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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8/13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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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의 계약을 돌아보소서! 가련한 이들의 생명을 저버리지 마소서. 일어나소서, 주님, 당신의 소송을 친히 이끄소서. 당신을 찾는 이들이 외치는 소리를 잊지 마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오니 저희 마음에 자녀다운 효성을 심어 주시어 약속하신 유산을 이어받게 하소서.

 

2023년 8월 13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8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9주일

 

 

마태오복음 성경 말씀 카드

오너라. (마태 14,29)

 

오너라. (마태 14,29) 마태오복음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열왕기상권 19,9ㄱ.11-13ㄱ)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 제2독서
    (로마서 9,1-5)
    내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았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14,22-33)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8월 13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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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나 주님께 바라네. 주님 말씀에 희망을 두네.

 

 

마태오 복음
14장 22-33절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군중이 배불리 먹은 다음, 

22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23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24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25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2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27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8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30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31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32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33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8월 13일 (일)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은기 바오로 신부

 

📌 서울성모병원소개 00:24

📌 미사시작 00:51

📌 강론시작 14:51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8월 13일 (일)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전두병 요아킴 신부

 

📌 미사시작 01:57

📌 강론시작 12:37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13일 (일)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4:04

📌 강론시작 14:5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그분의 이끄심에 우리의 인생을 내맡기는 순간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 곁에 머물며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작은 배에 몸을 싣고 맞바람을 맞으며 호수를 건너갑니다. 

복음사가는 그 시대의 교회 모습을 이 이야기에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파도와 바람에 흔들리는 제자들의 배는 안팎으로 난관 속에 있는 교회의 모습이고, 무엇보다도 ‘도대체 주님은 어디에 계신가?’ 하는 의문이 신자들의 마음속에 꿈틀대는 그때 상황을 빗대는 듯합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많은 이가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며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돌보면서 때때로 주님께서 그들에게서 멀리 계신 듯 느껴지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난관과 주님 부재의 체험. 이에 대한 복음서의 답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 곁에 계신 것은 맞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로 그분께서는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입니다(베네딕토 16세, 『복음서 주해』(Commenti ai Vangeli), 바티칸출판사, 279면 참조).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보고 계시기에 가장 적절한 순간에 우리 곁으로 오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러 믿음의 항해를 하다가 물속에 빠졌을 때 그분께서 다가오시어 베드로의 손을 잡아 구하여 주셨습니다(31절 참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한결같이 손을 내미십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참례하는 미사에서, 우리가 촛불을 켜고 마음 모아 기도할 때, 우리가 하느님 말씀 안에서 그분을 만나는 바로 그때, 그리고 살면서 겪는 많은 일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손을 잡아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을 잡고 그분의 이끄심에 우리의 인생을 내맡기는 순간순간 우리의 삶은 주님의 은총으로 채워지고, 우리는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히브 10,38 참조).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앙인의 목표

 

100미터 달리기 선수가 있습니다. 100미터 달리기는 10초대에서 경기 자체가 끝납니다. 그렇다면 거의 10초대에 끝나는 경기라서 이를 준비하는 시간도 짧을까요? 그렇지 않지요. 그 짧은 순간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비지땀을 흘리며 엄청난 양을 훈련해야만 합니다. 만약 훈련을 전혀 하지 않고 시합에만 집중하면 어떨까요? 당연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이 세상 삶을 마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길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문제는 그 나라에 들어갈 준비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일이 바빠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남들도 다 그렇다면서 자신의 준비 없음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아무런 준비 없이 우리 목표에 도달할 수가 있을까요? 무작정 하느님 자비에만 맡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실제 경기보다 훈련에 쏟는 시간이 더 길 수밖에 없고 또 더 중요한 것처럼, 지금 주님의 뜻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께 대해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훈련의 시간이 길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이 결국은 모두 나를 위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물 위를 걸으시어 제자들 쪽으로 가신 것입니다. 마침 제자들은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모습에 “유령이다” 하며 두려움의 소리를 지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맞바람이 부는 거센 파도에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알아보지 못한다고 화를 내는 주님이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을 알아보는 것은 편하고 쉬운 삶 안에서만 이뤄져서는 안 됩니다. 거센 파도가 이는 고통과 시련에서도 주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을 만나는 결과만이 아닌 계속된 훈련, 즉 믿음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베드로가 청합니다. 예수님의 “오너라.”라는 대답에 그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걷습니다. 그러나 물에 빠지고 맙니다. 주님만을 바라봐야 했는데, 바로 거센 바람에 두려움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으뜸 제자인 베드로도 훈련이 계속 필요했습니다. 하물며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요? 늘 깨어 기도하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의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참 하느님의 아드님과 늘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본립도생(本立道生) 기본이 바로 서면, 나아갈 길이 보인다.

- 논어 학이 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노력하면 수영은 배울 수 있겠지만, 기도하면 물 위를 걷는다.

 

오늘 복음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물 위를 걷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고 제자들은 배 위에서 세찬 바람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는 기도가 세상의 고난을 밟고 걸을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킴을 보여줍니다. 바다 위는 하늘 나라, 바다 밑은 지옥, 그리고 바다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본모습을 봄으로써 자신 또한 세상의 그러한 풍파에 시달릴 존재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괴롭히는 파도 위로 뛰어내려 밟아봅니다. 기도의 본질은 내가 그리스도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임을 믿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들이 하는 것은 ‘노력’입니다. 수영을 배우거나 물에 뜰 수 있는 것들을 붙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과 함께 바다에 가라앉고 맙니다. 2004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한공주’(2014)란 영화가 있습니다. 부모도 그녀를 보호해주지 않습니다. 새로 전학 온 학교에서 성당을 다니는 친구가 외톨이 한공주에게 이유 없이 잘 대해주기는 합니다. 

공주는 수영을 필사적으로 배웁니다. 자신도 자신과 함께 당하여 다리에서 뛰어내린 친구처럼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가해자들의 부모가 한공주를 괴롭히자 한공주는 도망 다니며 찜질방에서 자야 하는 신세가 됩니다. 공주에게 잘해 주었던 유일한 친구도 유포된 동영상을 보며 충격을 받아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오갈 데 없는 한공주는 다리 밑으로 뛰어내립니다. 다시 생겨나는 살고 싶은 욕망으로 그동안 배웠던 수영을 시도해 봅니다.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다시 물속으로 잠깁니다. 그렇게 다시 떠오르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수영이나 결국 가라앉아버릴 것에 의지해서는 이 세상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없습니다. ‘수영을 배우지 말고 믿음을 가졌더라면!’ 성당 다니는 친구는 그녀에게 그런 것과 상관없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어야 합니다. 그러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은 인정받지 못해 생깁니다. 사랑받지 못해 생깁니다. 인정받음은 곧 자존감의 상승을 의미합니다. 부모에게 인정받으면 부모와 같은 본성임을 믿게 됩니다. 사람의 부모에게 인정받으면 사람이라 믿게 되고 그러면 적어도 세상에서는 살 힘을 지니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사람들입니다. 

심리상담사, ‘고코로야 진노스케’의 『너무 노력하지 말아요』란 책이 있습니다. 고코로야가 심리상담사로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우선 강연을 통해 사람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최신 사은품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홍보해도 강연장은 텅텅 빌 때가 많았습니다. 고코로야는 계속 자신의 문제점을 찾아내어 바꿔보려 했습니다. ‘홍보를 잘 못 했나?’, ‘수강료를 좀 더 싸게 했으면 잘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바뀌는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아! 내가 내 강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구나!’ 

자기 스스로 자신의 강연이 ‘더 싸고 좋은 혜택이 있어야지만 관심을 가질만하다’라는 전제로 강연의 가치가 낮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그는 ‘내 강연은 수강료가 비싸도, 사은품이 없어도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강연이다’라고 전제를 바꾸고, 원래는 도쿄까지 올라가서 하던 강연을 사은품도 없애고 자신의 고향인 교토에서 그냥 열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강연장에 사람이 꽉 찼습니다. 

고아로 남의 집 식모살이만 하시며 자라신 저희 어머니가 자살을 생각하실 때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며 나병 환자촌 있는 곳으로 방향을 바꾸시며 말씀하십니다. 

“저런 사람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니?” 

어머니는 다시 살 결심을 하십니다. 나병 환자도 잘살게 해주시는 분이 어머니도 잘살 수 있게 해주시는 분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영화 ‘명량’(2014)에서 이순신 장군은 자신을 따르지 못하는 나머지 배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이렇게 청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수도자라면 더더욱 하느님 현존 체험을 원합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할까요? 원한다고 하지만 그 갈망과 원의가 약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야말로 체험의 가장 근본적인 결격사유이고, 그렇다면 왜 갈망과 원의가 약할까 다시 질문케 됩니다. 

그것은 초월적 감수성이 본래 약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현재의 삶이 평안하고 안전하고 그래서 하느님 없이도 사는 데 별 어려움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보통 살만하면 하느님을 잘 찾지 않고 오히려 불평이 많은 법이고, 삶이 위태로워지고 고통스럽고 불안하고 두려울 때 찾곤 하잖아요? 

그래서 오늘 연중 제19주일은 하느님을 체험하는 엘리야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얘기를 전하면서 위기와 두려움 체험의 상황을 먼저 전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거짓 예언자들과 싸워 모두 작살낸 다음, 그로 인해 이세벨에게 쫓겨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도망치고, 거기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가운데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었고, 베드로와 제자들은 풍랑으로 죽게 되었을 때 구원의 주님을 체험하게 되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선에서 선하신 하느님을 더 잘 체험할 것 같은데 보통 선에서 선하신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악에서 선하신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왜 그럴까 생각하면 보통 우리가 체험하는 선들은 우리가 그 선에 주저앉고 머물게 하고 대리 만족하게 하지, 그 선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지혜서는 이런 통찰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훌륭하신지 그들은 알아야 한다. 아름다움을 만드신 분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또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러는 가운데 빗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분의 업적을 줄곧 주의 깊게 탐구하다가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도 아름다워 그 겉모양에 정신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아름다운 꽃들을 보면 ‘아! 아름답다. 참 좋다.’라고 하지 ‘이 이름다운 꽃들을 지어내신 참으로 좋으신 주님이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워 볼 때’를 노래하면 선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사람 곧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악을 경험하면 그 싫어하는 악에서 도망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제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으면 그때 그 악에서 구해줄 하느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것을 바꾸면 선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두려운 악에서 구하소서. 이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에 머물지 않고 고통의 악에서 구하소서. 이 세상의 온갖 안락함에 안주하지 않고 불안의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선과 기쁨과 즐거움과 안락함은 우리를 거기에 머물게 하고 안주케 하지만 두려움과 고통과 불안의 악들은 거기서 도망치게 하고 주님을 찾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종종 당신을 체험하도록 악의 방법을 쓰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일부러 제자들만 따로 호수를 건너게 하십니다. 당신 없이 그 두려운 풍랑을 맞닥뜨리게 하십니다. 

다른 곳에선 한배에 타고 계시지만 잠자고 계시고, 풍랑과 힘겨운 싸움을 하다가 살려달라고 할 때에야 일어나시어 풍랑에서 구출해주십니다. 

악의 체험, 한계 체험, 두려움의 체험을 먼저 하시고, 당신의 현존과 구원을 체험하게 하시는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풍랑에서 만나는 새로운 용기와 희망입니다. 주님을 향하는 실천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물길을 내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흔들림이 있기에 믿음이 있습니다. 풍랑 속에서 우리는 주님을 닮아갑니다. 

의혹과 의심이 커질수록 멀어지는 믿음의 용기입니다. 풍랑으로 우리 자신을 알게 됩니다. 풍랑처럼 모든 여정이 위험하지만 풍랑을 다스리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헤엄쳐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건너가게 하십니다. 

언제나 뒤늦게 깨닫는 것은 풍랑이라는 믿음의 선물입니다. 생명과 두려움은 용기와 믿음으로 더욱 풍요롭습니다. 풍랑은 예수님을 가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드러내고 만나게 하는 풍랑입니다. 사람은 풍랑으로 성장하고 풍랑으로 겸손을 배웁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풍랑같은 현실은 주님을 이야기합니다. 풍랑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 풍랑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우리 마음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풍랑의 뒷면에는 우리의 뜻을 내려놓는 믿음이 있습니다. 두려움과 용기를 나누어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은총가득한 믿음의 가장 좋은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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