서 변화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맡기려면 완전히 맡기십시오. 완전히 맡겼다는 말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믿는다는 말입니다. 사제에게 성당을 맡겼는데 교구가 사제가 아닌 신자들의 목소리에 휘둘리면 어떨까요? 사제는 그 성당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됩니다. 

사제가 봉사자를 뽑았다면 그 봉사자가 자신의 범주 안에서는 하고 싶은 일은 다 하도록 해야 합니다. 책임은 그 봉사자를 뽑은 사제에게 있습니다. 물론 사고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맡기려면 제대로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봉헌하여 좋은 것으로 돌려받으려면 죽은 제물을 바쳐야 함을 잊지 맙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지혜 빌려주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빠지는 것도 있지만 좋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복잡한 것이 별로 없고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짜 중요한 것 외에 다른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거나 비슷하게라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중요하지만 

돈과 사람.
돈과 사랑,
일과 사랑을 선택해야 할 경우 

헷갈림이나 주저함이나 망설임 없이 사람과 사랑을 선택하고 하느님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 건강이 많이 나빠지면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의 저는 여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저는 인생의 황금기입니다. 사랑하기에 제일 좋은 황금기이고 그러나 얼마 남지 않은 황금기입니다. 

그러니 사랑하기에 딱 좋은 이 시기를 허비하거나 낭비하면 안 되는데 어떻게 이 시기를 보낼 것인가? 오늘은 이 점을 독서와 복음에 비춰 나눠볼까 합니다. 

지금 제가 해야 할 것은 오늘 주님께서 하시듯 젊은이들의 기운을 북돋워 주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죽은 과부의 외아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육체의 힘으로 치면 젊은이가 저를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젊은이들이 기가 더 많이 꺾여 있습니다. 

나이로 치면 젊은이들이 더 팔팔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젊은이들이 더 많이 지쳐 있습니다. 길을 못 찾고 헤매다가 곧 방황하다가 지친 것입니다. 

성숙한 인간의 첫 번째 요건이 인생의 확고한 목표를 갖는 것인데 젊은이의 특징 중 하나가 아직 목표가 뚜렷하지 않고 확고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길인가 하고 가고 저 길인가 하고 가다 보니 지치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헤맸는데도 아직 길이 보이지 않아 주저앉은 거지요. 

그러므로 이런 그들에게 저도 그 나이에 그랬던 경험을, 그러다가 마침내 길을 찾은 경험을 들려주고, 더 나아가 가야 할 곳을 찾도록 도와줘 일어나 길을 가게 해야겠지요. 

그런데 젊은이는 방황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실패하는 것이 젊은이이고, 실패가 거듭되다 보니 좌절하는 존재가 또한 젊은입니다. 

이렇게 좌절감 때문에 일어서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젊은이에게 다가가 한 번 실패가 실패가 아니라 인생 실패가 진짜 실패이고, 넘어진 것이 실패가 아니라 일어서지 못하는 것이 진짜 인생 실패임을 일깨우며 다시 일어나도록 손잡아 일으켜 세워주며 걸림돌을 디딤돌 삼도록 도와야겠지요.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제자요 아들인 디모테오에게 주는 가르침들입니다. 이제 제가 참으로 해야 할 것도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형제들이 하도록 디모테오에게 사도 바오로가 하듯이 지혜를 빌려주는 것임을 묵상하는 접니다. 그런데 지혜 빌려주는 것은 저 뿐 아니라 여러분도 그러해야겠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사랑은 영원합니다. 차갑게 굳어버린 사랑을 다시 일으키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삶의 매순간을 사랑으로 채워주시는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생명을 만드신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생명의 길이 다시 활짝 열립니다. 하느님 사랑이 마침내 고통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합니다. 

죽음을 인정해야 삶이 있습니다. 슬픈 어둠 속에서도 모든 역사는 새롭게 시작됩니다. 죽음을 사랑으로 지우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뜨겁고 뜨거운 사랑의 관계를 사랑으로 다시 만납니다. 사랑은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도록 사랑으로 놓아주는 것입니다. 

이별을 맛본 과부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사랑의 보호자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서 사랑을 되살리십니다. 삶과 죽음을 사랑으로 수용하십니다. 죽음 뒤에 생명이 이별 뒤에 더 큰 사랑이 존재합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삶도 죽음도 만남도 이별도 우리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습니다. 

온전한 사랑 거룩한 사랑이 젊은이를 살려 그의 어머니에게 다시 안겨줍니다. 세상에 없는 자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함께 하는 자식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만나면 죽음도 이별도 뜨거운 사랑이 됩니다. 

사랑을 만나게 하시는 하느님의 가장 멋진 오늘입니다. 다시 깨닫고 다시 일어나는 사랑의 벅찬 새날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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