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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8/01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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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내 양 떼를 찾아서, 그들을 먹일 목자를 세우리라. 나 주님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하느님, 하느님의 교회에 언제나 새로운 덕행의 모범을 보여 주시니 영혼들을 사랑하는 복된 알폰소 주교의 열정을 본받아 저희도 마침내 하늘 나라에서 그가 받은 상급을 받게 하소서.

 

2023년 8월 1일 (화)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8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시편 성경 말씀 카드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시편 103,12)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시편 103,12) 시편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탈출기 33,7-11; 34,5ㄴ-9.28)
    주님께서는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

  • 오늘 복음
    (마태오 13,36-43)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8월 1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살리라.

 

 

마태오 복음
13장 36-43절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때에 

36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8월 1일 (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박상호 요한마리아비안네 신부

 

📌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소개 00:05

📌 교황님 8월 기도지향 01:20

📌 미사시작 01:34

📌 강론시작 09:23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8월 1일 (화)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 미사시작 07:56

📌 강론시작 17:20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1일 (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19

📌 강론시작 09:12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1일 (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5:16

📌 미사시작 1:04:17

📌 강론시작 1:12:5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끊임없이 해야할 일

 

복음서에는 배가 자주 등장합니다. 때때로 이 배는 구원의 배, 곧 교회를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은 배 위에 계신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일곱 가지 비유 가운데 하나입니다(13,3 이하 참조). 

마태오 복음사가는 배가 떠 있는 갈릴래아 호수를 “바다”(13,1 원문 직역)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마태오 복음사가가 구상하고 의도한 설정입니다. 

복음사가는 먼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홍해를 건너간 것처럼, 새 이스라엘인 교회(우리)도 예수님께서 계시는 구원의 배 위에 올라 세상이라는 바다를 건너 구원의 항해를 하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밀과 가라지에 관한 비유가 나옵니다. 우리는 살면서 인생의 적들이라 여겨지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호의를 교묘히 이용하여 선을 악으로 되돌려 주는 이들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표현에 따르면 “가라지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라지들이 사실 ‘내’가 아닌 ‘저들’ 또는 ‘저기’에만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가라지는 언제인가부터 우리 안에서 계속 생겨나고 자라납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13,25), 우리가 넋을 놓고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동안에 그러한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잊고 그분의 뜻을 생각하지 않은 채 우리의 욕망을 좇아 사는 동안, 가라지는 세상을 물들이고 우리 인생을 갉아먹고 망가뜨립니다. 우리는 세상과 우리 안에 선악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꾼인 우리는 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밀밭에서 열심히 일하며 세상과 우리 안에서 좋은 밀이 자라나도록 끊임없이 선을 지향하는 삶을 도모하는 일입니다. 

구원의 배에 의지하고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신뢰하며 세상과 우리 안에서 가라지가 자라나지 못하도록 맞서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을 믿으며 가라지와 싸워 승리하는 하루가 되도록 함께 힘을 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의 꿈에서 새로움 찾기

 

2010년 그룹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이 청소년을 위한 텔레비전 공익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저도 어릴 때는 여러분처럼 하고 싶은 게 참 많았습니다. 버스 기사도 되고 싶었고, 매표소 직원도 되어 보고 싶었어요. 한때는 경찰관과 군인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하버드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한 적도 있었죠.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그 어느 것 하나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절망하지 않았지요. 대신 꿈을 바꾸었죠. 심할 때는 일 년에 일곱, 여덟 번 꿈을 수정한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꿈이 지닌 힘을 믿고 그것을 이룰 때까지 계속해서 도전하는 거예요.” 
 
큰 공감을 가져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윈의 말처럼, 꿈을 간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도중에 꿈이 변경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꿈을 아예 갖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해도 안 돼. 이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편하고 쉬운 일만 할래. 다 귀찮아. 왜 내게는 갑부 부모님이 안 계실까?’ 등은 꿈이 꺾여 있는 말입니다. 이런 마음에는 ‘새로움’으로 나갈 동력이 전혀 없지요. 심지어 새로운 것을 보고도 전혀 새로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관심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매번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느끼려면 우리 역시 새로움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은 어디에서 시작할까요? 맞습니다. 나의 꿈에서 시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새롭게 시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복음 말씀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시죠. 그래서 우리 중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구원의 길에 들어서길 바라십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원수인 악마가 뿌리는 가라지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 악마의 유혹에 빠져서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이 있게 됩니다. 그 유혹에 넘어갔다고 주님께서 “너는 유혹에 넘어갔으니 이제 가라지다. 지금 당장 뽑아 버리겠다.”라고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종말이라는 수확 때까지 기다려주신다고 하십니다. 
 
세상 종말이 언제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빨리 회개해서 좋은 밀의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받아들여서 새롭게 변화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새로움을 자기의 꿈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꿈은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아름다운 질문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아름다운 대답을 얻는다.

- E.E. 커밍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는 반드시 누군가를 낳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해설하십니다. 밀은 하느님께서 세상에 뿌린 씨이고 가라지는 사탄이 뿌린 씨입니다. 밀은 하느님 자녀들이며 가라지는 악마의 자녀들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모방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각자 하느님을 모방하거나 악마를 모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사람은 세 부류입니다. 두 부류 중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직 완전히 선택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가리옷 유다처럼 완전히 악마의 자녀가 되기를 선택한 사람이 있고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선택한 이들이 존재합니다. 

내가 어느 쪽에 속한지는 나 자신만을 보아서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이들도 다 하느님을 위해 일한다고 여겼습니다. 더 쉽게 알아볼 방법은 타인에게 어떻게 가르치느냐입니다. 자녀를 보면 어쩔 수 없이 부모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나무는 열매를 보고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와가 뱀의 말을 듣고 뱀의 자녀가 되고 나서 한 행동이 무엇일까요? 자기 행동을 아담도 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내가 다른 이들에게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지를 보면 내가 누구의 자녀인지 명확히 드러납니다. 

히틀러는 집착하는 부모에게서 자랐습니다. 특별히 아버지가 그랬습니다.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술을 좋아했고, 권위적이었으면 난폭했습니다. 히틀러의 어머니는 그 집 가정부였으나 결국 알로이스의 세 번째 부인이 됩니다. 아버지는 성적 때문에 허리띠로 히틀러를 때렸고 히틀러는 오기로 그 맞는 숫자를 세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나 아버지에 의해 좌절되었습니다. 억압 때문인지 나중에도 미대에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엔 독재자가 되어 그림 수집에 몰두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면 미술품 수집을 위한 특수부대까지 창설하여 가장 먼저 그림을 약탈하였습니다. 

유럽 1,000여 곳에서 약탈한 미술품 중 발견된 것만도 500만여 점이 되었고 그것을 본 소유주에게 돌려주는 데도 6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히틀러의 아버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아이를 만들고 있는지를 살폈어야 합니다. 

현재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메이저리그에서 전설이 되어가는 선수가 있습니다. 오타니 쇼헤이입니다. 키 193cm, 잘생긴 외모, 투수와 타자에서 모두 메이저리그에서 정상을 찍고 있고, 자기 관리에 철저하며, 검소하고, 거기다 인성까지 뛰어납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벌써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선수라고 치켜올리고 있습니다.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이라고 불리는데, 사실 만화에서도 저렇게 완벽한 주인공이 있으면 욕을 먹을 정도입니다.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습니다. 

한국과의 경기에서도 이치로처럼 한국을 도발하기보다는 겸손하게 좋은 선수들이 많은 팀이니 방심하면 안 되겠다고 상대도 배려할 줄 아는 인성을 지녔습니다. 싸인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진 물건을 다 내려놓고 사인을 해주고 경기장에 담배꽁초나 휴지가 있다면 남이 버린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다 줍습니다. 심지어 1루로 나가다가 쓰레기가 있자 그것을 주워 자기 주머니에 넣고 출루하기도 하는 장면이 찍혔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의 부모가 어떤 인성은 지녔는지 궁금해집니다. 오타니는 현재 일 년에 800억을 번다고 하는데 어머니에게 매달 100만 원씩 타서 쓰고 그것도 쓰지 않아 매달 저축한다고 합니다. 혹시 우리나라 어떤 연예인들의 부모처럼 그것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을까요? 

그의 어머니는 아직도 파트타임 알바를 하고 아버지는 공장 근로자입니다. 오래된 시골집을 고쳐드리거나 새로 지어드린다고 해도 마다하고 부모는 자신들이 번 돈으로 살아갑니다. 자녀에게 손을 벌리기 위해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일을 하실 거냐고 어머니에게 물었을 때 어머니는 “너한테 업어달라고 할 수는 없지!”라고 대답했고 아버지도 “아들이 성공했다고 해서, 아들에게 밥 먹여달라고 할 수는 없지!”라고 했습니다. 오타니의 형제들도 오타니의 돈을 전혀 건들지 않고 월세방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벌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일 자체에 대해 소중하게 생각하는 부모님에게서 야구 자체를 사랑하는 오타니라는 열매가 맺히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부모가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낳아서 세상에 파견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파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과 명예와 쾌락이 행복이라고 가르치고 파견하겠고 어떤 사람은 검소함과 겸손과 절제가 행복이라고 가르칠 것입니다. 입으로 가르치지 않더라도 모범으로 가르칠 것입니다. 

저도 길에 떨어진 쓰레기가 남이 버린 행운이라 생각하고 줍는 버릇을 키워보려고 합니다. 성당 안에 떨어진 것들도 줍지 않았던 제가 부끄러워집니다.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주기 위해 달리는 사람들을 많이 탄생시키는 우리가 됩니다. 내가 어떤지 보면 주관적일 수 있으나 내가 낳는 사람들을 보면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벌도 사랑이다 .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 

하느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분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분이 없을 겁니다. 열심한 신자라면 더더욱 하느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하심과 너그러우심은 용서하심으로 드러난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한 신자라도 하느님은 용서도 하시지만 벌도 내리시는 분임을 믿지 않을 수 있고, 특히 벌은 하느님의 자비와 너그러우심과 반대되는 거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탈출기의 주님은 용서하시는 분이 당신이시고, 벌을 내리시는 분도 당신이시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자비하시기에 벌을 내리지 않으실 거라고 믿는 사람은 어찌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벌도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그것은 자기가 미움 때문에 벌 받았거나 내린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런 경험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서도 반대의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식을 정말 사랑하는 부모의 경우 사랑하기에 벌을 주지 않습니까? 

참사랑의 부모는 죄와 잘못을 계속 놔두면 자기 자식이 잘못될 것을 알기에 벌을 줘서라도 그것을 고치게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죄와 잘못을 계속 놔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오히려 자식을 방치하는 것이고 망치는 것일 겁니다. 

요즘 잘못된 자식 사랑 때문에 교사들이 학생을 벌하지 못하게 하고, 벌주는 것을 사랑이 아니라거나 편애라고 공격하여 문제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 우리 어른들은 비록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매를 대고 벌을 줘서라도 자기 자식을 잘 가르쳐달라고 선생님께 청했는데 요즘의 일부 부모들이 그 반대의 행위를 하는 것은 대단히 미성숙함입니다. 

그것이 다 자비와 벌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물론 미움과 분노 때문에 체벌을 가하거나 편애해서는 안 되고 그런 면에서 학생 인권 조례도 필요하지만,,스승이 자기 자식을 전인적으로 사랑하고 교육해주기를 원한다면 사랑과 벌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꾸고 스승의 사랑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탈출기의 가르침은 용서도 하느님 자비의 표현이지만 벌도 하느님의 자비라고 가르치는데,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이라면, 벌주시는 하느님에게서 더 큰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뜨거운 8월 익어가는 믿음의 팔월 첫날입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을 찾아 나서는 알폰소 성인의 새로워진 삶입니다.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를 뛰어넘으며 사랑의 길을 틉니다. 넘어서야 할 편견과 모순을 끊어냅니다. 

복음의 기쁨으로 다닌 길에서 만나게되는 사랑의 또 다른 기쁨입니다. 하느님 사랑에는 이와 같이 한계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주님의 말씀이며 공동체가 됩니다.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은 복음에 비추어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입니다. 안이하고 편협한 해석의 함정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맑고 깨끗한 믿음은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복음은 알폰소 성인의 삶처럼 찾아가는 과정 이 모두가 복음입니다. 너를 찾아가는 길이 곧 나를 찾는 길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시련은 인내를 저항은 극복을 두려움은 투신으로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낯설고 두려운 세계가 실은 우리를 부르시는 복음의 가장 뜨거운 초대입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가 중요합니다. 알폰소 성인의 삶처럼 인내가 필요하고 열정을 쏟아내는 소명이 필요합니다. 꿈꾸는 가슴이 또 다른 가슴을 울립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살피듯 사람을 살피는 안목이 열리길 기도드립니다. 알폰소 성인의 수많은 저술들을 통하여 이 시대에 살아있는 언어들을 새롭게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길 바랍니다. 

인격이 복음이고 복음은 나눔과 배려로 깊어지는 생활의 실천입니다. 생활의 실천가이신 예수님을 따릅니다. 실천이 함께하는 곳이 가슴의 말씀을 듣는 거룩한 소명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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