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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8/06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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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구름 속에서 성령이 나타나시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 외아드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때에 율법과 예언서의 증언으로 신앙의 신비를 밝혀 주시고 저희를 자녀로 삼으실 것을 미리 알려 주셨으니 하느님의 종인 저희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소서.

 

2023년 8월 6일 (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8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마태오복음 성경 말씀 카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태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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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다니엘서 7,9-10.13-14)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었다.

  • 제2독서
    (베드로2서 1,16-19)
    우리는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17,1-9)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8월 6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태오 복음
17장 1-9절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8월 6일 (일)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박상운 토마스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4:35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8월 6일 (일)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 미사시작 08:05

📌 강론시작 19:08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6일 (일)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3:51

📌 강론시작 14:1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

 

오늘 복음의 배경은 산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산에 오르시는 예수님을 되풀이하여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유혹의 마지막 장소는 산이었습니다(4,8 참조). 예수님께서 참행복의 말씀을 들려주신 곳도 산이었고(5,1 참조), 굶주린 백성을 위하여 빵을 많게 하신 곳도 산이었습니다(15,29 참조). 복음서 끝에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산에서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28,16 참조).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구약의 두 인물도 산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그분의 계시를 받고 산에서 내려와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합니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그 산을 내려와 예언자의 길을 당당히 걸어갑니다.

이렇게 산은 인간이 하느님을 내면 깊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여 생각하고 그분의 뜻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축일을 지내며 우리도 우리 자신의 ‘변모’를 희망하며 산에 올라야 하는 이유입니다. 

산에 올라간다는 것은 세상의 방식으로 살기를 단념하고 하느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결심을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결심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세상에서 주님의 복을 받아 세속적 의미에서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데에만 매여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려고, 주님과 함께 머무르려고 이 ‘산’에 오르지 않으면 참된 주님의 모습과 그 영광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산에서 그분을 뵈었으니 이제 다시 산을 내려와야 합니다. 베드로는 초막을 지어 산에 머물고 싶어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산을 내려오시어 하느님 아버지께 받은 사명을 수행하러 길을 떠나십니다. 성당에서 또 고요한 기도 속에서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생각하는 산을 경험합니다. 

지금 우리도 이 산을 다시 내려가야 합니다. 주님이신 스승께서 당신의 생명을 쏟으시고자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셨듯이, 우리도 그분을 따라 산에서 들은 말씀과 산에서 본 그분의 참모습을 마음에 품고 형제들을 섬기고자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회사가 나의 재능을 잘 알아준다고 생각하는가?

 

한 설문조사 기관에서 575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회사가 나의 재능을 잘 알아준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재능을 알아준다고 대답한 응답자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그렇게 높지 않았습니다. 겨우 25%였지요. 회사가 나의 능력을 충분히 알아주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75%나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사는 직원의 재능을 알아주어야 할까요? 재능을 알고 여기에 맞춰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업무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직원의 재능을 알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회사를 위해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만을 바라봅니다. 
 
예전에 직원 채용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성당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주말에도 출근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면접 중에 이를 이야기하니, 한 사람은 “주일에 일하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주일에는 쉬고 대신 평일에 정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은 “당연히 제가 맞춰야죠. 뽑아만 주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누가 채용되었을까요? 회사가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회사에 맞춰야 채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주님이 내게 맞춰야 할까요? 아니면 내가 주님께 맞춰야 할까요? 주님께서 내 재능을 몰라준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 뜻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 자리가 너무나 영광스럽고 행복하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나서서 여기에 지내면 좋겠다고 말하지요.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거룩한 변모가 이루어지는 그 장소에 계속 머물러 지내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저 제자들이 원할 뿐이었습니다. 해처럼 빛나고 옷이 빛처럼 하얘진 주님 모습에 하느님 나라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힘든 전교 활동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 아니지요. 
 
주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났던 것입니다. 
 
주님을 나에게 맞추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께 맞춰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는 서로 끊임없이 이해하면서 오해하고, 오해하면서 이해합니다.

- 정유민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기도의 목적

 

오늘은 주님 변모 축일입니다. 주님 변모 축일은 기도에 대한 예시입니다. 기도의 장소는 이스라엘 전통상 ‘높은 산’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모세와 엘리야를 만납니다. 모세는 진리이고 엘리야는 은총입니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십계명, 곧 하느님 뜻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주었고, 엘리야는 카르멜산에서 제물 위에 성령의 불이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미사 때의 말씀의 전례, 성찬의 전례라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미사나 기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바로 변모하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변모하기 위함일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다음에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악령 들린 아이를 고쳐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은 그를 치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마태 17,17)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기도로 이 세상을 참아내고 치유하기 위한 힘을 얻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머물기 위해서는 그 상대를 끊임없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나의 죽음입니다. 미워하는 내가 죽지 않으면 용서가 안 됩니다. 내 안에 그 미움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결국 나를 죽음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내려오시며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오늘 복음이 이 기도의 올바른 목적을 말하는데, 어쩌면 우리는 기도의 목적을 잘못 알고 헛된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한 인도 수도사가 18년이 걸려서 갠지스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자랑처럼 떠드는 제자에게 스승은 묻습니다. 

“자네는 18년 동안 18루피(갠지스강 건너는 뱃삯)를 벌었네.”

기도를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이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해 얼마나 남을 용서하지 못하게 만드는 나 자신이 죽었는지, 얼마나 더 그리스도로 변모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워룸(2015)은 기도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알려주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남편은 직장에서도 돈을 횡령하고 외도하려고 하며 가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이 미워 옆집 할머니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남편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자 옆집 할머니는 왜 교회에 다니면서도 기도는 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기도는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잘못된 기도를 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싸움의 대상을 잘못 잡았다는 것입니다. 워룸은 전쟁에서 지휘관들이 하는 회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할머니는 집에 작은 공간을 만들고 남편과 싸우지 말고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과 싸워 하느님께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청하라고 합니다. 

남편이 어느 날 옷장에서 자신을 위한 기도가 적힌 것을 보고 아내가 이미 자신의 외도사실까지 알면서도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깊이 회개하고 아내와 딸에게 사과합니다. 

기도로 싸워야 할 대상은 은총의 가치를 모르는 나 자신입니다. 제가 부모님의 굳은살을 보았을 때 라면 하나도 부모님이 거저 주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먹는 것은 부모님의 살과 피였습니다. 그것을 알게 되자 불만 가득했던 내가 죽고 부모님의 뜻을 따라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순종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리고 계신다면 나도 기도할 때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래야 은총의 가치를 알고 순종으로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삼손은 은총을 많이 받았지만, 그 은총의 값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하느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지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자에 빠진 삼손의 머리카락이 잘리게 만듭니다. 성령의 불이 꺼진 것입니다. 눈도 뽑힙니다. 그제야 삼손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총이 당신 눈을 빼서 주시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게 되자 이제 그분의 뜻을 위해 목숨을 바칠 용기가 생깁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과 미움을 함께 묻어 버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기도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내가 죽어야 미움도 죽습니다. 그리스도가 사셔야 용서와 사랑이 성취됩니다. 우리는 기도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 완전히 그리스도로 변모하여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희망의 증인

 

주님의 변모 축일에 저는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다락방에 숨어있는 제자 공동체를 생각합니다. 이들은 왜 다른 제자들처럼 예루살렘을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고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어서 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좌절하고 절망한 사람의 목적 없이 떠난 것입니다. 

토마 사도 축일 때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토마 사도도 어쩌면 절망하고 제자단을 떠난 것이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열 사도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고, 그럴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세 사도 곧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도가 다른 제자들을 떠나지 말라고 붙잡고 설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세 사도가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봤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감사송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뽑힌 증인들 앞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어 제자들 마음속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을 없애 주셨으며, 머리이신 당신에게서 신비롭게 빛난 그 영광이, 당신 몸인 교회 안에도 가득 차리라는 것을 보여주셨나이다.” 

그리고 두 번째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로써 우리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기와 두 제자가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고, 그래서 증인들로서 다른 제자들의 마음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을 제거했다고 감사송은 노래합니다. 

십자가는 걸림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걸림돌이라면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고, 주님을 따라 하느님께 가는 것을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겠지요. 

십자가에 걸려 넘어진 다음 다시 일어서지 않는다면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넘어진 다음 마음을 접지 않고 다시 일어서기만 한다면 그리고 걸림돌이었던 십자가를 오히려 디딤돌 삼기로 마음먹는다면 십자가는 우리를 부활에로 인도하는 다리가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졌을 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과 희망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 영광의 시작이라는 믿음과 희망, 그것을 우리가 지녀야 하는데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이 이 믿음과 희망의 근거라고 감사송은 노래하고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어둠 속에서 비치는 빛이라고 합니다.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제는 젊은 형제들과 우리 안에 희망이 있겠냐는 대화를 나눴습니다. 

어둠을 보면 희망이 없습니다. 사람을 보면 희망이 없습니다. 어둠만 보면 희망이 없지만 어둠 속에 있는 희망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며, 사람만 보면 희망이 없지만 인간의 어둠 속에서 오히려 하느님의 희망을 보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가 희망의 증인이 되어 전체가 희망을 보게 됩니다. 

우리 모두 그 한 사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되라고 타볼산으로 초대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나에게서 거룩한 변모는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 지를 진지하게 묻는 주일 아침입니다. 가장 단순한 것에서 만나는 거룩한 변모입니다. 참된 사랑이 거룩한 변모입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참으로 보편적인 사랑을 발견합니다. 거룩한 변모를 우리의 한정된 문자나 언어로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거룩한 변모 부활은 토의될 성질의 것이 아닌 실현되어야 할 사랑의 참된 가치입니다. 부활의 삶을 살기위한 다짐의 시간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우선 선행되어야 합니다. 십자가 뒤에는 부활의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우리가 주님을 통하여 부활을 얻는다는 확고한 믿음입니다. 거룩한 변모로 서로가 서로를 힘껏 북돋아 주고 서로가 서로를 살려내는 이 빛나는 기쁨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의 삶은 선과 악 더러움과 깨끗함 슬픔과 기쁨이 뒤썪여 있습니다. 뒤썪여 있는 이 삶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부활의 진정한 변모입니다. 변모 앞에서 우리의 무지와 오만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매일매일의 새로운 삶이 사랑의 힘으로 변화됩니다. 사랑의 힘으로 사랑의 실천으로 보이지 않던 것들이 환하게 보입니다. 낡은 인식에 머물지 않고 새로워지는 사랑의 주일 변모의 주일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앞에서 우리의 변모는 어떠한지를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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