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내 양 떼를 찾아서, 그들을 먹일 목자를 세우리라. 나 주님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하느님, 하느님의 교회에 언제나 새로운 덕행의 모범을 보여 주시니 영혼들을 사랑하는 복된 알폰소 주교의 열정을 본받아 저희도 마침내 하늘 나라에서 그가 받은 상급을 받게 하소서.
2023년 7월 31일 (월)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7월 3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탈출기 성경 말씀 카드
보아라, 내 천사가 네 앞에 서서 나아갈 것이다. (탈출 32,34)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탈출기 33,7-11; 34,5ㄴ-9.28)
주님께서는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 - 오늘 복음
(마태오 13,36-43)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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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살리라.
마태오 복음
13장 36-43절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때에
36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7월 31일 (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창현 비오 신부 집전
📌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소개 00:05
📌 미사시작 01:14
📌 강론시작 08:54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7월 31일 (월)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37
📌 강론시작 18:04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7월 31일 (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3:59
📌 강론시작 14:22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자는 동안에 계속 생겨나고 자라는 가라지들
복음서에는 배가 자주 등장합니다. 때때로 이 배는 구원의 배, 곧 교회를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은 배 위에 계신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일곱 가지 비유 가운데 하나입니다(13,3 이하 참조).
마태오 복음사가는 배가 떠 있는 갈릴래아 호수를 “바다”(13,1 원문 직역)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마태오 복음사가가 구상하고 의도한 설정입니다. 복음사가는 먼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홍해를 건너간 것처럼, 새 이스라엘인 교회(우리)도 예수님께서 계시는 구원의 배 위에 올라 세상이라는 바다를 건너 구원의 항해를 하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밀과 가라지에 관한 비유가 나옵니다. 우리는 살면서 인생의 적들이라 여겨지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호의를 교묘히 이용하여 선을 악으로 되돌려 주는 이들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표현에 따르면 “가라지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라지들이 사실 ‘내’가 아닌 ‘저들’ 또는 ‘저기’에만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가라지는 언제인가부터 우리 안에서 계속 생겨나고 자라납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13,25), 우리가 넋을 놓고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동안에 그러한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잊고 그분의 뜻을 생각하지 않은 채 우리의 욕망을 좇아 사는 동안, 가라지는 세상을 물들이고 우리 인생을 갉아먹고 망가뜨립니다. 우리는 세상과 우리 안에 선악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꾼인 우리는 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밀밭에서 열심히 일하며 세상과 우리 안에서 좋은 밀이 자라나도록 끊임없이 선을 지향하는 삶을 도모하는 일입니다.
구원의 배에 의지하고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신뢰하며 세상과 우리 안에서 가라지가 자라나지 못하도록 맞서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을 믿으며 가라지와 싸워 승리하는 하루가 되도록 함께 힘을 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반드시 정답일 리 없다.
1999년 가족 여행으로 태국에 다녀왔습니다. 난생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어 해외에 나간 것이지요. 더군다나 부모님을 비롯해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자리여서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결정적으로 음식까지도 전혀 다른 나라였습니다.
그때 정말로 저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음식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쌀국수입니다. 워낙 국수를 좋아하는 저였기에 아주 맛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국물에서 심한 화장품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 쌀국수를 먹기가 힘들었습니다.
바로 ‘고수’라는 풀 때문이었습니다. 음식에 화장품 냄새 나는 풀을 넣는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마치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것과 같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거의 25년 전의 일이지요.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신부들과 종종 베트남 식당에 가서 쌀국수를 먹습니다. 그런데 “고수 빼고요~~~”라고 말하지 않고, “고수 많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고수와 쌀국수가 입에 함께 들어왔을 때의 맛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고수가 있기에 쌀국수의 맛이 배가 된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1999년의 저는 고수를 즐겨 먹는 지금의 저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맛의 취향이 이렇게 바뀝니다. 따라서 무엇이든지 단정 지어서는 안 됨을 깨닫습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반드시 정답일 리 없습니다. 지금 보이는 것이 ‘참’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습니다. 열린 마음이 있어야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너머에 있는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겨자씨와 누룩은 당시에 쉽게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볼 수 있는 것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관해 설명해주시지요. 즉, 하늘 나라는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지금 삶에서 하늘 나라를 매번 느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 작습니다. 너무 작아서 ‘무슨 씨앗이 이렇게 작아?’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자라면 그 작은 씨가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나무로 변합니다. 누룩 역시 마찬가지로 ‘이렇게 적은 양으로 무슨 변화가 있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밀가루 서 말 속에 아주 적은 양만을 넣어도 온통 부풀어 오릅니다.
겨자씨만 가지고 큰 나무를 상상하기 힘듭니다. 누룩만을 가지고도 부풀어 오르는 빵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도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금 보이는 것만으로 결론 내는 것이 아닌,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지혜만이 하느님 나라 안에 살 수 있도록 해줍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있었을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든다.
- 존 드라이든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강론에 비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
저는 강론에 항상 비유를 하나 이상 찾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라고 하십니다.
어째서 진리를 깨달은 이는 비유를 통해서만 가르치실 수밖에 없으실까요? 모든 비유를 다 깨달았다고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비유를 깨달은 율법 학자가 꺼내는 옛것과 새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비유입니다. 옛 비유를 새 비유를 통해 가르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면 왜 강론에 비유가 들어가야만 진정 비유를 이해한 제자가 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우선 오늘 비유 말씀을 이해해봅시다. 오늘은 하늘 나라의 비유 중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다른 비유들에 비하면 조금 해석이 어렵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들이 해 놓은 해석은 조금은 제각각입니다.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처럼 우리 안에 심어집니다. 그러면 내 안에서 어떤 열매가 맺히느냐면 이웃사랑의 열매가 맺혀집니다. 새들이 그 나무에 깃드는 것처럼 힘들고 쉴 곳이 없는 이웃들이 나에게 와서 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밀가루 서 말 속에 들어간 누룩은 내 안에 들어와 어떤 변화를 일으킵니다. 왜 서 말일까요?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농부가 뿌린 씨가 열매 맺지 못하게 만드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길처럼 교만한 사람과 돌밭처럼 육체적인 사람과 가시밭처럼 돈 걱정 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밭이라고 하더라도 이 세속, 육신, 마귀의 성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열매를 맺을수록 그 성향들이 줄어들고 부드러운 밭이 됩니다. 그래서 30배의 열매를 맺는 밭이 60배를 맺게 되고 나중에는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결국 하늘 나라는 생존욕구가 줄어들게 만들어 이웃을 편안하게 쉴 수 있게 해주는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멍에를 주시며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가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은 모기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모기는 이웃을 찔러 달아나게 만듭니다. 쉼을 가진 사람만이 쉬게 할 수 있습니다.
비유는 체험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이어주는 다리와 같습니다. 꿀을 먹어본 이가 그 맛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꿀맛에 관해 설명할 때는 어때야 할까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소재들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꿀맛은 마치 연인들의 사랑처럼 달콤하고, 설탕물처럼 달며, 꽃의 향기가 납니다.”
그렇다고 꿀이 연인들의 사랑의 맛은 아니고 설탕물도 아니며 꽃향기와는 또 다릅니다. 만약 이것들을 각자 해석하려고 한다면 잘못된 해석으로 나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꿀맛은 연인들의 사랑이라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설탕물이라 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꽃으로부터 왔으니 꽃향기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질을 잊습니다. 먼저 그 사람이 말하려는 추상적인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꿀은 맛있습니다.”
꿀맛을 보지 못한 이들은 꿀이 맛있다고 하는 사람이 그냥 자신들을 무시하고 놀리려고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맛을 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듯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해버립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아, 꿀은 연인들의 사랑처럼 달콤하게 맛있구나! 설탕물처럼 달구나! 꽃향기가 나는 맛있는 무엇이구나!’
하늘 나라의 비유도 상당히 여러 개입니다. 그러나 그 비유도 하나의 개념으로 모입니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하늘 나라는 결국 성령으로 누리는 하느님 자녀의 행복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하늘 나라 비유의 개념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오는 은총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부모의 희생으로 오는 선물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하느님 사랑을 받아 행복한 사람이 어떤 존재가 되는지에 대한 비유 말씀입니다.
모든 비유는 그 말하려는 개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개념은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그 말하려는 사람을 믿고 사랑할 때 비유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먼저 꿀을 먹어본 사람이 그 꿀이 맛있다는 말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비유 말씀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쫓아가서 꿀을 먹어본다면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비유를 이해함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비유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비유를 그대로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비유를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비유, 곧 다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게 ‘모기와 예수’라는 비유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비유가 더 쉽게 이해되고 그러면 예수님이 주시려는 하늘 나라를 순종으로 체험할 용기를 얻게 됩니다.
따라서 비유를 모두 이해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 진리를 알려주는 율법교사가 됩니다. 율법교사가 되면 먼저
1.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말씀하시는 하늘 나라의 개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2. 그 개념을 비유 말씀을 통해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분께 다다르기 위해 비유의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비유로만 말씀하셨습니다.
3. 비유를 이해했다면 용기를 내서 그분께 순종하고 자신도 그분이 이끄시려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하늘 나라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4. 자신을 이끌어준 비유를 설명하되 새로운 비유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5. 그 비유를 이해할 수 있도록 신뢰를 주기 위해 희생합니다. 그들이 그 비유를 말하는 이를 신뢰하게 된다면 그들도 비유를 이해하게 될 것이고 새로운 율법 교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비유를 이해시키기 위해 우리는 새로운 비유를 찾아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겨자씨를 뿌리자.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오늘도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첫째 비유는 겨자씨의 비유로서 겨자씨는 하늘나라인데 어떤 사람이 그 씨를 자기 밭에 뿌린다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세 요소는 ‘어떤 사람’과 ‘겨자씨’와 ‘자기 밭’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이라고 하심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겨자씨 곧 하늘나라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도 주어지고 너에게도 주어지는 것으로서 누가 심든 주어지는 대로 겨자씨를 심기만 하면 그 씨는 크게 자라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씨가 중요합니다. 사실 씨란 겨자씨뿐 아니라 모든 씨가 작고, 작지만 크게 자라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겨자씨 곧 하늘나라라는 씨를 뿌려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 씨를 뿌린다거나 악마의 씨를 뿌린다거나 욕망이라는 씨를 뿌릴 경우, 그때가 문제이고, 그 사람이 문제입니다.
자기 씨를 뿌리면 자기가 자기 안에서 크게 자라날 것이고, 악마의 씨를 뿌리면 악이 자기 안에서 크게 자라날 것이며, 욕망이라는 씨를 뿌리면 욕망이 자기 안에서 크게 자라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밭’이 자기 마음일 수도 있지만 자기 교회나 자기 사업이나 자기 계획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교회에 자기 씨를 심으면 자기 교회는 하늘나라로 성장하지 않고,,자기 소유의 나라가 되고 말 것이고 자기 교회가 대형 교회가 될 것입니다.
제가 볼 때 개신교 많은 대형 교회가 이런 식으로 커진 교회이고, 가톨릭의 경우엔 성당이 사제 개인의 소유는 아니지만 본당이 하느님 중심의 하느님 나라가 자라게 하는 사목이 아니라 자기가 왕인 양 자기중심의 사목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겨자씨 곧 하늘나라의 씨앗을 뿌리는 사목이 아닌 겁니다.
자기 사업이나 계획도 하느님 사업이나 계획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식당에 가면 네 시작은 미미하나 그 끝은 창대하다는 성경 구절을 달아놓곤 하는데 이처럼 자기 사업이 번창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제가 하는 협동조합과 식당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게 이 사업이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 방송을 타면 좋겠다고도 하십니다.
저도 그런 마음이 없지 않고 그래서 그것이 유혹으로 다가올 때도 있는데 저는 그것을 항상 경계하고 그럴 때마다 단호하게 끊어버립니다. 프란치스코가 세운 작은형제회의 작은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작은형제회가 자기 수도회가 될까 봐 조심하였고, 작은형제회가 큰 수도회가 될까 봐 더 조심하고 그래서 형제들의 수가 갑작스럽게 늘어나는 것도 걱정했습니다.
사실 수도회가 큰 것이 중요하지 않고 복음적인 것이 중요하고, 형제들의 숫자가 많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한 명이라도 프란치스칸다운 프란치스칸이 있는 것이 좋겠지요.
제가 가끔 얘기하듯 저와 같은 사람 수만보다 프란치스코 성인 한 분이 세상을 진정 복음화하잖습니까? 그러므로 우선 내 안에, 다음으로 우리 공동체에 복음의 겨자씨를 뿌리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처럼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하늘 나라는 말씀 속에 겨자씨가 있습니다.더딘 성장도 빠른 성장도 모두 하느님께서 하시는 사랑입니다.성장하는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성장이 사랑을 지켜줍니다.사랑 안에 숨겨놓으신 하늘 나라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발걸음은 사랑처럼 서두르지 않습니다.모두가 주님께서 뿌리신 사랑의 씨앗들입니다.성장을 지나야 성장이 있습니다.자라날 때 가장아름다운 순간들입니다.애송이와 철부지가 자라납니다.사랑은 자라나게 하는 하늘 나라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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