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저는 기꺼이 당신께 제물을 바치리이다. 주님, 좋으신 당신 이름 찬송하리이다.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님의 은총을 인자로이 더해 주시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언제나 깨어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
2023년 7월 27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7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마태복음 성경 말씀 카드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마태 13,14)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탈출기 19,1-2.9-11.16-20ㄴ)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이 시나이 산에 내릴 것이다. - 오늘 복음
(마태오 13,10-17)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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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마태오 복음
13장 10-17절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7월 27일 (목)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오병웅 베드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37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7월 27일 (목)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진슬기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55
📌 강론시작 17:24
팔로티회 매일미사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7월 27일 (목)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3:39
📌 미사시작 1:03:04
📌 강론시작 1:11:08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께 열려 있나요?
복음서는 예수님의 업적을 예언자들의 말씀과 함께 풀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업적이 예언의 성취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예전부터 하느님의 계획으로 모든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이사야서 6장 9절을 인용하신 이 말씀은 마치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깨닫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것도 하나의 비유로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들어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마음이 무디어진 백성을 향한 경고입니다.
예언자들의 말씀과 행동은 하느님의 뜻을 표현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는 백성의 잘못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들은 귀가 있지만 제대로 듣지 못하고 눈이 있지만 감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마음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비록 단순한 비유이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하늘 나라의 신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제대로 보고 있는지, 우리의 귀가 제대로 듣고 있는지,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께 열려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흔적 만들기
초등학교 1학년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종이에 사람을 그리세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나쁜 말을 하며 종이를 구겨보세요. 이제 좋은 말을 하며 종이를 다시 펼치세요. 어때요? 구겨졌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죠? 그래요. 나쁜 말을 하고 나면 나중에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상처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답니다. 그러니까 친구한테 나쁜 말을 하면 안 되겠지요?”
아이들은 이 말을 듣고서 친구한테 나쁜 말을 쓰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로만 “친구한테 나쁜 말 하면 안 돼요.”라고 말했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냥 듣기만 하고 반대쪽 귀로 흘려버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이런 예는 아이들에게만 도움이 되는 말이 아닙니다. 어른 역시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구겨졌던 흔적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나쁜 말과 행동을 통해 아픔과 상처를 주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흔적은 내게 고스란히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서 이야기해주는 것과 그냥 서술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특히 상대방이 말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또 상대방이 그 말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예를 들어서 쉽게 설멍합니다. 특히 사랑한다면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손길이 이러했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 가장 쉬운 비유 말씀을 통해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일상 삶 안에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쉬운 일상의 비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곧바로 알아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만이 구원의 대상이 아니지요. 주님께서는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두가 구원되기를 원하십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주님의 이 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나의 이웃에게 사랑을 전해야 하며, 내가 깨달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다른 이에게 전달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며,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 신비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겨야 할까요? 나쁜 흔적, 상처 되는 흔적이 아닌,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흔적을 만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아!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면 천국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로버트 브라우닝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속세의 지혜도 찾지 않으면 천상의 지혜를 어떻게 얻으랴!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다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라는 아리송한 말씀을 하십니다. 왜 제자들에게는 비유를 설명해주시고 군중들에게는 설명하지 않으실까요? 바로 제자들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가진 것은 ‘지혜’입니다. 지혜는 비유를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비유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능력이 되지 못하면 천상의 것은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속세의 지혜는 천상의 지혜로 오르는 사다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요한 3,12)
제가 말하는 구원의 원리는 이 지상의 새로 태어남을 인정해야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이는 부모의 희생과 가르침으로 새로 태어나는 사실을 말하면 많은 이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아이가 저절로 어른이 되는 줄 압니다. 그 안에 부모의 피 흘림이 있습니다.
그 피 흘림은 사랑과 가르침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은총과 진리로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은 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혜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세상의 지혜로 무장하여 비유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를 깨우친 이들만이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게 됩니다.
여기 개신교 유명인 세 분의 예수님을 만난 간증을 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만나주시기 위해 미리 준비시키셨습니다.
추상미 씨는 오래 기다렸던 아기가 자꾸 죽는 꿈을 꾸게 되자 극한 불안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1층에서 이제 끝내자고 생각했을 때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네 아버지이며 신랑이다. 내가 네 아버지이며 신랑이다.”
그리고 그녀를 손으로 일으켜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우울증이 사라지고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남편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를 채워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와 남편은 다 연극배우이기 때문에 가족과 시간을 충분히 해줄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부족한 것부터 채워주십니다. 주님은 이 세상 것에서 시작하십니다.
이영표 씨는 유럽에서 뛰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없었습니다. 개신교는 더 싫어하였는데 그들이 배타적이고 그들의 삶이 진리를 증언하지 못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네 삶의 주인은 누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는 “내 삶의 주인은 나지!”라고 자랑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중요한 것은 하나도 내가 정하지 못한다는 것. 나의 성별, 탄생지, 탄생 연도, 나의 부모, 나의 이름 등 모든 것이 정해져 있고 내가 오늘 무엇을 먹을 것인지, 무엇을 입을 것인지 등 나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만 내가 결정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나의 삶의 주인은 내가 될 수 없고 그래서 죽음이 있고 하느님이 계시다면 나의 내세의 삶도 내가 정할 수 없음도 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어느 예배 때 가슴에서 말도 안 되는 음성, 곧 “내가 너를 유럽으로 보내주겠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2주 뒤 히딩크 감독이 있는 아인트호벤으로 이적하게 됩니다. 비로소 자신의 주인이 자신이 아님을 완전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차인표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차인표 씨는 어렸을 때부터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지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지저스, 지저스란 연극의 예수님 역할을 4년이나 했지만, 그분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컴패션이란 단체에서 동인도 콜카타로 가난한 아이들을 만나러 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반 봉사자들과 섞이기 싫어서 일등석을 타고 갔습니다. 목사님이 아이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좀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한 아이가 다가오자 그는 그 말을 하려고 하는데 비로소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지 않고 가장 가난한 아이 옆에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모든 사람이 똑같습니다. 이 세상 지혜를 무시하면 천상의 진리에는 절대 도달할 수 없습니다. 사다리 없이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배 없이 바다를 건널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를 무시하지 맙시다. 지혜가 있는 이들에게서 배웁시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먼저 배우지 못한다면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많은 책을 읽고 유튜브를 통해서라도 좋은 지혜를 배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부디 이 세상에서부터 잘 사는 사람,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나는 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잘 사는 사람입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허락되지않는 저들
어제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면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말인데 이것은 하느님의 엄청난 차별이고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 잘못이 아니라는 뜻이 되지요.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어지는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들”이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감각이 불능상태이고 마비 상태인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하늘나라에 대한 감각이 불능이거나 마비 상태인 이유는, 저들에게는 영적인 감각이 없기 때문이고 이 세상 감각만 있기 때문입니다.
힌두교나 불교에서는 육신의 두 눈 외에 제삼의 눈으로 ‘Eye of Wisdom’ 곧 ‘지혜의 눈’ 또는 ‘혜안’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을 일컬어 ‘저 사람 참 혜안이 있다.’라고 흔히 얘기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불교의 혜안과 같이 영안에 관해 말씀하시고, 이 영안이 있어야 하늘나라의 신비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어떤 사람이 영적인 감각이 마비되고, 어떤 사람이 영안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복음의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이 말을 바꿔서 얘기하면 본다는 사람에게는 보여주시지 않고, 보여주십사고 청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며, 슬기롭다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감추시고, ‘저는 철부지여서 잘 모릅니다.’라고 하는 사람에겐 보여주신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실로 안다는 사람,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만 알 뿐,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음을 알지 못하고, 특히 하늘나라의 신비와 관련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아는 것은 정작 알아야 할 것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이고, 사실 하늘나라 신비와 비교하면 몰라도 되는 것들뿐입니다. 몰라도 되는 세상 것은 잘 알고 잘 보지만 정작 봐야 할 하느님 나라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영적 감각을 살아나게 하고, 교만은 영적 감각을 마비되게 하는 것임을 겸손하게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위한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보는 것도 듣는 것도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제대로 볼 수 없고 제대로 들을 수 없습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신비는 믿음과 함께 자라고 사랑과 함께 피어납니다. 신비를 통하여 가장 중요한 것을 알게됩니다. 생생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우리의 생활 안에 와 있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는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님을 섬기고 사랑한 적이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용서도 허락이 필요한 하늘 나라의 신비입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가 가 닿는 자리가 복음의 자리입니다.
신비도 상처를 입습니다. 사랑할수록 깊이 찔리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가장 좋은 하느님 사랑이 가장 좋은 신비입니다. 아직도 그 신비를 모르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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