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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8/09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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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저의 도움, 저의 구원은 주님이시니, 주님, 더디 오지 마소서.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니 주님을 창조주요 인도자로 모시는 이들과 함께하시어 주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하신 모든 것을 지켜 주소서.

 

2023년 8월 9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8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마태오 복음 성경 말씀 카드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마태 15,28)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마태 15,28)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민수기 13,1-2.25―14,1.26-30.34-35)
    그들은 탐스러운 땅을 업신여겼다.

  • 오늘 복음
    (마태오 15,21-28)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8월 9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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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마태오복음
15장 21-28절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8월 9일 (수)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용현 베드로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0:04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8월 9일 (수)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이철규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8:36

📌 강론시작 20:13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9일 (수)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함께 걷는 순례의 길

 

예루살렘 남쪽에는 오늘날까지도 “옹기장이 밭”, “피밭”이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이 사제들에게 건넨 돈으로 산 땅이라 일컬어지는 곳입니다(27,3-10 참조). 사실 그 지역은 이스라엘의 몇몇 임금들이 우상 숭배를 하고 이방 신에게 제사를 바쳤던 곳입니다(2열왕 23,10 참조).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은 유다에게 받은 돈으로 그 지역을 사 이방인들의 무덤 터로 삼았습니다. 이른바 ‘더럽고 불결한’ 이방인들은 죽어서도 아브라함 후손들의 지역에는 묻힐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에게 이방인 혐오와 차별은 오래된 전통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 자신의 딸을 구하여 달라고 애타게 도움을 청합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제껏 그 어떤 이스라엘 사람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온 이방인에 대한 멸시와 그들의 불결함과 자격 없음을 환기시키는 이전까지의 이야기는, 사실 이 말씀(결론)을 강조하여 극적으로 대비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방인에게 지니는 태도를 당신의 말씀과 행동으로 보여 주시고,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가르쳐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함으로 초대되고(5,48 참조), 모두 그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이들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스스로 깨달은 사람만이 구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이입니다. 자신이 남들보다 더 낫고 선하며 거룩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사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희망이 그다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21,31). 

함께 걷는 순례의 길에서 우리가 차별하거나 부끄럽게 여기는 동료는 없는지 돌아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비싸고 맛있는 최고급 음식이 플라스틱 접시에 담겨 있다면?

 

인천교구 성직자 사진첩을 보다가 한 선배 신부님의 사진에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신부님과의 만남이 떠올려졌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섬세하시고 또 애정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차 한 잔을 마셔도 제대로 마셔야 한다면서 좋은 찻잔에 정성을 다해 맛있는 차를 만들어 주셨지요. 만약 차를 담을 찻잔이 없으면, 저 같은 보통 사람은 아무 잔이면 어떠냐고 할 텐데 신부님께서는 아예 차를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음식 역시 제대로 된 그릇에 담겨 있어야 맛이 나지 아무 그릇에 대충 담으면 그 음식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에게뿐 아니라 다른 사물에도 늘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유명한 식당에 가면, 그 음식에 맞게 멋진 접시에 담겨 있습니다. 만약 정말로 비싸고 맛있는 최고급 음식이 플라스틱 접시에 담겨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음식의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음식에 맞게 접시가 꾸며질 때, 음식의 맛이 더 좋게 느껴지고 실제로 음식 맛도 훌륭해질 것입니다. 
 
이 제각각의 접시에 우리 마음을 대입해 보았으면 합니다. 즉, 주님을 담는 각자의 마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주님을 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모습에 따라 주님의 영광이 더 환하게 세상에 드러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각자의 마음을 멋지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세상에 어떻게 비추고 있었을까요? 자기 마음의 상태와 모양이 중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떠나 이방인 지방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어느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지요. 자기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다는 것입니다. 이 청을 곧바로 들어주셨을까요? 아닙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면서 거절하십니다. 사람을 강아지에 비유한다는 것, 상당히 모욕적인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은 가나안 부인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변하지 않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함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겸손의 마음이 가나안 여인이 얻고자 했던 치유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바로 주님을 담는 마음으로 언제나 주님과 함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기 믿음을 훌륭하게 드러냅니다. 그런 멋진 마음이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보일 수 있었으며, 이로써 자기가 원하는 딸의 치유도 얻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런 그릇이 될 때, 가장 멋진 주님을 모시면서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잘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좋은 죽음을 위해, 영원을 위해 우리 자신을 더 잘 준비합시다. 미지근한 태도와 나태함과 습관적인 불신앙에 시간을 낭비하지 맙시다.

- 성 요한 비안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부스러기라도 감사할 때 빵도 받는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의 딸을 치유해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예상외로 가나안 여인에게 불친절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하십니다. 이에 가나안 여인은 자신의 믿음을 이렇게 보여줍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자존심도 없나?’란 생각이 드는 대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믿음이 있어야 바라는 대로 됩니다. 믿음도 없이 바라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것의 부스러기라도 바라는 겸손에서 나옵니다. 나를 믿음이 하느님을 믿지 않음이고 하느님을 믿음이 나를 믿지 않음입니다. 

‘포크포크’엔 ‘모두가 거부한 아이 입양한 여성. 20년 뒤 놀라운 운명 마주해’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한 여성이 모두가 싫어하는 아이를 입양하게 됩니다. 잉게보르는 수년간 125명의 위탁 아동을 보살펴왔습니다. 조던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잉게보르는 조던을 입양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조던의 생모는 백인이 흑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며 자기 아들이 잉게보르에게 입양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흑인 남자아이를 입양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4년이 지나서야 잉게보르는 조던을 입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잉게보르와 조던은 서로를 아끼며 사랑하는 친 모자와 다를 바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뒤, 잉게보르는 어느 날부턴가 복부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통증은 더 심해졌고 의사는 너무 늦어서 신장을 이식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신장을 줄 사람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잉게보르가 모든 것을 놓고 주저앉으려는 순간 조던이 어머니 몰래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어머니에게 자신의 신장을 이식할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조던이 친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식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조던은 끝까지 주장하였고 의사들이 맞춰본 결과 놀랍게도 조던의 신장은 어머니 것과 정확히 일치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조던 것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이미 조던의 마음은 굳어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제게 모든 것을 주셨잖아요. 이제 제가 돌려드릴 때가 됐어요. 이 모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은 그 안에 나에게 꼭 필요한 더 큰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작은 생명을 무시하며 영원한 생명을 달라고 청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만약 자수성가한 부자가 걸어 다니다가 길에 떨어진 10원이 있으면 주울까요, 줍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제가 읽고 본 내용들을 종합하면 그들은 반드시 그 돈을 줍습니다. 돈은 하늘이 주시는 것인데, 그 작은 것을 대하는 자세가 큰 것을 대하는 자세가 되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은 하나 같이 적은 돈을 소중히 여기라고 합니다. 천 원짜리도 다리미로 다려서 빳빳한 장지갑에 넣고 다니라고 합니다. 돈도 하나의 인격체라 자기 새끼에게 잘못하는 사람에게 가려 하지 않습니다. 어느 분이 자신의 회사 앞에 있는 거지에게 조금 큰돈을 주었더니 그가 벌떡 일어나서 잔돈을 버리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래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은총도 마찬가집니다. 작은 은총을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큰 은총을 주실 리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받은 것에 항상 감사합시다. 그리고 혹시 작은 은총을 무시해버리지 않는지 살펴봅시다. 저도 더 많은 신자가 나왔으면 좋겠다고는 하지만, 아직 요양원에 계신 분들을 다 챙기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만간 우리 지역 요양원을 조사하여 신자들을 찾아내어 하로 따로 시간을 내서 봉성체를 하려고 합니다. 이미 집에서 봉성체 하시는 분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가장 작고 약하고 힘없고 소외된 분들 먼저 챙기지 않으면서 더 많은 신자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은총을 청하면서 그것과 관련된 작은 것들은 무시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겸손하게 부스러기부터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스러기를 잘 챙기는 우리를 보며 주님께서 큰 빵 덩어리 하나를 주지 않으실 리 없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할 때 큰 것도 받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그러나

 

어제와 오늘 연일 보지만 그리고 내일도 보게 되겠지만, 민수기의 이스라엘 백성은 아주 문제적인 인간들입니다. 불평불만이 많고, 그러니까 욕심이 많고, 그러면서도 자신감은 형편없습니다.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은 많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의 여인과 비교할 때.있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없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겸손과 믿음과 사랑의 열정은 있어야 하고, 교만과 불신과 패배주의적 자포자기는 없어야 합니다. 

이면에서 역전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뽑으신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없어야 할 것만 있고, 그들이 개무시하는 가나안 여인에게는 있어야 할 것이 있다는 면에서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방인을 무시할 때 흔히 쓰는 표현으로 가나안 여인의 자식을 강아지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우리말로 하면 개새끼지요. 그런 개새끼가 하느님 선민보다 낫고 선민이란 자들이 개새끼만도 못한 겁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은 강아지 소리를 들어도 그렇다고 합니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인의 이 '그러나'에서 겸손만큼이나 강한 믿음을 느낍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참으로 겸손하기에 모욕당해도 위축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참사랑에 대해서는 믿음이 있고 은총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사람들과 비교하면 나는 비록 강아지지만 ‘그러나’ 주님 사랑은 참되시기에 주님께서는 강아지에게도 은총을 베푸실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비하합니다. 이것은 자기 비하이고 터무니없는 과소평가지 겸손이 아닙니다.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도 교만이지만 실은 과소평가도 교만입니다. 교만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둘 다 나왔다는 뜻입니다. 

어제도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겸손을 소개했지만 우리가 겸손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다면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모든 것을 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나의 약점과 단점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나를 통째로 부정하지 않고 장점도 있음을 볼 것입니다. 

나의 약함을 보고 인정하지만 나는 할 수 없다고 지레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미천함과 죄스러움을 보지만 주님의 참사랑을 믿기에 은총과 구원에서 배제되었다고 지레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메뚜기이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지 않고, 강아지라도 아주 작은 사랑을 크게 누리는, 그런 겸손과 믿음과 은총의 사람들이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고마움을 잃어버린 믿음은 호되게 병든 우리들 믿음입니다. 건강한 믿음은 일상의 부스러기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조건은 언제나 낮아지는 사랑에 있습니다. 부스러기를 껴안는 시간이 실은 우리가 깨끗해지는 시간입니다. 

떨어져 내린 부스러기가 마음을 활짝 열어줍니다. 부스러기를 만나는 시간이 내면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내려가기를 죽도록 싫어하는 우리를 향해 하느님께서는 부서지는 부스러기로 매순간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의 삶과 생활은 부스러기의 총집합입니다. 부스러기를 존중하는 것이 삶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스러기가 우리 편이 되어 우리와 함께 살려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조금만 머리를 숙여도 부스러기의 은총이 예쁜 꽃으로 피어납니다. 우리가 잡은 간절한 부스러기의 말씀 한 구절이 우리를 살립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이 고마움이 여인과 딸을 살리는 믿음이 됩니다. 

믿음이란 부스러기조차 감사하는 우리의 생활입니다. 부스러기에 숨어 계신 하느님을 진심으로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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