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오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가장 작은 내 형제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느님, 거룩한 순교자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사제가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를 열렬히 사랑하여 영혼들을 돌보며 이웃을 사랑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언제나 이웃에게 봉사하며 죽기까지 성자를 닮게 하소서.
2023년 8월 14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8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시편 성경 말씀 카드
당신 말씀 세상에 보내시니, 그 말씀 빠르게도 달려가네. (시편 147,15)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신명기 10,12-22)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라.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 오늘 복음
(마태오 17,22-27)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되살아날 것이다.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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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하느님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게 하셨네.
마태오 복음
17장 22-27절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되살아날 것이다.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는다.
제자들이
22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24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25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26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8월 14일 (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
📌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소개 00:05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8:57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8월 14일 (월)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조학문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8:56
📌 강론시작 17:40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14일 (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14일 (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동전 한 닢으로 연결된 사랑
초대 교회에서 물고기는 예수님의 신원과 관련된 중요한 상징물입니다. 로마의 카타콤베(땅속에 있던 신자들의 거주지와 무덤)에는 지금도 물고기 그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물고기는 당시 언어로 ΙΧΘΥΣ(이크투[티]스)인데, 초대 교회 공동체는 이 다섯 철자에 각기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적용하여 예수(Ι), 그리스도(Χ), 하느님(Θ), 아들(Υ), 구원자(Σ)의 이름을 떠올렸습니다. 마태오는 분명 이러한 초대 교회의 전통을 알고 있었기에 물고기와 예수님의 신비 특히 파스카 신비를 상징적으로 서로 연결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 세 논쟁과 관련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그분의 신원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분께서는 성전 세를 낼 필요가 없는 성전의 주인 곧 하느님 아버지의 아드님이십니다(26절 참조). 그럼에도 성전 세 논쟁으로 걸려 넘어질 이들을 위하여 호수에 가서 물고기를 잡아 입을 열고 동전을 꺼내 그들에게 주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27절 참조).
성전 세를 내는 것을 받아들이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맺는 유일무이한 관계를 내세우지 않으실 만큼 당신을 낮추십니다. 성경 말씀처럼 그분께서는 우리의 조건을 완전하게 받아들이십니다.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비우시고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8 참조).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물에 스스로 잠기는 것을 받아들이신 물고기이십니다. 그러시고는 당신의 부활로 베드로처럼 당신께 희망을 건 모든 이를 자유롭게 하여 주셨습니다. 당신과 베드로가 성전 세를 위한 동전 한 닢으로 연결되어 있듯(“나와 네 몫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자유와 구원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고귀한 자유의 선물 대신 바쳐야 할 유일한 동전 한 닢은 형제적 사랑의 세(의무)입니다(제1독서 참조). 우리의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시고 죽음과 예속의 조건에서 우리를 자유로이 구원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 곁의 미소한 형제들을 돌보고 사랑하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 당장 ‘남’이라는 글자를 써보아라.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그러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지금 당장 ‘남’이라는 글자를 써보아라. ‘남’이라는 글자는 ‘ㅁ’ 위에 ‘나’를 올려놓은 것이다. 그렇다. 남을 위해 살면 내가 더 돋보이고 내가 원하는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나’만을 위해 사는 사람을 향해서 사람들은 좋은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이기주의자, 위선자라는 말을 하면서 계속해서 깎아내립니다. 그에 반해 남을 위해 사는 사람에게는 존경과 사랑이 멈추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위로만 올라갑니다. 결국 ‘남’을 위해 사는 것이 곧 ‘나’를 위해 사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과 사랑을 받고 싶다면,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닌 ‘남’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즉, 남을 위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남보다 먼저를 나를 바라보려는 마음이 생길 때, ‘ㅁ’ 위에 올려진 ‘나’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계속해서 높아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랑을 강조하셨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을 이야기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를 따라야 하기에 당신이 먼저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모범을 따라 ‘남’을 위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모든 유다인은 매년 스타테르 반 닢의 성전 세를 바쳐야 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의 유지, 관리, 보수 등의 운영을 위해 유다인에게 부과된 종교세였습니다. 단, 사제와 율법 학자는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봉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제나 율법 학자로 평가하곤 했었지요. 그래서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마태 17,24)라고 베드로에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제와 율법 학자처럼 단순히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높으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성전의 주인이십니다. 주인이 세금을 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오히려 세금을 받아야 할 분이십니다. 그러나 불필요한 논쟁과 충돌을 피하십니다.
성전 세를 내지 않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향한 공격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 아니라는 이유가 됩니다. 예수님의 신원을 부정하는 것으로 죄의 영역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죄의 영역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지요. 그래서 성전 세 논쟁으로 걸려 넘어질까 봐 베드로에게 낚시를 던지라고 하시며, 잡힌 물고기 입 속에 있던 스타테르 한 닢을 가지고 자신과 베드로의 몫으로 성전 세를 내게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이런 배려와 사랑을 보면서 우리의 배려와 사랑을 바라봅니다. 정의만을 외치면서 사랑의 마음을 완전히 버리는 모습, 합리적이지 못한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사랑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모습, 세상의 법칙을 내세워서 주님의 법칙인 사랑을 잊어버리는 모습 등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처럼 ‘나’보다 ‘남’에 대한 사랑이 우선이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진정한 독해력이란 문자를 정확히 읽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무엇을 읽건 거기에서 삶을 바라보는 능력이다.
- 정혜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전세를 대신 내주는 물고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할 것이지만,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제자들은 몹시 슬퍼하면서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자녀임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다음 나오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왜 돌아가셔야만 부활하실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시냐고 세금을 걷는 이들이 다가와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베드로는 내신다고 대답하고는 깊은 생각에 잠겨 돌아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고 베드로에게 성전이 곧 아버지의 집임을 일깨우십니다.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성전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 집의 주인이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도 베드로의 것까지 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여기서 왜 굳이 물고기를 잡아 그 동전을 바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물고기가 당신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굳이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베드로의 것까지 내주시기 위해 목숨을 바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 덕분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서 어떤 대접을 받으실까요? 분명 하늘 나라에 사실 자격이 있으시지만, 아버지와 백성들로부터 더 큰 대접을 받으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개는 가만히만 있으면 사랑을 받습니다. 그런데 ‘개는 훌륭하다’에 보면 집에 들어오는 이들뿐만 아니라 주인까지 무는 개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한 번은 그런 개를 강 훈련사가 훈련하다가 손을 물렸습니다. 그러자 강 훈련사가 목줄을 잡고 단번에 제압합니다. 이때 가족들은 물린 강 훈련사가 아니라 자신들의 개가 그런 꼴을 당하는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런 개와 살면 지옥입니다. 나중에는 자신들도 감당할 수 없어서 안락사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EBS 다큐 중 유튜브에 ‘귀여운 섬마을 강아지가 해녀 엄마 출근 시켜놓고 11년 동안 몰래한 행동?’이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욕지도라는 섬에 오월이란 열한 살 강아지가 있습니다. 그 강아지는 선착장에 서 있다가 관광객이 내리면 관광객들을 이리저리 안내합니다. 여행하러 온 사람들은 강아지의 안내를 따라 구경하고 강아지를 안고 사진도 찍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 개가 욕지도에 버려진 개이고 먹을 것을 얻으려 이런 행동을 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오월이는 욕지도의 유명인입니다. 이미 TV에도 여러 번 출연하였습니다. 그리고 엄마도 있습니다. 엄마는 해녀인데, 엄마가 외로울까 봐 육지에 나간 딸이 5월에 선물해 준 강아지가 오월이입니다. 엄마는 아침에 배를 타고 나가 저녁에 돌아옵니다. 엄마를 배웅하고 오월이는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관광객들을 이끄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11년 동안 보니까 관광객이 어디로 가는지 잘 알아서 그 일을 하고는 엄마가 돌아올 시간이 되면 선착장에 꼭 나가 있곤 하였습니다.
오월이 덕분으로 욕지도도 조금 더 유명해질 수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오월이가 지나가면 먹을 것을 줍니다. 덕분에 오월이 엄마도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오월이는 굳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엄마에게 사랑받습니다. 하지만 관광객들에게 욕지도를 소개하며 엄마와 마을 사람들에게 ‘더’ 사랑받습니다. 이를 위해 굳이 하지 않아도 하는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개와 비교해서 죄송하지만,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께 사랑받는 분이시지만, 당신 나라를 자랑스럽게 하고 사람들에게 그 나라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심으로써 더욱 사랑받으십니다.
우리도 아버지께 사랑받고 이미 하늘 나라에 살고 있는 분들에게 더 사랑받으려면 그 하늘 나라를 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하늘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욕지도에 개가 오월이 혼자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월이는 욕지도에 엄마도 있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을 사람들도 있고 더군다나 섬도 아름답기에 욕지도를 떠날 마음이 없습니다. 이런 자랑스러운 마음이 그곳에 오는 사람들에게 더 친절하게 대할 힘이 된 것입니다.
욕지도에 들어오는 관광객을 보고 짖고 하는 개가 있다면 그 개는 결국 욕지도에 머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를 자랑스러워하고 그 나라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어떻게 내가 하늘 나라를 소개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십자가의 열매는 결국 하늘 나라에서의 영광스러운 부활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마음의 할례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분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어떤 존재인지 신명기는 오늘 이렇게 얘기합니다.
“보라,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것이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에게만 마음을 주시어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오늘 이처럼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자손들인 너희만을 선택하셨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아버지신데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마음과 사랑을 주시어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민족 가운데 선택된 민족 곧 선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은 사랑치 않고 이스라엘만 사랑하신다고, 이스라엘이 오해할까 봐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이방인들도 사랑하신다고 신명기는 또한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이 이러하시니, “너희도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신명기는 얘기하고, 아울러 괜히 선민의식 때문에 교만하지 말라는 뜻으로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더 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마라.”고도 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뽑힌 이유는 다른 민족들 위에서 거들먹거리고 무시하고 군림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경외하고 섬기고 사랑하듯이 그 백성도 사랑하고 섬기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제가 이 얘기를 길게 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 뜻을 모르고 잘못된 선민의식과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그런 이유로 저는 이스라엘 족속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앙이 아닌 인간적인 이유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싫어하고 그래서 주님 때문이 아니면 이스라엘에 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에 비해서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성전 세를 내십니다. 성전 세를 받으셔야 할 분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권을 내려놓으시는 주님의 모범이지요. 이런 주님의 모범과 신명기의 가르침에 비추어 우리는, 아니, 저는 반성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 백성인 신자가 되고, 제가 사제가 된 것은 하느님의 크나큰 은총이고, 하느님께서 이 은총을 주신 것은 하느님의 다른 자녀들을 섬기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마치 부모가 큰아들에게 재산을 더 물려준 뜻과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것으로 조상들 제사를 책임지고 봉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자녀들 곧 형제들을 도우라는 뜻 말입니다.
저나 여러분 모두 신앙의 유산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다른 사람보다 먼저 소유하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먼저 알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내 것으로 꿀꺽 삼킬 것이 아니라 나눠야 하고, 나만 그 행복을 누릴 것이 아니라 같이 누리자고 이웃을 초대해야 합니다.
나만 행복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미안한 것입니다. 나만 행복한 것은 하느님 나라의 행복도 아니고, 그러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유산도 아닙니다.
선교의 이유, 복음 선포의 이유가 여기에 있고, 선교의 사명, 복음 선포의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깨닫고 신명기 말씀처럼 우리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마음의 할례란 마음에서 교만이나 특권 의식 같은 것을 벗겨내고 마음에 연민과 사랑만 남게 하는 것이고 다른 이의 구원에 대한 무관심을 관심으로 바꾸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사랑과 함께 마음을 주셨다고 신명기는 말하는데 그 마음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의 마음 곧 관심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이점을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렇다면 자녀들을 면제받는 것이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서로를 가두는 감옥과 무덤에서도 사랑의 꽃은 피어납니다. 사랑은 버텨주고 받쳐주고 내빼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을 지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려주신 빛과 소금의 정체성을 다시 만납니다.
리의 삶에서 치러야만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고통은 사랑을 성장시킵니다. 삶에서 만나는 참된 사랑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으로 우리는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아픔을 치유하고 사랑을 보호하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진실한 뜻과 진실한 실천은 가장 혹독한 시대를 뛰어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됩니다.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는 사랑을 성 콜베 사제는 온 삶으로 실천하십니다. 희망을 지키는 것은 또 다른 희망입니다.
삶이 죽어가는 비명과 통곡을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저앉아버린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희망이 사랑입니다. 세상의 적(敵)은 언제나 우리의 무관심이었습니다. 사랑의 여정을 지켜낸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살다 떠날 지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에게서 뜨겁게 배웁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고통스레 죽어간 소중한 분들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역사는 무관심이 빚어내는 살육의 역사가 아닌 사랑의 역사로 바꾸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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