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소서. 당신 예언자들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시고,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하느님,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니 저희를 굽어보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2023년 9월 20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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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루카복음 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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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복음 7장 35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티모테오1서 3,14-16)
우리 신앙의 신비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 오늘 복음
(루카 7,31-35)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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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루카복음
7장 31-35절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31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9월 20일 (수)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나인구 스테파노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6:15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9월 20일 (수)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6:47
📌 강론시작 14:54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20일 (수)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장화기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2:51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9월 20일 (수)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2:41
📌 미사시작 1:02:12
📌 강론시작 1:09:24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하느님의 제안과 부르심에 잘 호응하고 계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물리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7,30 참조)을 “이 세대 사람들”이라 일컬으시며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장터의 아이들은 두 편으로 나누어져 있는 듯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피리를 불며 춤을 추는 것은 혼례식과 관련된 놀이이고, 곡을 하며 우는 것은 장례식 놀이입니다. 문제는 한쪽에서는 놀자고 적극적으로 제안을 하는데, 다른 쪽에서 전혀 호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혼례식 놀이를 하자고 아무리 피리를 불어 대도 춤을 추어 주지 않고,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아무리 곡을 하여도 우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설명에서 비유의 뜻은 더욱 명확하여집니다. 놀이를 제안하는 이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시고, 그 제안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이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광야에서 금욕 생활을 하였던 요한은 마치 장례식 놀이를 제안한 격이지만, 그들은 요한의 금욕주의적 태도를 비난하며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먹고 마시는 일에 비교적 자유로우셨던 예수님께서는 혼인식 놀이를 제안하신 격이나, 그들은 예수님을 방종한 생활을 일삼는 먹보나 술꾼으로 취급하여 버립니다. 결국 그들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그 어떠한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배척하여 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로의 초대에, 곧 하느님의 제안과 부르심에 잘 호응하고 계십니까? 사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며, 그분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부르심이 단 한 번 일어나고 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언제나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초대에 혹시 무관심하지는 않은지, 응답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묵상 :
가나안을 거꾸로 해보세요
어느 신부님으로부터 요즘에 ‘가나안 신자’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젖과 꿀을 흐르는 가나안 땅을 떠올리며 열심히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인가 했습니다.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저를 보며 웃으면서 ‘가나안’을 거꾸로 말해 보라고 하십니다.
‘안나가 신자’라는 것입니다. 냉담 교우, 쉬는 교우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가나안 신자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기 힘들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당이 재미없어서 또 신앙이 와 닿지 않아서, 성직자나 수도자에 대한 불만, 교우들과의 마찰로 인해서….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이유로 많은 이가 ‘가나안 신자’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 본당은 교적 대비 주일 미사 참석률이 25% 이상입니다. 전국 평균보다도 또 인천교구 내에서도 주일 미사 참석률이 꽤 높은 편이라고 이야기 듣습니다. 하지만 슬픈 현실이기도 합니다. 자그마치 70% 이상이 주일 미사에 나가지 않으면서 ‘가나안 신자’로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만을 바라본다면 성당 나갈 이유가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세상만을 바라보고 있으며 또 사람만을 바라봅니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25%의 열심한 교우들의 영향이 ‘가나안 신자’들에게 조금씩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주님 당신만을 바라보는 열정을 주님께서는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주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총을 얻게 됩니다. 이를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를 철저하게 지키셨던 분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주님을 따르지 않을 이유는 너무나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나라에서 믿지 못하게 했으며, 자기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만을 바라보았기에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이겨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어 가장 커다란 영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과거 우리 순교자들을 바라보면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가나안 신자’의 길이 아닌 순교자들의 삶을 우리도 쫓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순간의 기쁨이 아닌 영원한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패배자는 자신의 패배를 조건 탓으로 돌린다. 나는 조건을 믿지 않는다. 이기는 사람은 바라는 조건이 갖춰지지 않을 때 바라는 조건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 조지 버나드 쇼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이어가는 또는 증거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이번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에는 궤변일지도 모르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순교 성인들처럼 꼭 순교해야 하나? 배교한다고 해도 하느님을 배신하는 것은 아닐 수 있지 않은가?
박해상황이 되어 또는 북한에 살게 되어 천주교를 믿지 말라고, 믿으면 사형에 처한다고 하면 굳이 믿겠다고 할 필요가 있을까?
겉으로는 안 믿겠다고 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되지 않는가? 입으로 안 믿는다고 해도 내가 하느님을 믿으면 되지 굳이 믿는다고 하여 죽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성인들 가운데 대표 성인인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가문을 보면 아버지 형제 가운데 아버지 정약종과 가족은 모두 순교하였지만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를 선택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고 유배 가 정말로 위대한 업적을 많이 남겼는데 지금에 와서 정약용이 천주교를 완전히 떠난 것인가, 하느님을 믿지 않은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가운데 우리 가톨릭은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옹호하고 저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그리고 입으로 배교했다고 하느님을 버린 것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고, 사실 많은 신자가 순교하지 않고 산속으로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이어간 것은 입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신앙을 증거 하지 않았다는 면에서는 같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 가운데 배교 후 교회를 파괴까지 한 완전한 배교자를 빼놓고, 나머지는 두 부류 곧 신앙을 ‘이어온 신자’와 ‘증거 한 신자’ 두 부류이며, 오늘 우리가 기리는 성인들은 그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증거 한 분들이고, 대표 성인인 정하상 바오로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적극적인 분이셨습니다.
정하상 바오로는 6세 때 아버지 정약종과 형 정철상이 먼저 순교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생활이 어려워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친척들까지 그의 가족이 천주교를 버리도록 “비난, 협박, 멸시, 조소, 심지어 학대까지도 모두 동원되었다.”라고 달레의 한국 천주교 교회사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때 이것을 개인의 불행을 넘어 가족의 불행이라고 생각했으면 배교했을 텐데 정하상 바오로와 가족들은 그것을 가문의 영광이요 영광의 기회라고 생각했으며, 그랬기에 그는 20대 젊은 나이에 한국교회의 중심이 되어 대단한 활약을 펼칩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교회를 설립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설립하기 위해서 그는 1825년 조선의 독립적인 교구 설립을 요청하는 편지를 교황청에 보내어 1831년 마침내 조선 교구가 설립되게 하였으며, 성직자들을 모셔 오기 위해 2,000km의 북경 길을 여러 차례 왕복하였고, 그래서 조선 교구 2대 주교인 앵베르 주교와 모방과 샤스땅 신부를 영입했습니다.
그의 업적 중에 ‘상재상서’를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글이 어쩌면 한국교회 최초의 교리서 또는 신학 저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글에서 천주교가 어떤 교인지 보유론과 호교론적인 입장에서 역설하였습니다.
이런 그를 앵베르 주교는 신학 교육을 속성으로 시키고 사제품을 주려고 했으나 1939년 기해박해로 그가 순교하게 되어 그는 한국교회의 첫 신학생이 된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그것은 김대건, 최양업, 유방제의 신학생 선발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정하상 바오로와 적극적으로 하느님과 신앙을 증거 한 순교 성인들을 보면서 우리는 오늘 우리 자신의 신앙이 어느 정도인지 돌아봅니다.
근근이 이어가는 신앙인지, 적극적으로 증거 하는 신앙인지, 하느님으로 행복하고 그 행복을 전하는 신앙인지.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우리 삶에 진정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모르고 살아갑니다. 아름다운 지혜는 아름다운 침묵으로 빚어집니다. 소통과 상호존중을 다시 배우는 시간입니다. 함께 웃고 함께 우는 공감의 지혜를 잃고 우리는 살아갑니다.
공감의 길을 잃으면 우리는 무례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진정성까지 의심하는 우리들이 됩니다. 그만큼 소중함의 여정을 건너뛰며 살아갑니다. 소중함은 구체적인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지혜입니다.
지혜는 비판과 반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이 하느님을 향해 열려있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하지 않습니다. 정서적 폭력상황에서 벗어나는 지혜는 우리를 감사와 기쁨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지혜는 소통이며 지혜는 열림이며 지혜는 공감이며 지혜는 상호존중입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는 하느님 자녀들의 기쁨입니다. 외로움과 그리움 사이에 소통이 있고 지혜가 있습니다.
풍요로운 삶은 지혜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지혜가 소외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행복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지혜가 옳았습니다. 지혜의 새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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