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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7/28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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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저는 기꺼이 당신께 제물을 바치리이다. 주님, 좋으신 당신 이름 찬송하리이다.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님의 은총을 인자로이 더해 주시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언제나 깨어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

 

2023년 7월 28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7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탈출기 성경 말씀 카드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탈출 20,9)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탈출 20,9) 탈출기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탈출기 20,1-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다.

  • 오늘 복음
    (마태오 13,18-23)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7월 28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마태오 복음
13장 18-23절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8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20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21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22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7월 28일 (금)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한곤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55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7월 28일 (금)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전두병 요아킴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04

📌 강론시작 16:19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7월 28일 (금)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3:09

📌 강론시작 11:14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7월 28일 (금)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2:12

📌 미사시작 1:01:24

📌 강론시작 1:10:1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말씀에 응답하는 것은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다.

 

길에 뿌려진 씨는 악한 자에게 말씀을 빼앗기는 사람입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어려움이 닥치면 말씀을 지켜 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는 세상 걱정과 재물이 말씀보다 더 큰 힘을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이미 들은 것처럼 말씀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관한 비유입니다. 그러나 그 구분은 확정된 것이 아니라 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순서대로 나타냅니다. 어쩌면 여러 땅은 우리에게 있는 다양한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유는 마치 사람들에게 좋은 땅이 되도록 권고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다른 면에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말씀에 대한 응답을 강조합니다. 비유에서 다른 조건들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말씀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하늘 나라는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이들 안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 결과도 어떤 이에게는 백 배로 어떤 이에게는 예순 배로 또 어떤 이에게는 서른 배로 저마다 다를 수 있지만, 상상을 넘어서는 풍성함은 다르지 않습니다. 

말씀에 응답하는 것은 말씀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이미 산상 설교(5─7장 참조)에서 말씀을 실행하는 믿음을 촉구합니다. 하늘 나라의 특징은 자주 ‘이미’와 ‘아직’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하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완성을 향하여 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변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새기며 행동에 옮김으로써 좋은 땅으로 바뀌어 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비행공포증을 없애는 방법

 

비행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형제님이 있습니다. 다른 교통수단은 괜찮은데 유독 비행기 탈 때만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비행 기간 내내 극심한 불안을 호소합니다. 그래서 미국에 갈 일이 있을 때, 배로 갈까도 심각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비행 공포로 인해 해외 나가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주변에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혹시 이 공포증을 없앨 수 있는 좋은 조언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어느 날, 이 말을 들은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을 확률이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죽을 확률보다 낮아.” 
 
친구의 이 말을 들은 이 형제는 바뀌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이제 비행공포증이 완전히 사라졌을까요? 아쉽게도 아니었습니다. 비행공포증은 그대로 있고, 여기에 화장실 공포증까지 생겼습니다. 화장실 가는 일이 하늘을 나는 일만큼 무시무시해진 것입니다. 
 
불안은 또 다른 불안을 만드는 법입니다. 따라서 불안을 멈추는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실제로 비행공포증을 없애는 방법으로는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심호흡과 복식호흡, 그리고 사람들과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불안하다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를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본인의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걱정하지 말고 당신께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대화하는 것은 모든 불안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잘하지 못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아직도 많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수록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주님을 향할 수 있도록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나를 통해 세상에 퍼져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제자들에게 해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어떤 마음에 떨어져야 할 것인지를 보라는 것이지요.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깨닫지 못하는 길에 뿌려진 씨,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않는 돌밭에 뿌려진 씨,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으로 숨을 막아 버리는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 이런 씨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좋은 씨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마음, 부족한 자신을 노력으로 계속 변화시키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하십니다. 
 
걱정으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 뜻에 맞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자기 마음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 찬 이 세상 안에서도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 메리 올리버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좋은 농부는 땅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해설해 주십니다. 길-교만, 돌밭-육욕, 가시밭-탐욕을 갈아엎은 좋은 땅은 좋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좋은 열매를 맺는 땅임은 어떻게 알까요? 좋은 땅은 곧 좋은 농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땅에 상관없이 씨를 뿌리고 있다면 좋은 땅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우리가 되게 하시려는 사람은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주님께서 뿌려진 땅은 이웃을 사랑하는 열매를 맺는 땅입니다. 그 이유는 그 땅 안에 그리스도께서 뿌려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복음을 전하는 이와 함께 계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 큰 사랑의 실천은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가 복음을 전하는 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에제키엘서에 예언자를 파견하실 때 하느님은 그에게 말씀을 먹여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그리하여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안에게 가서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에제 3,3-4)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 그 맛에 꿀처럼 답니다. 기쁨에 넘칩니다. 하지만 그것이 소화가 되면 배를 아프게 합니다. 이와 비슷한 다른 말씀도 들어봅시다.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그때에,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하는 소리가 나에게 들려왔습니다.”(묵시 10,10-11)

왜 말씀을 깨달으면 기쁘면서 동시에 배가 아플까요? 바로 그 말씀은 사랑인데 그 사랑의 기쁨을 나만 느끼는 것이 마음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언을 한다는 말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자녀는 굶고 있는데 어떤 부모가 꿀처럼 맛있는 것을 먹고 자녀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땅은 그래서 말씀을 다시 뿌리는 좋은 농부입니다. 그런데 착한 농부는 길과 돌밭과 가시밭을 가리지 않고 씨를 뿌립니다. 누가 나의 말을 무시하든 욕을 하든 공격하든 무조건 뿌립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복음을 받아들인 이는 더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밭이 무서워서 씨를 뿌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모든 권한을 가진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에는 지금은 목사님이 된 ‘고구마 전도왕’이라고 불리는 김기동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고구마 전도법으로 노상 전도로만 수천 명이 세례를 받게 한 인물입니다. 그도 아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반대하고 목사님 설교할 때 중앙을 가로질러 예배를 방해하기도 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교회를 가지 못하게 차에 태우고 두 어린아이와 함께 스키 타러 가는 중 커다란 사고가 발생합니다. 자신도 많이 다쳤지만, 그는 모두가 무사하게 해 달라고 믿지도 않는 하느님께 기도했고 하느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은 그를 바로 노상 전교로 데려갔고 그는 첫날 네 명에 실패하고 다섯 번째 사람에게 전교하게 됩니다. 기도 중 그는 고구마와 감자가 삶아지는 모습을 보고 젓가락으로 찔러보는 것처럼 선교하게 됩니다. 고구마가 무서워서 젓가락으로 찌르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그 분에게 정말로 그런 환시를 보여주셨다고 믿습니다. 효과가 있기 때문이고 신학적으로도 맞기 때문입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을 받아들인 사람이, 심지어 하느님을 손 위에 얹고 그분을 집어 입에 넣으면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사람을 보며 두려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좋은 밭에 떨어져 우리 안에 머무시는 분은 모든 권능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김기동 목사는 자신이 아무 힘도 없을 때 자기 가족을 아무도 죽지 않게 해주신 그분이 자신과 함께 계신 것을 믿기 때문에 전도할 때 힘들지 말라고 주님께서 씨앗이 뿌려질 대상을 고구마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좋은 농부는 땅을 무서워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사람이 고구마로 보이지 않으면, 그냥 밭이나 길이나 자갈밭으로 보이지 않으면 그 안에 권능의 주님께서 함께하신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은 광야에서 아무 먹을 것도 없이 버티실 수 있으셨던 것은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와 아버지의 모든 권한을 지니신 분이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문을 두드립시다. 존 스타트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일 복음이 그 자체가 주장하는 대로 기쁜 소식이며 또한 우리를 확신시키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십계명 묵상

 

오늘의 탈출기는 십계명입니다. 그런데 묵상하다 보니 한 번도 십계명에 대한 나눔을 한 적이 없었음에 생각이 이르렀고 어찌 이러했을까에도 생각이 이르렀습니다. 죄의식은 있어도 계명에 대해 생각지 않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의 무의식에 그리고 아마도 여러분의 무의식에도 죄의식이 깊이 있고, 그래서 아담과 하와뿐 아니라 저나 여러분도 하느님으로부터 숨고 싶고, 멀어지고 싶은 무의식이 있어 그 무의식이 작동하였던 것입니다. 

첫째 계명이 하느님만을 공경하고 섬기는 것인데,,그러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피하여 다른 사랑 안으로 숨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럴 때 하느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가만히 계시는가? 

그렇지 않다고 탈출기는 얘기하고 질투하신다고 얘기하는데, 설마 하느님이 우리의 사랑을 놓고 질투하시다니 그것 좀스럽고 하느님답지 않으며 하느님 체면 엄청나게 구기는 것이 아닐까요? 

체면 구기는 것이긴 하지만 하느님답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상대의 사랑에 좌우되거나 꺾이지 않습니다. 

상대의 사랑이 작아도 사랑을 거두거나 줄이지 않고 발산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질투하신다고 함은 좀스러움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음이며, 우리의 사랑을 끝까지 원하시는 영원한 사랑의 표시입니다. 

질투할 바엔 포기해버리는 우리의 작은 사랑과 비교하면 알 수 있지요. 어쨌거나 십계명의 첫째 계명은 당신만을 사랑하라는 계명인데 그래서 이것은 계명 또는 명령이라기보다 호소입니다. 

둘째 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말은 정당하게 부르면 괜찮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고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는 말입니다.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미천한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나이다.”라고 프란치스코가 노래한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옛날 우리가 예의를 굉장히 차릴 때 누가 아버지 이름을 물으면 ‘김현설씨입니다.’라고 답하지 않고 ‘김자 현자 설자입니다.’라고 답함과도 같지요.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은 이름 안에 가둘 수 없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유한한 존재는 창세기에서 인간이 피조물의 이름을 붙여 주듯 다 이름이 있지만 무한한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이름 지을 수도 부를 수도 없다는 뜻이겠습니다. 

셋째 계명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의 뜻이 무엇입니까? 

탈출기의 말씀을 잘 새겨보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나를 위한 안식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고, 이렇게 안식일을 지내는 것이 거룩히 지키는 것입니다. 

내가 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날이고, 하느님 사랑 안에 온전히 잠기는 날이며 그래서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사랑으로 새로워지고 힘을 회복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십계명 가운데 대신 계명만 묵상하고, 대인 계명에 관한 묵상은 다음을 위해 남겨두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삶이라는 열매를 기쁘게 맺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우리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게 됩니다. 주님 현존을 깨달아야 구원의 방법에 우리자신을 맡길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워지고 열매가 열매다워지는 것은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곧 열매가 됩니다. 말씀은 실행이라는 열매로 이어집니다. 실행으로 이어지지 않는 깨달음은 무의미합니다. 

말씀의 들음과 깨달음은 둘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우리는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깨달음으로 우리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회복하게 됩니다. 말씀은 우리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우리 일상을 껴안는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일상의 열매를 맺는 소중한 말씀의 오늘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사람은 말씀과 함께 살고 말씀과 함께 걸어가는 말씀의 여정을 삶이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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