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복된 야고보 사도가 사도들 가운데 첫 번째로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게 하셨으니 그의 영광스러운 증거로 교회를 튼튼하게 하시며 하느님의 보호로 교회를 지켜 주소서.
2023년 7월 25일 (화)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7월 2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마태오복음 성경 말씀 카드
무엇을 원하느냐? (마태 20,21)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코린토2서 4,7-15)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20,20-28)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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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마태오 복음
20장 20-28절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7월 25일 (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한곤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성 야고보 사도 소개 00:05
📌 미사시작 01:11
📌 강론시작 09:54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7월 25일 (화)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11:29
📌 강론시작 21:35
팔로티회 매일미사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7월 25일 (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2:19
📌 미사시작 1:01:29
📌 강론시작 1:09:42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떤 그리스도이십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나타내는 표현들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많은 경우 십자가 죽음의 의미는 구약 성경의 예언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대속’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나타내려고 복음서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하느님 종의 노래를 인용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의 죽음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법에 충실하며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길을 올곧게 걷는 이들을 말합니다. 악인들은 이런 의인들을 시기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려고 의인을 박해하고 죽입니다.
대속과 비슷한 의미의 ‘속량’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타냅니다. 속량은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키려고 ‘몸값’을 지불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죄에서 해방시키시려고 당신 자신을 몸값으로 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하여 달라는 청은 예수님을 세상의 권력자와 같은 메시아로 이해하는 시각입니다. 같은 메시아이지만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였던 것과 예수님의 업적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메시아는 임금의 표상을 사용하고, 백성을 다스린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그분께서는 이미 탄생 때부터 동방 박사의 경배를 받는 임금의 모습이시지만, 그 임금은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으십니다. 그러기에 섬기러 오셨다는 말씀은 제자들을 향한 것이기에 앞서 예수님 삶에 대한 요약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부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떤 그리스도이십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로또에 1등 당첨된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바꾼 것은?
지금 혹시 자신에게 바꾸고 싶은 것이 있지 않습니까? 바꾸고 싶은 것이 많은데 경제적인 부분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못 바꾼다면 이런 경우라면 어떨 것 같습니까?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바꾸고 싶습니까? 차를 바꿀까요? 집을 바꿀까요? 고급스러운 명품 옷과 비싼 보석류? 혹시 자기 외모를 바꾸겠다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이 제일 먼저 바꾼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부분이 참 재미있습니다. 글쎄 로또 당첨자들이 제일 먼저 바꾼 것은 자기 배우자라고 하네요.
로또에 당첨된 후 배우자와 헤어지고, 몇 달 안에 직계 가족과 의절하고, 친구들과도 연을 끊는 것이 순서라고 합니다. 이렇게 뜻밖의 행운을 얻게 되면 ‘불신의 형벌’을 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가까운 사람부터 의심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을 멀리하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쾌락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결국 고통스러운 결말을 맞이하고 맙니다.
불신하게 되면 그 어떤 사람과도 함께할 수 없습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사람’인데도 돈의 유혹 속에서 사람에 대한 의심이 더 커져서 함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는 있을까요?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된 보이는 인간을 멀리하는데, 보이지 않는 주님과 어떻게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 야고보 사도 축일을 맞이해서 복음은 야고보 사도의 어머니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머니는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세상의 권력을 탐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세상의 권력처럼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권력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열 제자가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기지요. 세상의 기준으로만 생각하니, 동고동락했던 동료인 제자를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겸손한 사람만이 다른 이를 받아들이는 믿음을 갖출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섬기는 삶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더 나아가 주님과도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외로움에서 벗어나 이 세상을 맘껏 누리는 유일한 방법은 이 믿음 안에만 있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일단 꿈꾸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칼 샌드버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님께서 우리 열정에 기름 부으시는 방법
오늘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야고보는 동생 요한과 함께 열정이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마지막 날에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청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하시자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주저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실 잔은 십자가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이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기자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올바른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목사님들에게 어느 교회에서 사목하시느냐고 물으면 그분들은 항상 “어느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조원동 주임 신부입니다”, 혹은 “조원동 주교좌 성당에서 사목합니다”라고 대답하는데, 이런 면에서 그분들 앞에서는 조금 부끄럽습니다. 저희도 섬긴다는 말을 많이 썼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야고보 사도의 열정을 나무라시지 않으신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높은 자리에 오르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처럼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1코린 9,24)
며칠 전에 직장에서 회장님에게 선교해서 세례를 주고 사장님에게 선교해서 오랜 냉담을 풀고 견진성사를 받게 한 신자 한 분을 만났습니다. 아랫사람을 선교하는 일도 쉽지 않은데 윗분들을 이렇게 선교했다는 말을 듣고는 이분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정으로 신앙생활 하시는 분을 만나기는 좀처럼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는 열심히 하지만, 또 어느 정도가 되면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저의 딜레마는 저를 포함해서 어떻게 열심한 사람들을 더 열심히 하게 만들지였습니다. 저는 경쟁을 싫어하기에 상을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꾸르실료를 할 때도 울뜨레야를 잘한 본당은 일 년에 한 번씩 상을 주었는데 받지 못한 본당들이 움츠러들까 봐 오히려 마음으로는 그러한 정책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런데 또한 그러지 않고는 열심한 분들을 더 열심히 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 사도의 열정을 꺾지 않으십니다. 요한은 자신을 나타낼 때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 옆자리에서 첫째였습니다. 예수님 가슴에 머리를 기댈 정도였습니다. 상을 주어서 열정을 더 끌어올리는 것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시험에 떨어진 것은 운전면허시험이었습니다. 대학생 때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세 시간 공부하고 붙었다고 하기에 저도 그 정도 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사흘은 공부했던 것 같습니다.
막상 시험장에 들어가 답안지를 받으니 너무 쉬웠습니다. 그때 제가 제일 먼저 풀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중에 점수를 확인하는데, 제가 97번이었는데 76점으로 나온 것입니다. 1종 보통이었기 때문에 80점이어야 합격이었습니다. 저는 크게 실의에 빠져서 그날 학교도 가지 않았습니다.
다음 달에는 잘 보겠다는 마음으로 한 달 동안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시험장에서 제일 마지막에 나올 정도로 끝까지 풀었습니다. 저는 만점 받았는지 알았습니다. 82점인가 84점으로 간신히 통과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100점을 맞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저는 80점 통과를 목적으로 공부하였습니다. 80점이 목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100점을 목표로 삼고 공부하였습니다. 누가 붙을 가능성이 크겠습니까? 목표를 100점에 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6-27)
저도 목표를 크게 잡습니다. 우리 목표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나라도 높고 낮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첫째가 되려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더 겸손한 사람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를 더 높게 가집시다. 성인이 되는 것을 넘어서서 성모님 옆자리를 노립시다. 목표가 생기면 삶이 바뀝니다. 어떤 분들은 하늘에도 높고 낮음,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있다고 말하면 처음 듣는다고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도 요한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계명이라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취급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늘 나라에 간다고 해서 내가 성모님과 동급의 취급을 받지 않습니다. 한 만큼 받는 것이 정의입니다.
이 사실이 잊힐 때는 대부분 신앙인이 자신이 느끼기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으면 거기서 노력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도 첫째가 있고 그 방법은 가장 겸손해지는 것이라고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 하지 말고 위대한 성인이 되기 위해 신앙생활 합시다. 그러면 적어도 천국엔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처음엔 뜻이 엇갈렸을지라도
“너희도 내 잔을 마실 것이다.”
오늘 야고보 사도 축일의 복음을 읽으면서 떠오른 단어는 엇갈림이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신 뜻과 야고보 사도의 따르는 뜻이 엇갈렸다는 뜻입니다.
뜻이 엇갈리다!
그렇습니다. 주님과 야고보 사도 간에 처음에는 뜻이 엇갈렸습니다. 주님의 뜻은 야고보 사도가 당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고, 당신과 함께 고통의 잔을 마시게 되는 것이었는데 야고보 사도의 뜻은 꽃길을 가고 축배를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을 가고, 고배를 마시는 것임을 알았다면 아예 따르지를 않았을 텐데,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마침내 뜻이 엇갈리고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어머니를 통해 야고보와 요한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났을 때 주님께서는 적지 아니 실망하셨겠지만, 그것을 드러내시지 않고, 당신께서 마실 고배를 너희도 함께 마실 수 있겠냐고만 물으십니다.
이에 야고보와 동생 요한은 마실 수 있다고 호기롭게 대답하는데 주님께서도 너희도 마시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래서 그 예언대로 야고보 사도는 첫 번째로 수난하게 됩니다. 뜻은 엇갈렸지만, 운명은 엇갈리지 않은 것인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야고보 사도가 자기의 뜻이 좌절되었을 때, 그제서야 자기 앞에 놓인 운명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고, 그때라도 엇갈렸던 자기 뜻을 주님의 뜻과 일치시켰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우리에게 교훈이 되고 모범이 되는 점이고, 이 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로 갈 때 나의 성공과 성취를 목적으로 갔다가도 그것이 주님 부르심의 참된 길이 아님을 알게 됐을 때 그때라도 주님과의 일치로 나의 목표를 바꾸는 겁니다.
우리도 야고보의 어머니처럼 수없이 청하고, 우리도 야고보처럼 수없이 주님께 청합니다. 그런데 마리아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창설자 마리 드 라 빠시옹의 말씀처럼 우리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하고, 그래서 주님께 청원할 때 처음엔 성공과 성취를 주십사 청했다가도, 궁극적으로는 성공과 성취가 아니라 사랑과 일치를 청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적어도 우리는 이랬어는 안 됩니다. 상대를 존중하고 섬기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기본을 갖추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섬기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기본중의 기본입니다. 섬겨야 할 대상을 잃어버린 우리들 삶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며 첫째가 되는 주님의 사람입니다.
섬기는 것이 나를 찾는 길입니다. 우리 자아가 죽지 않고서는 하느님과 이웃을 섬길 수 없습니다.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섬김의 길입니다. 섬기는 것이 사랑의 지혜이며 존중의 열쇠입니다.
존중과 섬김의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실행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섬김의 맛이 복음의 가장 좋은 맛입니다. 주님께서는 소통과 교류의 출발점이 다름아닌 섬기는 사랑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섬기는 사랑은 소유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치유할 수 있는 섬김이 됩니다. 섬기는 것이 이 자리를 더욱 아름답게 가꾸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전달되는 진정한 행복은 섬기는 사랑입니다.
섬김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은 치열하게 마음밭을 일구는 수행입니다. 마음의 천적은 교만이며 마음의 복음은 섬기는 사랑입니다. 섬기는 것이 영글어가고 익어가는 사랑입니다. 섬기지 않고서는 오래갈 수 없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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