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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8/17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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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의 계약을 돌아보소서! 가련한 이들의 생명을 저버리지 마소서. 일어나소서, 주님, 당신의 소송을 친히 이끄소서. 당신을 찾는 이들이 외치는 소리를 잊지 마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오니 저희 마음에 자녀다운 효성을 심어 주시어 약속하신 유산을 이어받게 하소서.

 

2023년 8월 17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8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여호수아기 성경 말씀 카드

위에서 내려오던 물이 멈추어 섰다. (여호 3,16)

 

위에서 내려오던 물이 멈추어 섰다. (여호 3,16)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여호수아기 3,7-10ㄱㄴㄹ.11.13-17)
    주님의 계약 궤가 너희 앞에 서서 요르단을 건널 것이다.

  • 오늘 복음
    (마태오 18,21─19,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8월 17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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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빛나게 하시고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쳐 주소서.

 

 

마태오복음
18장 21절~19장 1절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8월 17일 (목)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23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8월 17일 (목)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진슬기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미사시작 08:13

📌 강론시작 16:35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17일 (목)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장화기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6:54

📌 강론시작 17:15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17일 (목)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4:03

📌 미사시작 1:03:17

📌 강론시작 1:11:0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성실한 친구는 생명을 살리는 명약

 

성경은 우정의 가치를 높이 평가합니다. 이를테면 “성실한 친구는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어떤 저울로도 그의 가치를 달 수 없다. 성실한 친구는 생명을 살리는 명약”(집회 6,15-16)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좋은 친구를 잃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가 깨지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용서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게 됩니다. 실망과 배반의 고통이 너무 크고, 미움과 복수의 충동을 잠재우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려고 하여도 그에게 예전처럼 온전한 신뢰를 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런 어두움이, 마치 “족쇄와 쇠사슬로”(마르 5,4) 몸이 묶여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우리를 가두고 지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언제나)이 아니라 일흔일곱(또 언제나) 번까지라도”(22절) 우리를 괴롭히는 이들, 우리에게 상처를 준 이들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기도로 청하는 바를 삶으로 옮기도록 초대하십니다. 곧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라는 주님의 기도처럼 우리 친구와 형제들을 언제나 용서하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스라엘이 요르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건너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야기의 중심인 계약의 궤가 가장 앞서 요르단강을 건너갑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우리의 노력과 힘만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나되어 계시는 하느님의 권능이라고 말합니다. 

형제를 용서하는 것도 우리 힘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현존과 그분의 권능을 믿으며 끊임없이 청하여야 할 일입니다. 먼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의 궤를 지고 요르단강을 건넜던 것처럼 우리도 갚을 길 없는 큰 사랑의 빚을 지고 하느님 아버지의 집으로 가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형제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를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도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닭은 살 안 쪄요. 살은 내가 쪄요.

 

어느 형제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아서 금연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금연에 성공하기 위해, 주변 사람에게 담배 끊었음을 열심히 알렸습니다. 하지만 몇 달 뒤에 어떤 모임에서 만났는데 여전히 담배를 피운다는 것입니다. 금연 사흘 만에 다시 피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금연으로 인한 금단 현상에 화가 너무 났고, 이런 화가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담배 피우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했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스트레스가 담배보다 더 나쁘잖아요.” 
 
신자들과의 만남이 중요해서 자주 술을 마신다는 신부님이 기억납니다. 이렇게 술자리를 통해 자주 만나야 본당 일이 잘 돌아간다고 하시네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이 신부 본인이 술 먹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얼마 전, 치킨집에 갔습니다. 메뉴판 옆에 이런 말이 쓰여있었습니다. 
 
“닭은 살 안 쪄요.” 
 
기름에 튀긴 치킨을 먹고 어떻게 살이 안 찔 수 있을까요? 그런데 누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이 말에는 뒷 문장이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즉, ‘닭은 살 안 쪄요. 살은 내가 쪄요.’라고 말입니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합니다. 대신 자신을 합리화하는 존재라고 하더군요. 자신을 합리화하는 과정 안에서 거짓으로 또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실천하면서 보여주신 진리의 길을 향해 갈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용서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당시의 유다인들은 최대한 네 번까지는 용서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용서에 한계를 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니까, ‘네 번 이상을 용서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름 크게 써서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아마 스스로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이지요. 자기 형제가 진 마음의 빚을 진심으로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용서를 바랄 수 없다고 하십니다. 딱 한 번이나 몇 번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용서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 세상의 합리화를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자기 합리화에서 멈추는 삶이 아닌, 하느님 뜻에 맞추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이고 ‘사랑’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기다림을 기꺼이 감당하려는 마음이야말로 진짜 사랑이다.

- 김경민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용서를 위한 두 가지 지식

 

초상집에 가면 아주 가끔은 형제들끼리 여러 가지 이유로 싸우는 경우를 봅니다. 많은 경우 부모에 대한 원망이 형제들에 대한 원망으로 확대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위해 눈물 흘리는 두 형제가 서로 싸울 수는 없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에 대한 용서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용서의 힘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서 나옵니다.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그리스도께서는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신 것은 인정하면서도 모든 이를 위해 피를 흘린 것이 아니라고도 말합니다. 예정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리 미사 경문도 “모든 이”에서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해 흘릴 피다!”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이를 위해 피를 흘리시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은 사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지 않은 사람을 내가 사랑한다고 그분이 기뻐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우리 형제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 형제가 우애 있게 잘 지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KBS joy ‘무엇이든 물어보살’에서 ‘형에게 내미는 화해의 손길, 그리고 먼저 떠난 어머니께 전하는 진심’이란 유튜브 동영상이 있습니다. 이지형이란 서른 살 남자 청년인데 그의 고민은 유일한 혈육인 형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일찍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형과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것은 군대에서 제대하고 보험설계사 일을 하면서부터였습니다. 형에게 5만 원짜리 보험에 가입해 달라고 했는데 형이 거부한 이유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안 계셔서 동생은 형에게 부모의 사랑을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당시 형은 20대 후반이었고 변변한 직장이 없이 결혼하여 아기까지 낳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형에게 형수에게 빌붙어 사는 놈이란 식으로 말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형과 계속 화해하려고 노력합니다. 돈이 좀 생기면 조카들에게 장난감도 보내고 형수 선물도 보냅니다. 그러나 형은 집에 찾아오지 말라며 여전히 마음의 문을 닫고 있습니다. 형도 형대로 상처가 컸던 것 같습니다. 동생은 이런 TV 프로에까지 나오며 형에게 미안하다 하고 화해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형제니까 화해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면 될 일일 것입니다. 화해해야만 하는 이유는 부모님 때문입니다. 특별히 어머니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약을 드시거나 차로 전봇대에 부딪혀 죽으려고 시도할 때 아들로서 그것을 막아드리지 못한 죄책감이 컸던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군대에 갔을 때 어머니가 또 죽고 싶다고 말하며 힘들어할 때 위로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 거면 죽어버리라고 말했고 어머니는 진짜 이틀 뒤 목숨을 끊으신 것입니다. 

누구나 어머니께 조금이나마 미안한 마음을 덜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께 탕감받은 액수가 일만 탈렌트입니다. 약 6조 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부모가 없다면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아드님을 죽이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일만 탈렌트는 우리가 모두 탕감받은 액수입니다. 그런데 100데나리온도 형제끼리 탕감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느님께 전혀 미안한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셔도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자녀가 형제를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위 청년이 어머니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어머니께서 바라시는 일, 형제를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자신도 죽어서 어머니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지금 혼자 산소를 방문할 때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내가 누군가 용서하기 위해 혼자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용서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위로부터 새로 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내가 탕감받은 액수에 미안함을 느껴야 합니다. 내가 찌른 예수님의 상처를 자주 바라봐야 합니다. 그것에서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이 인다면 그다음은 예수님께서 나만을 위해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해 흘리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 앞에 나아가기 위해 모든 이를 용서하고 화해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나를 위해 돌아가시고 모든 이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이 두 가지 지식만이 우리를 참 용서의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과 용서에 자주 실패한다면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몇 번 용서해주어야 하는지, 일곱 번이면 되는지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에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주라는 주님의 대답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과 응답은 어제 주님 말씀과 이어지는 것일 겁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내게 잘못한 사람을 위해, 어쩌면 원수를 위해 교정과 용서와 기도를 해줘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그러니까 어제 주님께서 용서해주라고 하시니 오늘 베드로가 몇 번 해줘야 합니까 하고 묻는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일곱 번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주라고 하시는데 이 ‘일흔일곱 번까지라도’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용서의 횟수를 여쭙는 베드로에게 주님도 횟수로 대답하신 것이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몇 번을 교정해줘야 하는지와 같은 문제입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형제의 잘못을 교정해줘야 한다고 하셨는데 몇 번 교정해줘야 하겠습니까? 일곱 번 충고하고 일곱 번 교정해주면 되겠습니까? 이에 대해서도 주님께서는 마찬가지로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다시 말해서 그가 교정될 때까지 끝까지 교정해주라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몇 번 충고했는데도 또 같은 잘못을 범하면, 여러 번 용서해줬는데 또 같은 죄를 저지르면 그 교정과 용서를 포기하고 싶고 실제로 포기하기도 합니다. 

내 입맛 아프다고 하고, 내 입맛 더러워진다고 하며 포기하는데 이것을 사랑과 연결하면 사랑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일곱 번짜리입니다. 아니, 많은 경우, 우리의 사랑은 일곱 번짜리도 못 됩니다. 이에 비해 주님의 사랑은 몇 번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끝이 없습니다. 

최후 만찬 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끝까지’는 당신이 돌아가실 때까지라는 뜻도 되겠지만,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뜻하는 것일 테고, 배반했던 제자들 곧 당신을 버리고 도망친 제자들이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완전히 다시 돌아올 때까지일 것입니다. 

아무튼, 주님의 사랑은 포기를 모르는, 끝이 없는 사랑이고, 우리에게도 몇 번을 세지 말고 끝까지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비유는 용서의 또 다른 차원을 얘기합니다. 우리의 용서는 인간적인 용서가 아니라 신앙적인 용서, 곧 하느님 용서의 체험에 바탕을 둔 용서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끼리 용서하다 보면 용서가 한계에 부닥칠 것입니다. 일곱 번 정도 용서하고 나면 더 이상 용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내게 해주신 용서를 생각하면, 앞서 봤듯이 끝까지 수없이 용서해주신 그 용서를 생각하면, 내게 범한 그의 작은 죄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고, 한두 번의 용서로 그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범한 나의 죄는 그가 내게 범한 죄보다 더 크고, 하느님께 범한 나의 죄는 그가 내게 범한 죄보다 더 많지요. 그런데도 그 많고 큰 죄를 다 용서받았고 지금도 용서받고 있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 오늘 비유의 무자비한 종처럼 용서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과 용서에 자주 실패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지 못했거나 체험했더라도 그것을 자주 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아무튼, 하느님 용서의 그 물줄기에서 물을 대는, 그런 우리의 사랑과 용서가 되어야 함을 깨닫고 명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심판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의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위에서부터 내리는 용서입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용서입니다. 하늘나라를 지키는 것은 다름 아닌 용서입니다. 누구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용서의 신비입니다. 

우리 자신과 하느님을 위한 용서입니다. 용서는 용서 외에는 갈 곳이 없습니다.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청하는 오늘입니다. 용서가 자라는 만큼 사랑도 자랍니다. 용서의 핏줄이 사랑의 참된 인격입니다. 우리자신을 볼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는 용서의 거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용서는 우리의 삶이며 우리의 하느님 나라 입니다. 용서는 일흔일곱 번의 여정을 거치듯 용서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용서의 하느님을 믿고 따라가는 용서의 눈부신 오늘입니다. 용서의 힘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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