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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8/18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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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의 계약을 돌아보소서! 가련한 이들의 생명을 저버리지 마소서. 일어나소서, 주님, 당신의 소송을 친히 이끄소서. 당신을 찾는 이들이 외치는 소리를 잊지 마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오니 저희 마음에 자녀다운 효성을 심어 주시어 약속하신 유산을 이어받게 하소서.

 

2023년 8월 18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8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마태오복음 성경 말씀 카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태 19,6)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태 19,6) 마태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여호수아기 24,1-13)
    나는 너희 조상을 강 건너편에서 데려왔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약속된 땅으로 데려갔다.

  • 오늘 복음
    (마태오 19,3-12)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8월 18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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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하느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말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라.

 

 

마태오복음
19장 3-12절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8월 18일 (금)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진슬기 토마스데아퀴노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9:19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8월 18일 (금)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 미사시작 06:45

📌 강론시작 16:17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18일 (금)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55

📌 강론시작 10:13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18일 (금)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3:36

📌 미사시작 1:03:44

📌 강론시작 1:13:39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낙원’이란 말은 ‘파라디시’, 곧 페르시아 왕궁의 정원을 일컫는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모든 식물이 풍요롭고 조화롭게 잘 자라던 그곳을 보고 에덴 동산 이야기의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에덴’이라는 말은 남녀가 누리는 친밀한 기쁨을 일컫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땅에 당신 자녀들을 자리 잡게 하실 때 그들에게 낙원을 주고자 하셨을까요, 눈물과 통곡의 땅을 주고자 하셨을까요? 그 답은 ‘낙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낙원을 주시고 당신 계획을 알려 주실 때 사람이 어떤 길을 가기를 바라셨을까요? 남녀가 하나가 되어 사랑을 이루는 혼인의 길, 협력의 길, 완성의 길이 아니었을까요? 혼인 생활이 늘 행복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혼인한 뒤 어느 순간 함께하지 못할 위기가 찾아오기도 할 것입니다. 

함께함이 무의미한 상황에서, 어떤 이들은 견딜 수 없는 고통뿐인 혼인 생활을 과연 하느님께서 계속 요구하시는지 묻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인간적 대답은 망설임 없이 이혼일 것 같습니다. 혼인 생활이 계명이나 법적인 문제로 귀결되면 바리사이들의 주장처럼 이혼할 수 있는 조건을 따지게 됩니다(3절 참조).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모세의 법보다 더 엄중하고 새로운 법을 만들어 그것을 우리에게 지키도록 명령하셨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혼인에 대한 하느님의 본뜻을 그들에게 상기시키셨다고 합니다. 곧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6절; 참조: 창세 2,24)라는 말씀입니다. 

혼인은 우리를 사랑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가정이 혼인 성소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진심으로 서로 아끼고 섬기며, 쾌락주의와 상대주의와 소비주의 같은 세상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 사랑의 생생한 표징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하기 위해서는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이 사람은 우울증으로 평생 죽음에 대한 공포와 자살 충동에 시달렸습니다. 이는 형제 모두에게 있는 증상으로, 실제로 8남매 중에서 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이 있었지만 모두 포기하고 조용한 산골에 들어가 홀로 은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 갔다가 암을 판정받게 되지요. 그리고 이 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이 세상을 마치게 됩니다. 과연 이 사람의 삶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불행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정도만 들으면 아마 불행한 삶이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평생 죽음을 떠올렸다고 하니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싶지요. 하지만 암으로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내 삶이 참 멋있었다고 전해주시오.” 
 
20세기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철학가 비트겐슈타인입니다. 이 마지막 말을 통해 사람들은 그가 ‘행복했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멋진 삶을 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한 것이지요. 
 
행복하기 위해서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무엇을 후회하는지 물으면, 좀 더 즐기지 못했다는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못한 후회만 남아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평생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았고, 그 결과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멋지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단순히 자기만족을 위한 즐거움만을 찾으면 마지막 순간에 후회할 일만 만드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만족이 아닌, 주님께서 만족하실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는 혼인의 원칙을 이야기하십니다. ‘혼인의 불가해소성’입니다. 혼인은 남녀의 인격적인 결합일 뿐 아니라 혼인을 통해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을 이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혼인의 의미를 담고 사는 사람이 점차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의미를 갖고 살아야 하는데, 그 반대인 미움의 의미만을 찾습니다.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서로에게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몸 안에서 함께하시는 주님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의미 있는 삶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기다림을 기꺼이 감당하려는 마음이야말로 진짜 사랑이다.

- 김경민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목적지가 명확하지 않은 이에겐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이혼에 관해 묻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둘을 한 몸으로 만들어주신 성경 말씀을 들어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역시 그들도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라며 따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성경 말씀이라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법은 처음부터 변함이 없지만,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어린아이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이혼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는 새롭고 완전한 법이 와 계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알았던 말씀이 완전하다고 하며 새로운 법을 적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말씀을 도외시하고 성경도 읽고 묵상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치 도로의 표지판과 같습니다. 지금의 나의 처지에 해당하는 말씀으로 나 자신을 인도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을 멈춥니다. 두 살 이후로 자녀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부모에게서 자라면 몸은 자랄 뿐 영혼은 두 살에 머뭅니다. 우리는 매일 말씀의 힘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완고해져서는 안 됩니다. 

오노다 히로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군 정보장교였습니다. 그는 태평양 전쟁(필리핀 전역) 막바지인 1944년 겨울, 필리핀 마닐라 근처의 작은 루방섬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250명의 훈련되지 않은 병사를 이끄는 지휘관이었습니다. 오노나 소위는 미군의 루손섬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하여 비행장 활주로를 파괴한 후, 유격전을 벌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당시 8사단장 요코야마 시즈오는 필리핀으로 떠나는 오노다 일행에게 “항복은 물론 옥쇄도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버텨야 한다. 반드시 데리러 오마. 병사가 한 명이 남더라도 야자수 열매라도 따 먹으며 끝까지 버텨라. 다시 말하지만, 항복은 물론 옥쇄도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듬해 봄 미군이 상륙하면서, 화력에서 밀린 일본 주력군은 패퇴하였습니다. 오노다의 고집으로 부대는 불리한 상황에도 전투에 나서야 했고 첫 전투에서 207명이 전사했고, 나머지 43명은 산속으로 흩어졌습니다. 미군이 살포한 삐라 전단을 읽고 일본이 항복한 사실을 알게 된 나머지 20명은 투항하여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오노다는 미군의 전단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그의 곁에 남아있던 시마다 오장과 고즈카 상등병을 데리고 유격전을 계속했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종전 다음 해인 1946년 봄, 오노다 일행을 구하기 위해 일찍이 투항했던 오노다의 옛 부하들이 필리핀으로 가서 섬 전체를 돌아다니며 외쳤습니다. 

“오노다, 오노다! 전쟁은 끝났으니 숲에서 나오거라. 어서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자.” 

오노다는 그들의 외침을 분명하게 거듭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간사한 미국군이 자신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계략이라고 여겼습니다. 그의 아버지까지 와서 전쟁이 끝났다고 외쳤으나 가족까지 미군에게 속은 것이라 여겼습니다. 

얼마 후 오노다 일행은 원주민 마을을 습격하여 불태웠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유격전을 전개한 것이었지만, 실상은 먹을 것을 해결하기 위한 공격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필리핀 사람 30명을 죽이고 100여 명에게 다치게 했습니다. 

그는 전쟁 중이라 괜찮다고 여기며 약탈과 살인, 방화를 일삼았습니다. 이 때문에 필리핀 정부는 토벌대를 섬으로 보냈고 1954년에 시마다 오장이 토벌대에게 사살되고 1972년에는 고즈카 상등병이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오노다는 개의치 않고 단신으로 유격전을 수행하였습니다.

스즈키 노리오 교수는 필리핀의 정글에서 행방불명된 오노다 소위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느끼고 그를 직접 찾겠다고 결심했습니다. 1974년 루방섬을 방문한 스즈키는 결국 오노다를 찾는 데 성공했습니다. 스즈키는 일본이 패망하면서 2차대전이 끝났으니 항복하라고 오노다를 설득했으나, 오노다는 직속상관의 명령이 없으면 투항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일본에 돌아온 스즈키 노리오 교수는 일본 언론에 오노다 소위의 아지트를 공개했고 일본 열도는 흥분에 휩싸였습니다. 일본 정부 차원에서 오노다 소위의 귀환을 위한 작전이 펼쳐졌으며 제대 후 도서 판매상이 된 직속상관 타니구치 소령을 겨우 찾아내어 타니구치가 항복 명령서를 가지고 필리핀 루방섬에 있는 오노다를 만나 투항을 명령했습니다. 

투항 당시 오노다는 일본군 복장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으며, 사격이 가능한 상태로 99식 소총을 정비해 놓고 500여 발의 탄환과 대여섯 개의 수류탄도 가지고 있었으며 칼은 여전히 날이 서 있는 등 장비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22세에 조국을 떠났던 청년은 52세가 되어서 일본에 돌아왔고, 일본 국민에게 영웅으로 대접받았습니다. 패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일본 국민은 오노다에서 ‘살아있는 일본 정신을 보았다’라며 열광했고 극우파들은 오노다야말로 옛 일본의 가치를 그대로 간직한 진정한 사무라이라고 칭찬했습니다. 

필리핀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빌려 쓰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노다의 모든 범죄를 사면해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노다는 현대화된 일본이 미국의 속국처럼 보여 일본에 적응하지 못하고 1975년 브라질로 떠나서 목장을 경영했으며, 이듬해에 결혼하였습니다. 

1984년 일본으로 다시 돌아와 오노다 자연학교를 설립하여 아이들을 자연 속에서 살 수 있도록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1996년 루방섬을 다시 찾아가 현지 학교에 1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하였습니다. 2014년 1월 16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91세의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참조: ‘오노다 히로’, 위키 백과]

오노다가 종전되었다는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증거가 불충분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 자신이 범죄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이 전쟁이 종식되면 들통나고 벌을 받을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 일탈을 즐기기 위해 고집을 부린 것입니다. 성경을 매일 읽고 묵상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도 이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말씀으로 매일의 등불을 삼지 않을까요? 목적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거룩함입니다. 성인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완전한 사랑이 되는 것이 목적지입니다. 그 목적이 명확하지 않으니 표지판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나와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고 심판도 기다림을 알 때 우리는 방향을 명확히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표지판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 표지판은 말씀입니다. 

매일 하루 하나의 말씀을 찾아 나의 새로운 발걸음을 인도하게 합시다. 저는 본당이나 지인들 사이에서 성경이나 하.사.시, 혹은 다른 좋은 영성 서적이라도 하루에 한 문장씩 예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말씀을 찾아 카톡으로 공유하도록 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저의 작은 경험으로 큰 효과를 보았기 때문에 추천하는 방법입니다. 매일 말씀을 찾아 오늘의 나에게 적용하는 삶이 내가 목적 있게 사는 사람임을 증명해 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의 섭리.

 

“하느님이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제가 요즘 감사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올해 들어 젊은 형제들이 저희 공동체에 와 같이 살아주는 것에 대해서. 저하고만 사는 것은 아니지만 저와 살아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며칠 전에 이주민 어머니와 아이들의 합동 연수회가 있었는데 그 피정 집의 고양이를 보자마자 아이들이 일제히 고양이한테 달려드는 모습이 제가 보기에 단순한 애정이 아닌 빠져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이 애정이 사람이 아니라 개에게 더 향하고, 혼족, 혼밥, 혼술이 대세이기에 결혼조차 하지 않으려는 요즘 수도원에 형제들이 들어온 것만도 고마운데 저와 같이 살아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더욱이 저는 저의 수도원에서 어느 시어머니보다 어렵고 살기 부담스러운 존재로 소문이 나 있는데 그런데도 저와 같은 사람과 살아주니 고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고마움이고 인간에 대한 고마움이라면 신앙적인 고마움과 하느님께 대한 고마움도 제게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들을 저희에게 보내주셨다고 믿는 프란치스칸이기 때문이지요.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유언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 형제들을 내게 보내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영적인 매력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얘기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형제들을 보내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의 유언은 이런 식입니다. 

주님께서 다 해주셨다는 식입니다. 

주님께서 회개 생활을 시작하게 해주셨다. 

주님께서 교회에 대한 신앙심을 주셨다. 

주님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셨다. 

신앙의 눈으로, 성사적인 눈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독서 여호수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다 선조들을 통한 주님의 섭리입니다. 조상들이 그러니까 인간들이 이룬 역사가 아니라 섭리의 역사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란 우선 무엇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계획과 그 성취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취도 아니고 자연의 섭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도 자연도 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섭리에 맡길 때 계획은 인간이 세우고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섭리의 훌륭한 도구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몸의 방향이 곧 마음의 방향입니다. 결혼과 독신 사이의 선택은 온전히 자유의지의 몫이며 독신은 허락된 이들의 삶의 방식이며 하늘 나라를 위한 다양한 삶의 존재방식입니다. 삶은 수 많은 길들을 내며 하느님을 향합니다. 

모두가 살아내느라 바쁘고 힘겨운 시간입니다. 신앙은 내 멋대로 살아온 길에서 벗어나 삶의 질서를 만나게 합니다. 수 많은 변명과 수식어를 내려놓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다시 성찰합니다. 참된 관계는 이기적인 거래를 멈추는 데 있습니다. 

참된 사랑을 잊고 살았습니다. 참된 사랑은 영혼의 날개를 달아주는 것입니다. 결혼도 독신도 모두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우리모두는 삶의 구경꾼들이 아니라 삶을 살아내는 단 하나뿐인 사랑의 자녀들입니다. 

사랑이 쓰는 사랑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람을 만들고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몸이 영혼이고 영혼이 몸이 되어 하느님을 향합니다. 독신도 결혼도 하느님을 체험하는 다양한 삶의 길임을 압니다. 행복의 길을 사랑의 길을 걸어가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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