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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8/03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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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거룩한 거처에 계시네. 하느님은 한마음으로 모인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백성에게 권능과 힘을 주시네.

저희의 희망이신 하느님, 하느님이 아니시면 굳셈도 거룩함도 있을 수 없고 하느님만이 저희를 지켜 주시니 풍성한 자비로 저희를 보살피시고 이끄시어 저희가 지금 현세의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며 영원한 세상을 그리워하게 하소서.

 

2023년 8월 3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8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마태오복음 성경 말씀 카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마태 13,48)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마태 13,48) 마태오복음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8월 3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마태오 복음
13장 47-53절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7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48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49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51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53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8월 3일 (목)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창현 비오 신부

 

📌 교황님 8월 기도지향 00:22

📌 미사시작 00:37

📌 강론시작 07:49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8월 3일 (목)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 미사시작 08:41

📌 강론시작 16:43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3일 (목)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09

📌 강론시작 07:58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3일 (목)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0:00

📌 미사시작 1:00:55

📌 강론시작 1:08:5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우리는 누구입니까?

 

성경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낚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만나실 때도 세리였던 자캐오와 식사하실 때도 니코데모와 대화하실 때도 수많은 이들을 가르치실 때도 그분께서는 그물을 던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4,19 참조). 
고기 잡는 방법 가운데 그물을 던지는 것은 가장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어부는 자기가 잡고 싶은 물고기만 잡을 수도, 잡고 싶지 않는 물고기를 그물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을 수도 없습니다. 그저 그물에 걸리는 대로 물고기를 잡아야 합니다.

교회는 어부이신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아 그물을 던지고 복음을 선포할 뿐입니다. 최종적으로 물고기를 가리는 일은 하느님과 그분의 천사들의 몫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분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같은 그물 안에 있는 다른 이들을 가리고 판단하고 외면하고 손가락질한다는 것이 정녕 어리석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불완전합니다. 교회에는 성인도 있고 죄인도 있습니다. 성인도 죄지을 수 있고 죄인도 회개할 수 있습니다. 죄는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어떤 이들인지를 놓고 낙담하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 안에 있고 그분의 나라는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오늘도 자기 문제에 빠져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좋은 기회입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드러낼 은총의 시간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듯 그분의 제자인 우리도 사람 낚는 그물을 세상에 던져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디로 가야 할까요?

 

아시아 최고의 갑부이자 홍콩 재벌인 이가성 회장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회장은 30년 동안 자기 차를 운전해 준 운전사를 치하하고자 퇴직할 때 200만 위안, 우리나라 돈으로 약 3억 6천만 원의 수표를 건넸습니다. 그러자 운전사는 “필요 없습니다.”라며 그 큰돈을 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회장님 덕에 이천만 위안(약 36억) 정도는 모아놓았습니다.” 
 
회장은 깜짝 놀라면서 “자네 월급이 그리 많지 않을 텐데 어떻게 그런 거액을 모을 수가 있었지?”라고 물었고, 운전사는 대답했습니다. 
 
“회장님께서 제 뒷자리에서 전화하시는 걸 듣고, 회장님이 땅 사실 때 저도 조금씩 사고, 주식 살 때 저도 조금씩 샀더니 어느새 그렇게 되었습니다.” 
 
누구를 만나고 또 누구를 따르느냐의 중요함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이가성 회장보다 더 훌륭하고 더 힘센 주님을 만나고 또 따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실천하고 있었을까요? 앞선 이야기의 운전사는 회장의 말을 듣고 따랐기에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만 하느님 나라 안에서 진짜 부유하게 살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나에게 특별한 이익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익보다, 또 순간의 만족보다 더 중요한 것을 쫓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 직접 이 세상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쫓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이가성 회장의 운전사는 지금의 만족이 아닌, 은퇴 후의 만족을 쫓았습니다. 그 지혜로움을 우리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군중에게,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부터 좋은 고기, 나쁜 고기를 고르지 않지요.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밖으로 던져 버린다고 하십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세상 종말에 이루어진다고 하십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떤 고기로 평가될까요? 그릇에 담길 좋은 고기일까요? 밖으로 던져 버릴 나쁜 고기일까요? 좋은 고기로 평가받는 모습은 주님의 뜻을 듣고,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것을 쫓는 사람이 더 많은 이익을 얻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마지막 최후 심판 때에 우리 자리가 결정됩니다. 과연 어디로 가야 할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의 상을 찾는다. 처음에는 부모, 그다음엔 친구들의 시선에서, 그러다가 자신의 참모습을 비춰줄 하나뿐인 거물을 찾아 나선다. 사랑을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탄이 비유에 약한 이유

 

오늘 복음으로 하늘 나라의 길고 긴 비유 말씀이 끝을 맺습니다. 결국 하늘 나라를 받아들인 이들만 그물에 걸려 어부의 집으로 가는 물고기처럼 구원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늘 비유의 특징입니다. 하늘 나라 비유의 목적은 하늘 나라이기에 마지막에 천국과 지옥의 명확한 심판이 드러납니다. 또한 이것으로 사탄의 유혹을 구분해낼 수 있습니다. 사탄은 지금의 행복만을 말하지 끝은 흐립니다. 사탄이 제일 두려워하는 질문은 “그래서 끝은 어떻게 되는데?”입니다. 사탄은 구체적인 질문을 제일 싫어합니다. 

글로리아 폴로 오르티츠(Gloria Polo Ortiz)는 콜롬비아의 치과의사이자 저서 『벼락을 맞았습니다』를 썼습니다. 그녀는 성당에 다니기는 하였지만, 미사 시간에도 껌을 씹고 가정에서는 사제를 비판하며 자신의 다리와 가슴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속세의 사람이었습니다. 

글로리아는 박사논문을 위해 남편과 같은 의사인 조카와 함께 의대쪽으로 책을 가지러 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벼락이 쳐서 사촌은 즉사하고 자신도 겉과 속이 완전히 타버렸습니다. 몇 시간의 심정지가 있고 난 뒤 간신히 심장이 뛰기는 하였지만, 간과 폐와 신장, 그리고 내장기관이 완전히 타버려서 회생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반면 즉사한 사촌 동생은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고 특별히 아기 예수님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글로리아의 모든 장기가 정상으로 돌아왔고 몇 시간 동안 심정지로 있었지만, 뇌 손상도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녀가 회복될 때 다리는 신경이 돌아오지 않아 절단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수술이 다가오자 자신이 얼마나 외모에만 치중하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가슴은 젖꼭지가 사라지거나 움푹 들어가 버렸고 아름다운 다리를 가지기 위해 굶기를 밥 먹듯이 했던 그 다리에는 감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그동안 두 다리로 걷게 해주신 것에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리까지 치유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랬더니 신경이 돌아왔고 의사들은 두 발로 서 있는 그녀를 보고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체험을 간증합니다. 

하늘 나라의 비유는 다 이런 식입니다. 밭에 씨가 뿌려지고, 그 진주의 가치를 알게 된 이는 이전의 자신을 죽이게 만들며, 다른 이들이 쉴 수 있는 겨자나무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마치 좋은 물고기나 밀처럼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가 담긴 비유를 할 수 있다면 이제 하늘 나라 신비를 깨달은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면 그도 비유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누구나 하늘 나라를 체험한 사람은 예수님의 비유를 또 다른 비유로 설명할 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사탄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탄은 지금 당장의 쾌락을 보게 만들지만, 하느님은 장시간, 그리고 마지막을 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느님 비유에 반드시 부활의 결말이 있는 이유입니다. 사탄에겐 그런 것이 없습니다. 

무당을 하기 위해 신내림을 받으면 당장은 돈도 들어오고 신병도 낫지만, 결국엔 이용당하고 버려집니다. 이것이 사탄이 속이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비유도 잘 쓰지 않지만, 굳이 행복의 사례를 댈 때 전 생애나 내세에 어떻게 되는지는 절대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비유는 다릅니다. 항상 끝은 심판이 있습니다. 

사탄의 옷 벗기는 법은 단순합니다. 사탄이 원하는 대로 해서 잘 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라”라고 하면 됩니다. 그놈은 직설법밖에 쓰지 못합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면 행복할 것이라느니, 자신에게 절하면 많은 돈을 벌 것이라느니, 뛰어내리면 주님께서 바쳐주셔서 사람들이 믿게 될 것이라는 유혹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으로 그의 유혹을 받아치지만, 사실 사탄도 성경 말씀으로 유혹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성경 말씀으로 싸워봐야 우리는 승산이 없습니다. 서로 자기주장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례를 댈 수도 없겠지만, 만약 비유를 든다면 그 끝을 물어보십시오. “그래서 어떻게 끝나는데?” 제가 군대에 갔더니 거기서는 여자와 잠을 자본 것이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래서 다들 휴가를 다녀오면 그런 것들을 자랑하고 여자친구가 면회하러 와서 외박을 다녀오면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인 예가 될 수 없습니다. 인생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가 필요합니다. 누가 성적으로 치우쳐서 행복한 사람이 있었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아무도 대지 못할 것입니다. 대부분 그런 삶을 산 사람들의 운명은 좋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주장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이러저러하면 행복할 것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행복을 말하되 여러 비유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끝이 다 좋으면 그대로 하면 됩니다. 저는 이것 때문에 강론도 비유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유에는 항상 끝이 있어야 합니다. 부활로 끝나지 않는 비유는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비유도 싫어하고 그 끝까지 좋은 비유는 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끝을 감추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흡족할 때 부족하다.

 

“모세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 마침내 둘째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성막이 세워졌다.” 

전에 저의 형제들이 무전 순례라고 해야 할 것을 무전여행이라고 말하곤 해서 제가 듣기에 불편했고 경우에 따라 제가 바꿔 써야 한다고 잔소리하곤 했지요. 

그렇다면 여행과 순례의 차이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쉽게 구분하면 여행이 자기가 가고 싶은 곳에 놀러 가는 것이라면, 순례는 거룩한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는 곳, 곧 목적지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냐, 아니면 하느님이 계신 곳이냐, 그것이 여행과 순례를 가르는 기준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아니 계신 곳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아니 계신다고 생각하는 곳에도 실은 하느님이 계시지요. 그러므로 여기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믿고 거기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성당을 순례하고 성지를 순례해도 하느님 현존의식이 없다면 말짱 꽝이지요. 

왜 이런 얘기를 길게 했느냐 하면 저의 이번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오늘 탈출기에 비추어 반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의 형식은 다 잘 갖췄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발자취와 우리 신앙 선조들의 교우촌을 방문했습니다. 매일 출발하면서 그날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며 걸었습니다. 걷는 동안 제가 맨 뒤에 가며 고백성사나 영적 대화를 나눴습니다. 

문제는 의식의 문제입니다. 오늘 탈출기를 보면 구름 기둥과 성막이 나오는데 저희는 구름 기둥을 따르고 성막을 정성껏 세우려는 의식이 부족했습니다. 

구름 기둥을 따르려고 하기보다 스마트폰의 길 안내에 더 의존했습니다. 그러다가 잘 알려지지 않은 ‘한실 성지’라는 곳을 스마트폰의 길 안내를 받아 가다가 아주 혼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 혼자 속으로 이 점을 반성하였지요.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지 않았던 점 말입니다. 

다음으로 저희는 내 천막만 신경 썼지, 성막을 치는 것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먹고 마시고 내 육신 편히 쉴 공간이 마련된 것에 흡족하여 하느님 계실 곳을 우리 가운데 마련하려는 의식이 부족했습니다. 

여기서 반성이 되는 것이, 흡족할 때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세상 것에 흡족할 때 우리는 천상 것에 부족하게 됩니다. 이것을 어제 마지막 나눔 때 반성하였지만 오늘 또 반성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물고기가 있기에 그물이 있습니다. 모아들이는 그물의 마음이 하늘 나라의 본마음입니다. 그물을 던져야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일 수 있고 온갖 종류의 고기를 건져올릴 수 있습니다. 건져올려 우리를 구원하는 그물입니다. 건져올려 전혀 다른 삶을 살게하는 그물입니다. 정녕 우리를 살리는 그물입니다. 

새로운 물결과 새로운 파도를 만납니다. 모든 것은 잠시 잠깐입니다. 던져지는 것도 건져 올려지는 것도 잠시 잠깐입니다. 모든 생명에는 사랑과 구원이 있습니다. 그물과 물고기 하늘 나라와 사람은 이와 같이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 같이 하늘 나라에서 기뻐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멈추게 할 수 없는 구원의 그물입니다. 잡히는 것이 아니라 건져 올려지는 것이며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물고기의 길을 바꾸어 놓는 하늘 나라의 그물입니다. 생활을 건져 올리면 삶은 감사와 기쁨의 변화가 됩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하늘 나라의 사랑입니다. 구원은 식별과 분별, 구별까지 아우르는 모든 것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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