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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8/11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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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슬기롭고 지혜로운 동정녀는 등불을 밝혀 들고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갔네.

하느님, 복된 클라라를 자비로이 이끄시어 가난을 사랑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가난의 정신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마침내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을 직접 뵈옵게 하소서.

 

2023년 8월 11일 (금)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8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마태오복음 사람과 목숨 성경 말씀 카드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마태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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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8월 11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오복음
16장 24-28절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8월 11일 (금)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홍승국 이사야 신부

 

📌 성녀 클라라 소개 00:05

📌 미사시작 01:12

📌 강론시작 08:57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8월 11일 (금)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전두병 요아킴 신부

 

📌 미사시작 07:34

📌 강론시작 16:38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11일 (금)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0:08

📌 강론시작 10:08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11일 (금)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자신을 버린다는 의미

 

오늘 복음은 자기 목숨을 구하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24절). 

자기를 버린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보다 먼저 왜 자기를 버려야 합니까? 

예전에 나치주의자들은 많은 유다인에게 기차에 타도록 회유하면서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맞은 것은 절망과 지옥의 삶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더 태우려고 기차가 역에 멈출 때마다 진실을 예감한 유다인들은 “열차에서 내려 도망쳐라.” 하고 말하였답니다. 그렇게 내린 몇몇은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인생이라는 기차가 출발하였고, 죽음이라는 종착역으로 가고 있다고 본다면, 이 이야기는 우리가 놓인 상황과 같습니다. 분명 우리의 본성은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자기를 버리라는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이 기차에서 뛰어내려 생명으로 가는 다른 기차로 갈아타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갈아탐’을 실현한 사람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기 생명을 끊어 버리라는 말도 육신의 삶을 내팽개치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는 참된 인생을 살도록 최고의 선택을 하라는 뜻입니다. 모든 이가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자기 이익과 뜻을 좇는 세상에서 지상의 영광과 성공과 영예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살겠다는 마음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오늘 하루 자신을 버린다는 의미에 대하여 묵상합시다. 우리가 버려야 할 ‘자신’은 하느님께서 본디 우리에게 주신 모습, 곧 하느님을 닮은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만들어 낸 ‘자신’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자유 의지로 지금까지 저지른 죄와, 우리를 죄로 이끄는 성향들(이기심, 교만함, 질투, 탐욕, 게으름 등)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러너스 하이

 

날씨만 좋으면, 매일 새벽 일어나 먼저 기도한 뒤에 곧바로 운동하러 나갑니다. 운동하러 나가면서 “아싸~ 운동하러 간다.”라면서 신나게 밖으로 나갈 것 같지만, 새벽 운동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날씨도 별로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이 새벽에 다른 것을 하고 싶기도 하고, ‘낮에 자전거 타면 안 될까?’ 등의 유혹이 계속 몰려옵니다. 하지만 싫은 일을 먼저 해야 다른 일도 할 수 있음을 잘 알기에 억지로라도 자전거를 끌고 밖으로 나갑니다. 
 
처음 30분까지는 힘만 들고 재미없습니다. 그러나 30분 이상을 타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피로감이 사라지고 새로운 힘이 생긴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마 운동하시는 분들은 이 과정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를 ‘러너스 하이’라고 합니다. 보통 심박수가 1분에 120회 이상 되면서 느끼게 되는 쾌감입니다. ‘러너스 하이’라는 쾌감에 도달하면 새로운 힘이 생기면서 더 큰 즐거움과 기쁨을 갖게 됩니다. 이 쾌감을 얻게 되는 이유는 힘들게 달려온 과정 때문입니다. 
 
우리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힘들게 달려온 과정을 통해서 ‘러너스 하이’와 같은 또 다른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든 과정은 경험하기 싫고 대신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새로운 힘만 얻기를 원합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과정 없이 결과를 얻을 수 없듯이 힘든 과정을 거쳐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을 주신 주님을 원망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대신 그 이후에 있을 ‘러너스 하이’를 기대하며,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계속해서 찾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지만, 무엇인가라도 한다면 여기에 맞는 결과를 분명히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십자가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영광의 십자가로 바뀌었지만, 그 영광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수난과 죽음이라는 커다란 고통이 있어야 했습니다. 십자가가 곧바로 영광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은 이에 따른 고통과 시련을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실제로 예수님께서 그 모범을 당신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함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의 크기가 너무 커서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피하고만 싶습니다. 남들도 피하고 싶어 하는 그 길을 내가 특별한 사람도 아닌 데 가야 하냐고 따지고만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이 훨씬 크기에 또 우리의 궁극적인 바람은 하느님 나라에 있기에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을 얻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그토록 많았던 슬픈 저녁은 잊히지만, 어느 행복했던 아침은 잊히지 않는다.

- 장 가뱅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명상과 기도의 차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영성 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지금까지의 나의 주인이었던 자아를 죽여야만 합니다. 

가리옷 유다는 자기를 비우지 못하고 돈을 섬겨서 예수님을 모실 수 없었습니다. 누구든 누구를 받아들이기 위해 상대를 품을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보다 큰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이 세상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영향을 받는 그 대상이 내가 섬기는 우상입니다. 

그런데 내가 세상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아주 커지거나 아주 작아지면 됩니다. 온 우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동시에 어떤 것도 쪼갤 수 없는 수준으로 작아지면 그것도 아무것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영화 중에서 우주에서 괴생명체가 지구에 추락하여 결국 그것들이 지구를 멸망시키게 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지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 우주를 멸망시킬 수는 없습니다. 지구로 보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들이지만, 온 우주로 보면 작디작은 먼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내가 커져서 세상 것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는 노력을 ‘명상’이라고 합니다. 명상은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나보다 더 큰 자아를 만들어서 그것을 제삼자가 보듯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입니다. 명상할 때 호흡이나 감각에 먼저 집중하라고 하는데 이는 나를 제삼자로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나의 감정에 빠지지 말고 나에게서 벗어나 더 큰 나를 나로 의식하며 나를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전직 방송인 김상운 씨의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에는 이러한 사례가 나옵니다. 한 여인이 심한 두통으로 직장까지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의사들의 처방은 진통제와 수면제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복용량은 갈수록 증가했고 그렇게 삶을 더 피폐해져 갔습니다. 그분이 이것을 치유한 것은 약물이 아니었습니다. 친구의 소개로 찾아가 만난 한 의사는 약물 대신 명상을 시켰습니다. 

“눈을 감으시고 머리 안에 곧 터져버릴 것만 같은 고통 덩어리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머리는 그것으로 가득 차서 그것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나의 머리가 1m로 커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다음은 10m, 다음은 이 도시만큼, 우리나라, 더 나아가 지구와 온 우주 크기만큼 커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명상을 매일 조금씩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한 달 뒤 두통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참으로 멋진 아이디어입니다. 결국 불교의 명상도 이와 같습니다. 세상 것에 영향을 받는 나 자신을 아주 작게 만들거나 없게 만들기 위해 진짜 나를 우주의 크기만큼 확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명상에는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눈을 뜨면 다시 자아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 효과는 분명히 있지만, 그리 지속적일 수 없습니다. 다시 나로 살면 욕심이 생겨나고 욕망이 올라옵니다. 이는 ‘나’로부터 나오는데 나를 아무리 의식적으로 온 우주만큼 확장하려 해도 결국 이 세상에서 살려면 나라는 정체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이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기도도 산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는 나 스스로 커지려는 노력이 아니라 오히려 작아지려는 노력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사랑 앞에서 작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대신 부모의 눈으로 나와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에 나에게 닥치는 것들을 제삼자, 곧 부모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기도가 이와 같습니다. 은총과 진리로 작아져 하느님의 눈으로 나와 세상을 바라봅니다. 하느님은 온 우주보다 큰 분이십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16년 전 방송출연하였던 아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란 사연이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 혼자 아들을 키웠는데 그 아들마저도 눈이 잘 보이지 않지만 아버지에게 감사하며 사는 내용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새로운 눈을 주었습니다. 아들은 자신의 처지에 감사해합니다. 이를 위해 아들은 먼저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보아야 하며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 은총과 진리가 아들에게 새로운 눈을 줍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키우며 고생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오래된 동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아버지가 없으면 자신은 아무 존재도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들은 이제 아버지의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인지, 그리고 불우한 환경과 신체를 지니고 태어났지만, 그것 또한 얼마나 감사한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 대건이는 눈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 대신 세상을 아버지 눈으로 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이는 마치 탈출기에서 파라오이 속해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 성막 안에 하느님을 품고 하느님의 눈으로 자신들의 처지와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마치 밀떡으로 부서져서 그 안에 하느님을 담은 성체와 같습니다. 비록 가장 작은 모습이지만, 온 우주보다 큰 분을 담고 계십니다. 그렇게 나는 영향을 받지 않고 내 안의 참 주인이신 분의 감정에만 집중하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고통에서 탈출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만드는 기도의 목적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가난하기에 기쁜 고통스럽기에 행복한

 

올해는 ‘클라라의 기쁨’을 주제로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클라라를 아는 사람은 그가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 가난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알 것이고, 그래서 그의 삶은 거룩하기는 해도 기쁨이 없었을 거라고 많은 분이 알고 계시지 않을까 제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클라라는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프란치스코께서는 우리가 그 어떤 궁핍도, 가난도, 수고도, 시련이나 수치도, 세상의 멸시도 마다하지 않고, 이를 더없는 큰 기쁨으로 여기는 것을 보시고,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유언 27-8)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그의 종 프란치스코를 통해 한번 알게 된 다음부터는, 어떤 고통도 나를 괴롭히지 못했고, 어떠한 고행도 격렬하다 할 것이 못 되었으며, 아무리 병이 들어도 힘들지 않았습니다.”(클라라 전기 41) 

그러니까 거룩하면 기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한 사람이 기쁘고 행복함을 클라라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요즘 계속되는 칼부림과 그것을 보고서 모방 범죄를 하겠다는 것을 보면서 전문가들은 심리적이고 정신병리학적인 차원에서 그 원인과 이유를 말하지만 저의 단순한 생각으로는 불행한 많은 젊은이의 행복한 이에 대한 분노입니다. 

나만 불행하고 다른 이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실은 젊은이들이 거의 불행하거나 행복하지 않은 겁니다. 그러기에 이들을 생각하면 어찌 이리 쉽게 불행할까, 행복하기가 왜 이리 힘들까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 

여러 차례 얘기한 바이지만. 건강에는 육체적인 차원, 심리적인 차원, 정신적인 차원, 영적인 차원, 이 네 가지가 있는데 많은 젊은이가 육체만 빼놓고 다 불 건강하거나 육체도 허우대만 크지, 면역력 면에서 그리 건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거룩한 사람이 제일 건강하고, 영적으로 제일 건강하기에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건강하며, 그렇기에 가난도 고통도 제일 잘 견딜 수 있으며, 견딜 뿐 아니라 그런 가운데서 기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클라라에게 고통은 육체의 고통이지 마음의 고통이나 정신과 영혼의 고통은 아닙니다. 

가난이나 병은 육체를 괴롭힐 뿐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말이고, 이런 것들은 오히려 사랑을 불타게 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가난이나 고통은 두려워하고 피하면 오히려 쫓아오고 달라붙지만껴안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껴안기만 한다면 오히려 그것들을 땔감 삼아 사랑이 불타오르고 기쁨과 행복이 솟아오릅니다. 

가난하기에 오히려 기쁘고, 고통스럽기에 오히려 행복한, 클라라의 그 사랑의 경지를 배우라고 주님으로부터 초대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 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버리고 내려놓아야 소중하게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됩니다. 자신과의 어리석은 줄다리기를 멈추게 하는 소중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현재진행형이듯이 버리고 내려놓는 것도 언제나 현재진행형입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해체하면 목숨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몸과 마음의 나쁜 행위를 멈추는 것이 버리는 것입니다. 말로써 저지르는 온갖 악행을 내려놓는 것이 우리의 십자가를 지는 우리의 참된 실천입니다. 

참된 실천이 참된 순명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목숨입니다. 목숨은 마음을 만나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버리고 마음으로부터 따르는 것이 가장 소중한 목숨의 주님을 믿는 삶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저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서 알게 됩니다. 

함께하고 서로 도와주는 십자가의 여정이 바로 가장 좋은 은총임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가라는 존재가 우리를 단련시키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삶의 전부라 믿었던 어리석은 뜻과 갇혀있는 아집마저 내려놓으니 새로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우리 자신도 우리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임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로 풀어가면서 십자가로 따르면서 알게 되는 새로운 삶입니다. 새로운 삶의 기쁨을 보여주는 새로운 사랑 새로운 행복입니다. 매 순간이 가장 소중한 순간임을 목숨과 십자가로 주님을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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